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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슬로에서 기차를 타고 스톡홀름으로 향했습니다. 오후에 출발한 기차는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스톡홀름 중앙역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한 것은 저녁 8시 무렵입니다. 늦은 시간이지만, 그래도 북쪽으로 올라왔으니 벌써 해가 질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이제 어느새 여름을 지나고 있음을 실감했습니다.

어느새 어두워진 거리를 지나 숙소에 들어왔습니다. 다음날에는 스톡홀름 시청을 시작으로 구시가를 돌아봤습니다. 도시의 구조에서도, 오래된 건물에서도 이 도시의 깊은 역사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골목을 걷다 보니 어디선가 음악 소리가 들렸습니다. 음악 소리를 따라 작은 길을 올라갔습니다. 어느새 탁 트인 광장이 나타났습니다. 스웨덴의 왕궁이었습니다. 군악대가 공연을 하고 있더군요. 사람들도 많이 모여 있었습니다.
 
왕궁 앞 군악대 공연
 왕궁 앞 군악대 공연
ⓒ Widerst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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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도 그랬지만, 스웨덴도 과거에는 패권 국가였습니다. 스칸디나비아를 장악한 국가였죠. 1520년 스웨덴은 덴마크가 주도하는 칼마르 연맹에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전쟁을 이끈 구스타프 1세가 스웨덴 국왕으로 즉위하며 스웨덴은 독립했습니다.

독립한 스웨덴은 곧 제국으로 성장했습니다. 스웨덴은 핀란드나 에스토니아를 넘어 중부 유럽까지 영향력을 뻗쳤습니다. 포메른을 장악했고 30년 전쟁에도 개입했죠. 북아메리카나 서아프리카에 식민 도시도 건설했습니다.

스웨덴은 북유럽의 패자였습니다. 무기를 개발하고 영토를 확장하는 데 국력을 집중했죠. 스웨덴의 강력한 군사력은 주변국에게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정복 군주와 명재상의 시대가 이어졌습니다. 한때는 스톡홀름의 이 왕궁도, 북유럽과 동유럽을 장악한 패권자의 것이었습니다.
 
스웨덴 왕궁
 스웨덴 왕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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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제국의 영광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동쪽에서는 러시아가 성장하고 있었죠. 끝없이 갈등하던 스웨덴과 러시아는 1700년 결국 전면전에 나섰습니다. '대북방전쟁'이었습니다.

20년 넘게 이어진 전쟁 끝에 전쟁은 러시아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북유럽의 패권자가 스웨덴에서 러시아로 넘어가는 순간이었습니다. 이후 스웨덴 제국은 축소와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식민지는 하나둘 독립하거나 다른 국가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스웨덴은 나폴레옹 전쟁 시기 덴마크로부터 노르웨이를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연한 사건에 가까웠습니다. 스웨덴의 국왕 칼 13세에게는 후사가 없었고, 프랑스의 장군이었던 장 바티스트 베르나도트를 후계자로 지명했습니다.

덴마크로부터 노르웨이를 가져온 것도 이 베르나도트의 공이었죠. 베르나도트는 곧 나폴레옹을 배신하고 반프랑스 동맹에 가담해 승전을 이끌었습니다. 베르나도트는 칼 13세가 사망한 뒤 칼 14세가 되어 스웨덴의 왕위에 오르죠. 현직 국왕인 칼 16세가 이 베르나도트의 6대손입니다.
 
칼 14세의 동상
 칼 14세의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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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제국은 그렇게 작은 왕국으로 남았습니다. 스웨덴은 이후 유럽에서 벌어지는 전쟁에서 대부분 중립을 지켰죠. 근대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05년 노르웨이의 독립도 평화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죠. 1차대전과 2차대전에서도 스웨덴은 공식적으로 중립을 선언했습니다.

한때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팽창한 제국이라고 믿기는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스웨덴이 원한 것은, 과거의 군사제국 스웨덴이 원했던 것과는 다른 미래였습니다.
 
