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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남섬 메밀꽃밭
▲ 메밀꽃 당남섬 메밀꽃밭
ⓒ 라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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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여름은 잔인했습니다. 유례없는 더위도 힘들게 했지만, 이 정부는 일본의 위안부와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로 시작해서, 후쿠시마 핵오염수 해양방류에 멍석을 깔아 주는 것도 모자라, 핵오염수를 걱정하는 여론을 북한의 지령에 따르는 것으로 몰아가는 만행을 서슴지 않다가 새만금 세계 잼버리 대회 부실 운영으로 국제 망신을 사 속을 썩이더니, 이제는 독립운동 영웅 홍범도를 공산주의자로 몰아 육사에서 그 흉상을 철거하려고 하는 중입니다. 유례없는 폭염에 이런 스트레스가 올여름을 더욱 견디기 어려운 잔인한 여름이 되게 했습니다.

이 무더위 속에 코로나가 다시 기승을 부렸습니다. 코로나가 다시 기승을 부리자, 요양시설들은 면회를 금지했고, 이로 여름이 다 가도록 어머님을 뵙지 못했습니다. 이런 어머니를 며칠 전 찾아뵈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얼굴이 좋아지셔서 마음이 놓였습니다. 손녀 사진과 내년 이월 예식날을 잡은 조카딸의 웨딩사진도 보여 드리고, 대둔산 아래 사시는 어머니와 함께 자란 외종 사촌과 전화도 연결해 드리며 잠시 기쁨조가 되어 드리다가 돌아왔지요. 그러나 돌아와서도 마음이 개운치 못했습니다.
 
당남섬 가운데 조성된 메밀밭
▲ 메밀꽃밭 당남섬 가운데 조성된 메밀밭
ⓒ 라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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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 오후 해 질 녘에 홀로 이포 당남섬을 찾았습니다. 이래저래 울적한 마음도 달랠 겸 해서 이때면 하얗게 만발했을 메밀꽃을 찾은 겁니다. 금년 당남섬 메밀밭은 처음 같지 않았습니다. 본래는 남한강변을 따라서 끝이 안 보이는 메밀밭이 있었지만, 금년은 강가의 메밀밭은 없고, 섬 가운데에만 메밀밭에 조성되었는데, 그마저 절반 정도는 메밀반 잡초 반이었습니다. 그래도 메밀밭에 대한 향수와 추억을 달래기에는 충분했습니다.

숨이 막힐 정도는 아니었지만, 효석의 표현대로 소금을 뿌린듯한 당남섬의 메밀꽃밭은 단박에 어머니를 떠올렸습니다. 메밀은 가을 작물을 다 파종하고 난 뒤에야 파종합니다. 메밀 싹이 나와 한 뼘쯤 자라면 어머니는 그 여린 메밀을 한 소쿠리 베여냈습니다. 메밀순은 독성이 있어서 살짝 삶아 내서 갖은 양념에 무쳐 내시면 메밀 특유의 혀끝에 살짝 감도는 아리한 맛의 메밀나물이 그만이었습니다. 이제는 어머니의 메밀나물을 먹어 볼 수 없게 되었고, 어릴적 이후 메밀나물을 먹어 본적이 없음에도 그 메밀 나물 맛을 잊지 못하는 건 무슨 까닭일까요? 
 
붉은 메밀 대
▲ 메밀꽃 붉은 메밀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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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 엄니는 참 묵을 잘 쑤셨습니다. 어머니의 묵은 마을에서도 알아주는 묵이었지요, 삼동의 시골에 돈 들어 올일이 없지요. 그때 어머니는 메밀을 사다가 묵을 쑤셨습니다. 어머니께서 메밀묵을 쑤시면 동네에 소문이 납니다. 겨울밤 화투를 치시며 노시던 어른들이 밤참으로 이 메밀묵을 드시려 오셨습니다. 가지런히 친 메밀묵을 뜨거운 물에 데쳐서 따끈한 국물에 김치와 지고추를 다져 넣고, 김을 구어 부셔 넣고, 고춧가루와 참기름과 깨소금을 뿌려 내시면 맛있게들 들고 가셨습니다. 손님들이 가시면 식구들에게도 메밀묵을 먹이셨습니다. 그게 남는 거라고 하셨지요, 어머니는 그런 방식으로 저희들을 먹이신 거지요.

메밀꽃을 보자 어머니의 그 메밀묵이 그리워집니다. 지금도 형제들이 모이면 그 메밀묵 이야기를 합니다. 어머니가 그 시절 그 맛으로 묵집을 하셨으면 대박일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에 따라 어머니는 그 맛을 잊으셨습니다. 가끔 어머니의 묵 맛이 그리워 여주의 맛집을 찼습니다만, 이 집 도토리 묵밥은 맛있기는 한데, 지고추를 쓰지 않는 게 참 아쉽습니다. 메밀꽃은 저렇게 해마다 가을의 문턱에서 다시 피어나지만, 어머니가 묵을 만드신 것도 벌써 십여년 전 이야기이고, 우리는 어머니의 묵을 먹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추억 속에 나 있는 어머니의 묵맛이 오늘은 더욱 그리울 뿐입니다.
 
