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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개도로(본래 해자였던 곳)에서 바라본 관풍루 쪽 달성토성
 복개도로(본래 해자였던 곳)에서 바라본 관풍루 쪽 달성토성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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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도 고향에서는 알아주지 않는다고 한다. 공기와 물의 소중함이 잊히기 쉬운 것도 그와 같다. 역사 유산 중에도 가까이 있고 늘 찾던 곳이라는 이유로 그 가치가 소홀히 다뤄지는 사례가 있다. 대구에서는 달성토성이 대표적 경우일 듯하다.

달성토성은 이름부터 잃었다. 흔히 달성공원이라 부른다. 하지만 서기 261년에 달벌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다. 공원화된 것은 1905년 이래인데, 우리 겨레의 역사의식을 흐리려는 정치적 목적으로 일제가 만행을 저질렀다.

달벌성에는 경주 월성의 축성술이 적용되었다. 월성은 해자가 있고, 물 건너 높은 지대에 성곽을 쌓았다. 즉 달성토성을 제대로 답사하려면 해자와 해자 넘어 절벽 위에 가로놓인 천혜의 성곽부터 눈에 담아야 한다. 그런데 해자가 매립되고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곧장 정문으로 들어가면 안 된다. 산 속에서는 산을 볼 수 없듯이, 그렇게 걸으면 달성토성을 볼 수 없다. 복개도로 주차장에 서서 관풍루를 쳐다볼 일이다. 주차장 일대가 과거에는 해자였다. 고개를 뒤로 크게 젖혀 절벽 위 관풍루를 보노라면 달성토성이 어째서 군사시설인지, 일제가 무엇 때문에 이곳을 공원화했는지 자연스레 헤아려진다.

달성토성을 제대로 보는 코스

이윽고 성 안으로 들어간다. 정문에서 오른쪽으로 곧장 걸어 관풍루로 가는 여정이 가장 바람직하다. 해자 터에 서서 절벽 위 성곽 쪽을 경이롭게 바라보았으니 드디어 성곽 위를 걸을 차례이기 때문이다.

관풍루 동쪽 절벽 아래로 해자 터를 내려다 보라. 헉헉 가쁜 숨을 내쉬며 가까스로 기어 올라오는 적군이 있다면 '단숨에 퇴치할 수 있겠다' 싶은 지형임이 단숨에 깨달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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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풍루
 관풍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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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풍루를 등지고 계속 걸어 동쪽 성곽과 북쪽 성곽이 만나는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선다. 이 일대는 네모난 돌들이 많이 노출되어 있어 성곽 분위기가 두드러진다.

지대가 높은 점도 그런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데 한몫을 한다. 이 지점에 잠시 머물다가 다시 관풍루로 돌아온다. 그렇게 걸어야 (달성공원이 아니라) 우리나라 고대 축성술을 증언해주는 달성토성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관풍루는 본래 경상감영 정문이었다. 현재 위치로 강제 이전되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1906∼1907년 대단한 친일파였던 당시 대구군수 박중양이 대구읍성을 헐어버렸다. 성벽을 없애야 자신들의 장사에 도움이 된다면서 일본인들이 부탁을 해오자 박중양은 중앙정부의 허락도 받지 않고 제 마음대로 국가 중요 군사시설을 파괴했다.

그런 범죄 행위에도 불구하고 박중양은 처벌은커녕 오히려 평안도 관찰사로 승진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양자로 소문난 박중양을 조선 정부도 어떻게 하지 못했다. 암울했던 1900년대 초반 우리나라 상황을 떠올리면서, 관풍루가 하루 빨리 제 자리를 찾게 되었으면… 하고 기원해본다.

관풍루 현판 아래로 계단이 있다. 아래로 내려가 관풍루를 해설한 안내판을 읽은 뒤, 최제우 동상을 본다. 최제우는 동학을 창시한 인물로, 대구 관덕정에서 처형되었다. 그가 죽은 후 일제에 맞서 싸운 동학혁명이 일어났고, 수십 만 명의 농민들이 죽임을 당했다. 최제우 동상은 일제가 우리나라에 끼친 또 다른 피해를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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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 동상
 최제우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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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에서 평지로 내려와 오른쪽으로 걸으면 잔디밭 안에 예쁘게 앉아 있는 빗돌을 보게 된다. '죽농 서동균 예술비'이다. 서동균 선생은 1919년 기미독립만세운동 때 일제에 체포되어 투옥되기도 했다. 친일 예술가도 많았던 험난한 시절에 민족정신을 올곧게 지킨 그를 기려 묵념을 올린다.

