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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기독교 대학의 학장이 재일동포 2세라는 소식을 들었다. 오키나와에서 학장이 된 그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마침 공평해프로젝트 팀이 평화 항해를 위해 요트를 타고 제주에서부터 부산을 거쳐 오키나와까지 도착했다. 지난 7월 26일, 공평해프로젝트 팀이 김영수 오키나와 기독교 대학 학장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공평해프로젝트를 응원해준 김영수 학장님과 함께(7월 26일 수요일, 왼쪽부터 나, 송강호 선장, 김영수 학장, 아사토 목사)
▲ 오키나와 기독교대학에서 만난 김영수 학장님  공평해프로젝트를 응원해준 김영수 학장님과 함께(7월 26일 수요일, 왼쪽부터 나, 송강호 선장, 김영수 학장, 아사토 목사)
ⓒ 수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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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만에 학장이 된 재일동포

그는 고베와 오사카 사이에 있는 니시노미야라는 곳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서울의 장로교 신학대학교에서 석사, 샌프란시스코 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 학위도 받았지만, 예정된 교회에 가지 않았다. 마침 오키나와에 있는 친구가 이 대학에서 교수를 모집하고 있다고 했다. "2000년에 지원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합격했고, 얼마 안 있다가 종교 부장이 되어 기독교 행사를 주관하게 되었"다.

이후 평화와 관련된 그의 행보는 활발했다. 교목실(대학의 기독교적 건학이념을 구현하는 역할을 담당)을 통해 학생들과 함께 오키나와, 일본을 벗어나 대만 우서사건을 배경으로 한 영화 <워리어스 레인보우>에서 나온 원주민들이 사는 고산지대도 가고, 화련 아미족(해상부족)을 만나는 등 넓은 의미에서 역사 공부를 나누었다.

그는 "한국에 있는 나눔의 집과 같은 한일 역사가 관련된 장소나, 요즘에는 한국 젊은이들도 안 간다고 하는 (3·1 운동이 시작된) 파고다 공원에 가기도 했다"며 웃었다. 강정마을에는 학생들과 같이 가지는 못했고, 따로 3~4번 정도 갔다고 했다. 김 학장은 "지금은 한국어를 가르치는 수업이 있지만 내가 이 학교에 오기 전에는 없었다"며 2004년부터 한국어를 가르치게 됐고, 이 학교에 교수로서 20년간 세월을 보내고 학장이 된 지는 3년이 되었다고 설명했다. 

콜레라, 한국전쟁으로 한국 못 간 부모님

1957년생인 그의 부모님은 대구 출신이다. 아버지는 일거리를 구하려다 보니 일본말을 배워야 했고, 유학 삼아 잠깐 일본에 가게 되었다고 한다. 이어 어머니까지 넘어갔다. 해방 후 그의 부모님은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준비했으나 부산에 콜레라가 생기고, 애들이 태어나고,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귀국을 포기했다. 

아버지는 오사카에 있는 병원에서 치과기공사를 했다. 강제노역으로 온 사람, 일자리를 구해서 온 사람들이 시모노세키를 통해 들어와 흩어졌고, 해방 후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다시 동포들이 시모노세키로 가려다가 다다르지 못한 채 오사카, 고베 쪽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는 "청년 시절에는 무난하게 보냈던 것 같다"고 회상하면서도 "되돌아보면 역시 아주 불안할 때도 있었고, 위험한 시기도 있었다"고 말했다. "일본 사회는 여전히 재일동포에 대한 차별이 심하다"며 어떤 사건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회적인 구조가 만들어 놓은 차별의 분위기가 있다고 했다.

그는 "아직도 '조센징'이라는 말을 굉장히 치욕적인 욕으로 쓰고 있다"며 한 사례를 들었다. 일본의 한 대학교 학장이 "태평양 전쟁의 책임은 천황 폐하에도 있다"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는데, 불만을 품은 사람이 "당신은 일본 사람이 아니고, 조센징인가?"라고 학장에게 전화를 했다고 한다. 

목회자의 길로 들어선 이유로는 "3대째 그리스도인 집안이어서 신앙이 있었던 것도 맞지만 다른 취직을 할 수도 없었다"고 답했다. 아직도 재일동포는 3세, 4세라고 하더라도 연예인, 스포츠선수, 파친코, 목사 외에는 일자리를 구하기가 힘들다는 것.

