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노들섬에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세우자."

최근 서울시가 노들섬을 '글로벌 예술섬'으로 조성하겠다며 시민들을 대상으로 아이디어 공모전을 개최한 가운데, 노들섬에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세우자는 주장이 나와 이목을 끈다.

이는 지난 6월 15일에 열린 서울특별시의회 제319회 정례회 제4차 본회의 당시 김용호 서울시의원(국민의힘)의 주장이다. 그는 오세훈 서울시장에게 노들섬을 글로벌 예술섬으로 탈바꿈하기 위한 몇 가지 방안들을 제안했다. 그중 하나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랜드마크(상징물)로 이순신 장군 동상과 두 척의 거북선을 건립하자는 것.

"자라나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역사교육의 장을 제공하고 한국인의 위대한 정신과 승리의 DNA, 이순신 장군을 재조명하고 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이 김 의원이 내세운 추진 근거다.

이에 대해 오세훈 시장은 "굉장히 감동을 받았고 면밀히 검토해 볼만한 사안이라 생각한다"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2023년 6월 15일에 열린 제319회 정례회 제4차 본회의에서 김용호 서울시의원이 오세훈 서울시장을 상대로 시정질문을 하는 모습
 2023년 6월 15일에 열린 제319회 정례회 제4차 본회의에서 김용호 서울시의원이 오세훈 서울시장을 상대로 시정질문을 하는 모습
ⓒ 서울시의회

관련사진보기

 
이순신 장군이 대한민국을 대표하고 상징하는 위인이라는 데 이견을 제시할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노들섬에 이순신 장군의 동상과 거북선을 세우자는 주장은 다소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노들섬은 동작구와 용산구 사이 한강대교 중간에 자리하고 있는 섬이다. 이순신 장군의 특별한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니다. 더군다나 바다에서 활약해야 할 거북선을 한강에 띄운다는 것도 어딘가 어색하다.

한국을 대표하는 위인으로서 이순신 장군은 광화문광장 한복판에 서 있는 걸로 충분하다. 굳이 아무런 연고도 없는 노들섬에 이순신 동상을 세우기보다는 해당 지역과 연관이 있는 역사적 인물을 세우는 게 맞지 않을까.

그래서 제안한다. 노들섬에 독립운동가 김익상(1895~1941)의 동상 내지는 추모비를 건립하자.

조선총독부에 폭탄 던진 전설적인 독립운동가

김익상. 그는 일제강점기 당시 약산 김원봉이 이끌던 항일결사 의열단에서 활동하던 전설적인 독립운동가였다. 그를 소개함에 있어 굳이 '전설적인'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이유는 그의 행보 때문이다.

1921년 9월 12일, 일본인 전기수리공으로 위장한 김익상은 남산 왜성대에 있던 조선총독부 청사에 잠입, 2층 비서과와 회계과에 폭탄을 투척해 폭발시키는 데 성공했다.

당시 폭탄 터지는 소리를 듣고 일제 헌병들이 달려오자 "2층으로 올라가면 위태하다"는 말을 남기며 헌병들의 의심을 피하는 기지를 발휘했다. 그렇게 유유히 총독부를 빠져나온 그는 베이징으로 무사 귀환환 뒤 김원봉 단장 앞에서 복귀 신고를 마쳤다.

비록 총독을 제거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식민통치의 상징이었던 조선총독부 청사에 폭탄을 던졌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일제에 엄청난 압박이 됐으리라. 무엇보다 총독부에 폭탄을 던지고 무사귀환했다는 사실만 놓고 봐도 그를 전설적인 독립운동가로 불러도 손색이 없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이듬해인 1922년 3월 28일,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가 상하이에 온다는 소식을 들은 김익상은 그를 암살하기 위한 거사에 참여하겠다고 나섰다. 이른바 '황포탄 의거'다. 안타깝게도 황포탄 의거는 실패로 끝났고, 신출귀몰하던 김익상도 이번에는 붙잡히고 말았다.