스톡홀름의 강가
 스톡홀름의 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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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칸디나비아를 여행하면서, 저는 이들의 모습이 우리의 미래에 힌트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꽤 자주 했습니다. 중과세 중복지의 북유럽식 복지국가 같은 뻔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북유럽 국가들에도 여전히 해결해야 할 문제는 산적해 있으니까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북유럽 국가들은 아주 높은 수준의 소득 평등을 이루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한 수준의 소득을 얻는다는 의미입니다. 높은 소득세와 강력한 노동조합, 안정적인 사회복지 구조가 만들어낸 성과겠죠.

하지만 반대로 북유럽 국가들의 자산 불평등은 세계적으로 매우 높은 수준입니다. 버는 돈은 비슷하지만, 사람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돈의 크기는 매우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자산이 매우 불평등한 상황에서 소득이 평등하다는 것은, 계층 이동이 매우 제한적인 사회를 암시합니다. 스웨덴과 노르웨이에는 상속세도 없습니다. 저는 이런 모습이 꼭 우리가 나아가야 할 미래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스톡홀름의 밤
 스톡홀름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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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제가 주목한 것은, 제국이 몰락한 뒤 스웨덴이 향했던 방향입니다. 강력한 군사력과 넓은 영토에 국력을 집중한 스웨덴 제국은 결국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그 뒤에도 스웨덴의 시민들은 살아가야 했습니다.

이후 스웨덴은 팽창보다는 발전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팽창이 곧 발전이라고 믿었던 과거의 실수를 수정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적극적인 산업 발전을 추진하며 경제력을 축적했습니다. 농업 위주였던 경제 구조가 도시의 공장을 중심으로 변해가기 시작했죠.

자유와 민권의 시대도 함께 이어졌습니다. 스웨덴은 19세기 중엽부터 국왕의 권한을 제한하는 의회정치의 전통을 만들었습니다. 20세기 초반부터는 선거권이 확대되며 민주정치의 저변이 넓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이어진 사회민주당의 장기 집권은 지금의 스웨덴식 복지국가를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죠.

적어도 스웨덴의 시민들에게, 제국의 몰락은 실패나 패배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발전과 진보의 기회였습니다. 스웨덴 제국이 군국주의와 팽창주의의 꿈을 버리는 순간, 스웨덴은 오히려 다른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자유를 얻은 셈이었습니다.
 
스톡홀름
 스톡홀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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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은 이제 작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인구가 1천만에 불과하죠. 영토는 45만㎢에 달하지만, 극지방에 위치한 특성상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영토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북유럽 국가들 대부분이 비슷한 상황이죠.

하지만 이 북유럽 국가들이 선진국임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힘있는 군사제국의 시대는 갔지만, 모두의 합의로 미래를 만드는 민주국가의 시대는 여기 남았습니다. 여전히 북유럽의 시민들은 경제적 부와 정치적 자유를 함께 누리고 있습니다.

북유럽의 현재를 동아시아의 우리에게 곧바로 적용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와는 많은 것이 다르겠죠. 다만 부와 자유의 확산이라는 목표는, 대륙과 민족이 달라졌다고 해서 결코 바뀔 수는 없습니다.
 
스톡홀름 시청에 걸린 스웨덴 국기
 스톡홀름 시청에 걸린 스웨덴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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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칸디나비아의 오늘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선진국의 모습은 다양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이름을 알고, 그 군사력과 외교력을 떨쳐야만 선진국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압도적인 인구와 영토의 팽창이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민주적인 합의를 통해 그려내는 국가의 미래였습니다. 더 부유하고, 더 자유롭고, 더 민주적인 미래를 꿈꿀 수 있는 능력. 그리고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낼 수 있는 의지. 더 나은 시민들의 삶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우리의 기대와는 조금 달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무너진 제국의 위에서 더 나은 삶을 건설해낸 스톡홀름의 복잡한 거리 속에, 어쩌면 우리의 새로운 미래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팽창하는 제국이 아닌, 진보하는 민주국가의 미래가 말이죠.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CHwiderstand.com)>에 동시 게재됩니다.


태그:#세계일주, #세계여행, #스웨덴, #스톡홀름, #북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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