그는 독실한 신자인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신학을 전공했다. 만약 주변 환경이 자유로웠다면 다른 꿈을 꿀 수도 있지 않았을까. "형들은 나름대로 자리를 잡았다. 중소기업도 대기업처럼 많이 따지지는 않았다. 단, 한국인이라는 것을 숨겨야 한다"며 보이지 않지만 뿌리 깊은 일본 계급 구조의 이면을 전했다. 

한국에서 공부하다가 군인들에게 구타당하기도

재일동포 중에서도 한국어를 서툴게 하거나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의 유창한 한국어 실력의 배경이 궁금했다. 그는 "1982년부터 2년간 연세대학교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웠다"고 설명했다.

"재일교회 목사가 되려면 한국어 시험을 봐야 했다. 한번은 밤에 도서관에 갔다가 나오는데 말이 서툴러서 그랬는지 붙잡혀서 매질 당하고 버스 안에 끌려갔다. 부대장이 내 물건을 확인하고는 다 신학 서적 밖에 없으니 보내라고 해서 풀려났는데 일주일 정도를 누워있어야 했다. 데모를 많이 하던 시절이라 대학생인 것처럼 보이기만 해도 구타를 당하기 일수였고, 일본으로 돌아올 때는 안도감마저 들었다."

오사카 위성도시 아마가사키 출신의 재일동포 선배가 간첩으로 몰려 잡혀서 고문도 심하게 당한 일도 있었지만, 만날 수는 없었다고 한다. 또 김 학장은 "1980년 광주항쟁이 있었을 때도 대학 친구 중에 광주 출신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그에게 광주항쟁에 대해서 아무 말을 들을 수 없었다. 시간이 꽤 지나서야 민중신학 관련 책을 보고 나서야 자세히 알 수 있었다. 당시 한국에 있었을 때 좀 더 알아볼 걸 싶었다"고 전했다. 

사람을 죽이는 교육 대신 살리는 교육

오키나와 기독교 대학교의 역사는 1957년 4월 9일에 시작됐으나 정식으로 학교 인정을 받은 것은 1959년 3월이다. 1대 이사장이 이 학교를 세운 건 가족을 잃은 아픔 때문이다. 1대 이사장은 지금의 학교를 세우기 전에 나하상공학교 교장으로 철혈근황대(오키나와 전투에 동원된 14~16세 소년병)에 99명을 보냈다. 그때만 해도 천황에게 충성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은 황민화 교육 정책에 젖어있던 것. 결국 72명은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자기 딸도 간호 요원으로 보내어 결국 살아 돌아오지 못했고, 그제야 전쟁의 실상을 알게 되었다. 

오키나와 기독교 대학교는 그가 '이제는 사람을 죽이는 교육이 아닌 사람을 살리는 교육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후 세운 학교이다. 그의 뒤를 따라 이사장을 맡았던 이들도 하나같이 전쟁과 관련된 아픈 사연이 있었다. 3대 이사장은 게라마 제도의 도카사키에서 태어났고, 태평양 전쟁 때 요미탄에서 일본군에 의한 집단자결을 목격했다. 미군이 게라마 제도에 갔다가 요미탄에 상륙한 후, 수세에 몰린 일본군이 주민들에게 집단자결을 시켰기 때문이다. 자결하지 않은 주민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불과 12살이었다.

4대 이사장은 같은 전쟁 때 피난을 가다가 폭탄을 맞아서 한쪽 다리를 잃었다. 10살 때의 일이다. 1972년 미국이 점령한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하기 전에 미국이 4대 이사장을 사령관 취임식 행사에 초대하여 기도하게 해달라고 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이사장은 이렇게 기도를 하여 행사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이번 사령관이 마지막 미국 사령관이 되게 해주십시오. 부디 미군이 오키나와 지배를 끝나게 해주십시오." 

평화를 바탕으로 세워진 기독교 학교. 김영수 학장은 3년 전에 학장이 되었지만, 코로나19가 시작되면서 중장기 계획을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코로나 상황도 나아졌으니 활발한 교류를 할 수 있을 거 같다. 아픔을 가진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는 인재를 추구한다. 소수자들이 모이면 수적으로는 다수가 된다. 스스로 소수자들을 연결할 수 있는 인재라고 생각해야 자신도 해방될 수 있다"고 전했다.  

태그:#오키나와기독교대학, #김영수, #공평해프로젝트, #태평양전쟁, #워리어스레인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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