일제는 김익상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다행히 형기는 무기징역으로, 다시 20년 징역으로 계속 감형됐다. 그렇게 일본 내 형무소들을 전전하며 옥살이 끝에 15년 만인 1936년 8월 2일 출옥한 것으로 알려졌다(다만 그가 출옥한 시기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1936년설, 1942년설 등 의견이 분분하다. 아래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김익상 조카는 1941년에 김익상이 사망한 것으로 증언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1936년설을 채택했다).

문제는 출옥 후 행보다. 비교적 최근까지는 출옥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김익상이 행방불명된 것으로 알려져 왔다. 독립운동사 연구자인 김용달에 의하면 "김익상이 귀향하고 몇 년 안 있어 일본인 고등경찰이 연행해 가더니, 어디선가 암살되고 만 것인지 종적이 묘연해졌다"라며 그의 최후를 행방불명으로 묘사했다. 

이는 1947년에 출간된 소설가 박태원의 <약산과 의열단>에 근거한 것이다. 이 책은 박태원이 의열단장 김원봉을 직접 인터뷰하고 쓴 책이다. 박태원은 김원봉의 증언을 토대로 김익상의 최후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김익상의 최후는 분명치 않다. 그의 생사를 우리는 아직 정확히 알 도리가 없다. 그가 출옥한 지 오래지 않아 어느날 그를 찾아온 형사 하나가 있다. 물어볼 말이 있으니 잠깐 같이 가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날 형사에게 끌려나간 채 김익상은 마침내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친지들이 백방으로 알아보아도 그의 거취는 알 길이 없었다." - 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깊은샘, 2015, 121쪽.

이때 김원봉은 "그렇듯 20년이나 고역을 치르고 나왔건만 왜놈들은 그를 그대로 버려둘 수 없었던가 보오. 아무래도 김익상 동지는 고 악독한 놈들 손에 참혹한 최후를 마친 것만 같구료"라고 하면서 고즈넉이 눈을 감았는데, 그 표정은 비참했다 한다.
 
김익상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
 김익상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
ⓒ 국사편찬위원회

관련사진보기

 
김익상, 한강에 몸을 던지다

그런데 작년 4월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는 <한겨레21> 연재글(임경석의 역사극장 1407호 <혁명가로 키우려던 김익상의 딸은 어디로 갔는가>, 2022.4.3)에서 김익상의 최후를 밝혀줄 만한 단서를 찾아 공개했다. 1945년 12월 5일자 <조선일보> 기사가 바로 그것이다.

해당 기사는 김익상의 조카였던 김기복(金基福)이라는 사람이 "김원봉 선생이 찾는 김익상씨는 나의 아저씨"라며 출옥 후 김익상의 삶을 증언한 것이다.

김기복의 증언에 의하면 김익상은 출옥 이후 또 한 번의 의열투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1940년 10월경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郎)를 저격할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계획이 발각되자 충북 괴산으로 피신했다 1년 만에 서울로 돌아왔다. 놀랍게도 김기복은 김익상의 '최후'에 대해서도 증언한다.

"1941년 8월에 다시금 경성으로 오는 도중 노량진에서 용산경찰서원에게 발각되어 노상에서 결투를 하다가 김 의사는 악독한 경찰에 또다시 붙잡히는 것보단 차라리 자살하겠다고 한강철교까지 달려오다가는 푸른 물에 몸을 던져 장엄한 의지와 함께 세상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한다." - <獄中生活로 轉身하며 祖國解放에 바친 一生>, <조선일보>, 1945.12.5.

요컨대 피신 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던 김익상은 노량진에서 용산경찰서 경찰에게 발각됐고, 길 위에서 결투를 하던 중 한강철교까지 뛰어가서 한강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생을 마감했다는 충격적인 결말이다.

