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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 오른쪽 맨 위에는 졸업앨범과 함께 고등학교 시절 생활기록부(아래 생기부)가 나란히 놓여 있다. 요즘 MZ세대 사이에서 생활기록부를 인증하는 것이 유행이라는데, 나는 그 이전부터 생기부를 갖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MZ 트렌드 세터(시대의 풍조나 유행 등을 선동하는 사람)일지도. 사실, 내게 생기부는 마냥 인증용은 아니다.

생활기록부라는 이야기 책
 
책장 오른쪽 맨 위에는 졸업앨범과 함께 고등학교 시절 생활기록부가 나란히 놓여 있다.
 책장 오른쪽 맨 위에는 졸업앨범과 함께 고등학교 시절 생활기록부가 나란히 놓여 있다.
ⓒ 황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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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생기부는 고3, 입시원서를 넣기 직전에 활동 내용과 특기 사항 등을 확인하기 위해 담임선생님께서 한 부씩 출력하여 나눠주신다(그 당시 우리 학교는 그랬다). 나름 열정적인 고등학교 생활을 했던 나는 26장이나 되는 두툼한 생기부를 입시가 끝난 뒤에도 훈장처럼 방에 모셔 두고 종종 독파하곤 했다.

생기부는 할머니가 손녀에게 읽어주는 이야기책 같았다. 주인공을 향한 응원과 따스한 시선이 담긴, 게다가 그 주인공이 '나'인 재미가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는 책!

'원대한 포부와 비전을 갖고 이를 현실적으로 이루어내기 위한 구체적인 전략을 세울 줄 알며 단호한 실행력까지 갖춘, 요즈음 시대에 보기 드문 인재임.'
'"세상을 보는 관점을 알려주는, 자극이 되는 친구" 등의 극찬을 주변으로부터 받고 있으며 담임으로서도 학교 근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인품과 능력을 지녔다고 평가함.'
'맑고 밝은 심성을 지니고 있으며 모든 일에 긍정적임.'


너무 장황해서 부끄럽다가도 몰려드는 순전한 기쁨에 취하는 건 순식간. 선생님들이 남긴 나의 일대기를 읽다 보면 왜 조선왕조에서 사관(史官)이 기록한 실록을 왕도 함부로 읽지 못하게 했는지 납득할 수 있다. '이런 사관들인 줄 알았다면 그때 좀 더 잘 해 드릴 걸' 하는 영악한 생각이 먼저 드는 걸 보니.

고구려, 백제, 조선 등등 건국 설화에 왜 그렇게 힘을 주었는지도 알겠다. 국가적 위기가 생길 때마다 선조의 위대한 기록을 읽으며 자긍심을 얻었던 백성들처럼 나 역시도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생기부로 거슬러 올라가 자신감을 되찾곤 하는 것이다.

인턴들이 모인 자리에서 나만 칭찬을 받지 못했을 때, 고시 준비로 한동안 사람을 만나지 못해 사람과의 대화가 어려웠을 때. 그런 때 슬그머니 생기부를 들추면 '어색한 친구 사이를 주의 깊게 살피고 친구를 배려함', '질문하고 생각하는 자세가 돋보임. 단순한 암기보다 깊이 있는 이해를 하는 학생임' 같은 문장이 '누가 (우리 은비에게) 그랬어!' 하며 나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준다. 그리곤 마음의 키를 높여주는 것이다. 방금까지 나를 짓누르고 있었던 문제를 저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도록.

마음의 키를 높여드립니다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생기부로 거슬러 올라가 자신감을 되찾곤 한다.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생기부로 거슬러 올라가 자신감을 되찾곤 한다.
ⓒ 황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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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궁금해지는 내 혈육의 생기부. 내겐 남동생이 한 명 있는데 안타깝게도 한국형 인재는 아니었다. 모든 선생님의 비위를 곧잘 맞추곤 했던 K-장녀, 나와는 달리 안 맞는 선생님과는 끝까지 안 맞았던 동생 H군.

'때로는 고집스러운 행동을 할 때도 있지만', '수업시간에 산만한 태도를 고쳐야 하고', '친구를 용서하고 화해하는 배려의 마음을 길러야 함'(모든 생기부 기록은 H군 본인의 허락을 맡고 사용함)

특히 안 맞았던 초등학교 5학년 담임선생님의 종합의견에서는 거의 성격파탄자로 묘사됐는데(여기에 싣지 못했다), 생기부를 보고 있던 우리 뒤에서 엄마가 그 선생님의 의견은 무시해도 된다며 분개하는 것이었다. 학부모로부터 무언가 받지 않으면 아이를 방과 후에 남기거나 청소시키는 사람이었다고. 실제로 우리 할머니가 홍삼을 싸 들고 간 뒤에야 잠잠해졌단다.

동생은 그 선생님이 학교가 끝난 뒤 2시간 동안 손 들고 벌 세운 기억이 있다며 그때 다 풀지 못했던 억울함을 쏟아냈다. 같이 열을 내며 뒤늦은 뒷담화도 잠시 그에 대한 기억은 '그분, 그 홍삼 먹고 잘 살아 계시려나?'로 유쾌하게 마무리됐다.

또, 동생은 생각보다 깨끗한 출결 기록을 보며 '어? 나 지각 많이 하지 않았나?' 하고 어리둥절했다. 세상 모든 것에 관심을 가졌던 동생에게 등굣길은 호기심 천국이나 다름없었는데, 가는 길에 옆으로 새는 건 물론이요 모든 가게를 한 번씩 기웃거린 후에야 학교에 도착하곤 했던 것이다. '그만큼 선생님들이 네 출결을 위해 애써주신 거지'라는 엄마의 말에 동생은 '맞아, 이 선생님 진짜 좋았어'라고 답했다.

'학교생활 전반에 흥미있게 참여함', '교과성적도 우수하고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귀여운 어린이임', '수업시간에 즐겁게 참여하고 노력하며 자신의 생각을 최선을 다해 발표함'

어느새 동생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다른 선생님들이 남겨주신 따뜻한 기록이 거름이 되어 아픈 기억을 가볍게 내려다볼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의 키가 자란 것 같았다. 생기부에서 찾은 선생님들의 자애로움이 활자로만 남지 않도록 우리 사회가 함께 노력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끝으로 2002년 이후 졸업생이면 인터넷에서 생기부 열람이 가능하다(그 이전 졸업색은 직접 학교로 가서 확인해야 한다)! 우리가 눈치 채지 못했던 그때 그 시절 선생님들의 시선과 어린 시절 모습을 확인하고 싶다면 바로 확인해 보시길(정부24 혹은교육부의 나이스 대국민 서비스 홈페이지). 분명 당신의 찬란함을 알아본 선생님이 계실 것이다.

태그:#생활기록부, #MZ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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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사랑이 이긴다고 믿는 낭만파 현실주의자입니다. 반건조 복숭아처럼 단단하면서도 말랑한 구석이 있는 반전있는 삶을 좋아합니다. 우리 모두는 언제나 모순적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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