공원 한복판으로 난 길을 따라 높고 오래된 나무 아래로 향한다. 넓은 그늘 곳곳에 벤치들이 놓여 있다. '서침 나무'라는 작은 푯말이 눈길을 끈다.

조선 초기에는 달성이 서씨 문중 소유였다. 세종이 다시 군사시설로 쓰기 위해 서씨 문중 대표 서침 선비에게 다른 땅을 줄 테니 달성과 바꾸자고 제안했다. 서침 선비는 임금에게 다른 땅 대신 대구 사람들의 세금을 낮춰달라고 청했다. 일반백성을 사랑하는 상류층의 따뜻한 마음가짐을 잘 보여주는 모범 사례 탄생이었다. 그래서 '서침 나무'를 지정하고, 옆에 '달성서씨 유허비'도 세워 역사에 그 아름다움을 아로새기고 있는 것이다.
 
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상임대표 우대현)가 마련한 광복회 창립 108주년 기념 행사가 서침나무 아래에서 진행되고 있다.
 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상임대표 우대현)가 마련한 광복회 창립 108주년 기념 행사가 서침나무 아래에서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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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회가 결성된 독립운동의 성지

서침 선비의 덕을 찬양한 후 나무 아래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다. 섣부른 움직임이다. 몸을 돌려 서침나무 옆 광활한 잔디밭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 일대는 일제 신사가 설치되었던 치욕의 현장이면서 동시에 1915년 8월 25일 광복회가 결성된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성지이다.

광복회는 제5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정 국사 교과서에 "1910년대에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독립운동단체"로 소개되었던 대단한 항일결사이다. 어찌 광복회 창립 장소를 알지도 못한 채 스쳐 지나갈 수 있으랴!

우리나라에서 처음 세워진 시비 '나의 침실로'로 이동한다. 빗돌에 새겨져 있는 글자들을 읽는 것은 당연하고, 상화 시비 앞에 섰으니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도 한번 암송해 볼 일이다.

전문을 기억하지 못하는 일행을 위해 미리 준비했던 프린트물을 나눠준다면 모두들 좋아하리라. 이상화는 걸출한 민족시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동지들과 더불어 달성토성에서 독립운동단체 ㄱ당을 조직하기도 한 독립유공자이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노래도 있다. 단체 답사라면, 상화 시비 앞에서 그 노래를 합창하는 진행도 괜찮을 법하다. 눈물이 필 돌지도 모른다. 윤봉길 지사가 1926년 6월호 개벽에서 '빼앗길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읽고 중국 망명을 결심했다는 일화도 있지 아니한가.
 
이상룡(근경) 허위(원경) 기념비
 이상룡(근경) 허위(원경)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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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토성에는 독립운동을 기억하게 하는 현창 시설이 또 있다.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길에 놓여 있다는 점이 안타까운데, 의병대장 허위 선생과 임시정부 국무령 이상룡 선생을 기려 세워진 비석 둘이 바로 그것이다. 빗돌 앞에 서서, 망해가는 나라를 어떻게든 굳건하게 일으켜 세우기 위해, 사라져버린 조국을 다시 되살리기 위해 생애를 바친 두 분의 이력을 잠시나마 돌이켜보는 것은 후대 사람들이 마땅히 지켜야할 도리이다.

마지막으로 향토역사관을 관람한다. 달성공원관리사무소 건물 지하에 꾸며져 있다. 대구의 기나긴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학습할 수 있는 공간이다.

지금까지, 달성토성을 그 정체성에 맞게 걸어보았다. 답사 순서를 다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본다. (1) 해자에서 바라본 달성토성 (2) 관풍루 일대에서 거닐어본 성곽길 (3) 대구읍성 파괴의 비극이 서린 관풍루 (4) 동학 교주 최제우 동상 (5) 서동균 (6) 서침 (7) 광복회 (8) 이상화 (9) 허위 (10) 이상룡 (11) 대구의 역사를 해설해주는 향토역사관

태그:#달성토성, #이상화, #광복회, #서침, #최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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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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