조카 김기복은 이 이야기를 김원봉에게 꼭 전해달라며 김익상의 최후를 증언했는데, 아무래도 이 소식은 김원봉의 귀에까지 들어가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1947년에 출간된 <약산과 의열단>에서는 김원봉이 여전히 김익상의 최후를 궁금해하는 것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김익상의 최후를 증언하고 있는 <조선일보> 1945년 12월 5일자 기사
 김익상의 최후를 증언하고 있는 <조선일보> 1945년 12월 5일자 기사
ⓒ 조선일보

관련사진보기

 
그런데 김익상이 한강에 투신 자살했다는 이야기는 독립운동가 이강훈의 증언에서도 드러난다.

"어느 날 용산경찰서에 박형사라는 자가 김 의사에게 물어 볼 말이 있다고 하여 어느 음식점에서 술잔을 들면서 수작하는 것이 또 무슨 죄 지은 혐의자를 취급하는 것 같은 태도이므로 의사는 아직도 그 기백은 여전한지라, '내 그만큼 고생하다가 살아나왔는데 네 놈이 또 무엇을 꼬치꼬치 캐묻느냐!'고 꾸짖었더니 박가놈은 상전인 왜놈 경찰관에게 달려가서 일러바쳐 용산경찰서에서 일경 한 패가 달려와서 김 의사를 끌고 가는 도중에 한강다리에서 스스로 몸을 강으로 던져 자결 순국하였는데..." - 이강훈, <靑史에 빛난 순국선열들>, 역사편찬회, 1990, 240쪽.

구체적인 최후에 대한 묘사는 김기복의 증언과 조금 엇갈린다. 그러나 '용산경찰서 소속 경찰과 다투다 한강다리에서 몸을 던졌다'는 사실은 공통된 증언이다. 그동안은 이강훈 한 사람의 증언만 있어 섣불리 단정하기 어려웠지만, 김익상의 조카가 해방 직후 남긴 증언까지 더하면 김익상은 한강 투신으로 짧은 생애를 마감한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할 것 같다.

노들섬에 김익상의 추모기념물을 세우자

김익상은 한강에 투신했기 때문에 시신을 찾지 못했다. 따라서 그의 묘소도 없다.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제단에 위패로 모셔져 있을 따름이다.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제단에 모셔진 김익상 지사의 위패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제단에 모셔진 김익상 지사의 위패
ⓒ 김종훈

관련사진보기

 
이에 기자는 작년 8월 서울시에 김익상의 최후를 기억하는 작은 표지석 하나만이라도 노들섬에 세워달라 건의한 바 있다. 김익상이 몸을 던진 한강철교에서 멀지 않은 곳이기에 그를 추모하기에 적절한 공간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서울시 문화정책과 관계자는 "김익상의 출소 후 행적과 사망과정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역사적 논란이 존재한다"며 "역사적 사실이 명확히 규명되지 않은 상황에서 노들섬에 기념비를 세우기는 어렵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김익상의 최후를 증언하는 1940년대 기사가 존재하고, 이를 뒷받침할 만한 독립운동가의 증언까지 더해졌는데 이 이상 또 어떠한 증거가 더 필요하다는 것인가.

오세훈 시장에게 다시 한 번 건의한다. 노들섬에 이순신 장군 동상을 세우기에 앞서 우리가 잊고 있었던 또 한 명의 위대한 독립투사 김익상의 동상을 세워달라. 동상 건립이 어렵다면 그를 기억할 수 있는 작은 비석 하나만이라도 세워달라. 

김익상의 추모 기념물을 건립함으로써 노들섬을 찾는 시민들, 더 나아가 외국인 관광객들까지도 일제 식민지배에 맞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장렬하게 순국한 한 독립투사의 위대한 투쟁에 대해 기억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태그:#김익상, #노들섬, #의열단, #한강, #노량진
댓글7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한양대 사학과 박사과정 (한국사 전공) / 독립로드 대표 / 서울강서구궁도협회 공항정 홍보이사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 기사 제보는 heigun@naver.com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