피와 메밀
▲ 메밀꽃 피와 메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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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우리 팔 남매를 그렇게 키우셨습니다. 그 어머니가 시설에 계시지만, 한 여름이 가도 소식이 없는 자식들도 있습니다. 말씀이 없으시지만 속으로 얼마나 그리우시겠습니까? 빨랫줄에 조로르 앉아 있던 새끼들이 다 날아가고 홀로 앉아 있는 새 처럼 된다는 옛 어른들 말대로 되셨습니다. 마음과 달리 몸은 멀리 있고, 삶이 녹록지 않을 형제들도 눈에 밟힙니다. 삶이라는 게 이렇게 사람을 현실적이 되게 한다는 것에 참 씁쓸해집니다.

아! 그래서 우리 엄니는 메밀꽃 같으십니다. 어머니는 가물어 파종의 때를 놓치면 심는 메밀 같은 처지로 나셨습니다. 무리를 이루어야 존재감이 있는 메밀꽃 같은 평생을 사셨습니다. 소금처럼 하얀 꽃이 까만 메밀로 익어 배고픈 날의 별미가 되는 것 같이 어머니는 자식들 인생의 괴로운 날에 별미 같으셨습니다. 겉은 검으나 속은 메밀 꽃같이 눈이 부시게 하얀 메밀가루 같이 당신은 정하고 정한 꽃이셨습니다. 이제 할아버지 소리듣는 아들이 이 나이에서야 부르는 어머니 찬가가 부끄럽기만 합니다.
 
저녁 빛에 아슴한 메밀꽃 밭
▲ 당남섬 메밀밭 저녁 빛에 아슴한 메밀꽃 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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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밀밭에 저녁 빛이 짙어 갑니다. 저녁 빛 같이 큰 자식으로 후회와 회한도 깊어집니다. 주께서 어머니를 얼마나 더 곁에 두실지 모르지만, 계시는 동안 지금만큼만이라도 강건하시기를 간구합니다. 더도 덜도 말고 그저 먼저 주님 곁에 가신 아버님처럼만 계시다 가시기를 간구할 따름입니다. 그 기간 동안 메밀꽃처럼 맑은 일, 메밀꽃같이 맑은 착한 일들이 어머님께 전해지고, 어머니께서도 저 메밀꽃처럼 맑고 더욱 밝아지시면 좋겠습니다.

제겐 가을은 어머니의 추억이 많은 계절입니다. 그런 가을 초입에 메밀꽃밭에서 어머니의 추억을 새롭게 하는 추억 하나를 더 만들고 갑니다. 평창까지 가지 않아도 가까이서 꽃피는 메밀밭을 볼 수 있는 게 다행입니다. 저녁 빛에 홀로 거니는 메밀밭이 조금 쓸쓸했지만, 그래서 유익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혼자서 노는 법도 배워야 하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우리 인생이라는 게 홀로 해야하고, 혼자되는 날도 있을 터이니요. 
 
저무는 메밀 밭
▲ 메밀꽃 저무는 메밀 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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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하나님의 자연은 위대했습니다. 땅거미 들도록 메밀밭을 돌아보는 동안 시름은 사라지고, 울적한 마음에 기쁨의 빛이 깃들며 머리도 맑아졌습니다. 메밀꽃이 저리 한창이니 곧 추석이 올 겁니다. 추석! 가을 저녁이지요. 가을 아침이 아닌 가을 저녁이라고 한 서정과 문학적 감각이 놀랍습니다. 추석이라는 말처럼 가을과 한 해가 기우는 가을의 이미지를 잘 담아낸 서정적이며, 문학적인 말이 또 있을까요?
 
강아지 풀을 닮은 이 잡초의 이름은 무엇일까?
▲ 결실의 계절 강아지 풀을 닮은 이 잡초의 이름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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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어머니도 이렇게 서정적인 분이셨습니다. 이런 말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가을바람에는 솔잎도 못 견딘다!" 이 얼마나 서정적인 말입니까? 가을이 깊은 날 배내미 밭에서 고구마 캐던 날, 어머님이 제게 해주신 말씀입니다. 제가 이 어머니의 서정을 닮은 것 같습니다. 정년의 가을인 금년 가실! 솔잎도 못 견디는 갈 바람을 제가 얼마나 탈지 모르겠습니다. 잡초도 아름다워지는 초 가을 저녁 빛이 꽃보다 아름다운 잡초에 곱게 곱게 찾아들었습니다.

태그:#엄니, #메밀꽃, #메밀 나물, #메밀 묵, #가을 바람과 솔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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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대 신대원, 연세대 연합 신대원에서 신학을 했다. 은혜로교회를 86년부터 섬겨오는 목자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 지름길이다!"는 지론으로 칼럼과 수필, 시도 써오고 있다. 수필과 칼럼 집 "내 영혼의 샘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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