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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에 한 번 일요일 아침 6시면 나는 주섬주섬 커피를 한 잔 타서 온라인 모임에 참여한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시간대를 골라서 하는 독서 모임이다. 몇 달 전 그때도 그랬다. 독서 모임을 막 마무리하려던 찰나에 요란한 경보가 울렸다.

그와 동시에 "건물 내 화재가 일어났으니 모두 대피하십시오"라는 안내 방송도 반복되어 나왔다. 이 아파트에 산 지 2년이 넘었지만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기에 정말 어디선가 불이 난 줄 알고 급히 잠옷 바람으로 아이들과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

우리 동 출입문 근처에 자다 깬 주민들이 부스스한 얼굴로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무슨 일이에요? 어디서 연기가 나요?" 자초지종을 살피려는 와중에 소방차가 출동했다.

소방대원들은 출동하자마자 경비실의 계기판에서 사이렌의 진원지를 파악하고 우리집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안방의 화재감지 센서가 오작동을 했다는 것이었다.
소방대원들은 진원지를 확인하고 오작동이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갔고 경비실에서 우리집 화재감지기를 교체하는 것으로 끝났다.

그리고는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도 잊고 있었는데 며칠 전에 또 한 번 그런 일이 있었다. 기말고사를 끝낸 아이들과 영화를 본 날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먹었던 간식들을 치우고 자리에 누우려는데 안내 방송이 나왔다. "건물 내 화재가 일어났으니 모두 대피하십시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밤이었다. 새벽 1시가 넘은 시각, 아파트 3개 동의 주민들이 우산을 받쳐들고 경비실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인근 동의 창문들을 하나하나 훑어보았지만 연기가 치솟는 곳은 없었다.

그렇게 한바퀴 눈으로 확인하고 있는 사이 소방차가 도착했다. 5분도 안 되었을 텐데 빠르기도 하다. 이렇게 출동하기 위해 평소에 얼마나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생활을 할지 감히 가늠해볼 수도 없다.

경비실 계기판에서 깜빡이는 불빛의 번호를 확인한 소방대원이 바로 앞 동의 계단을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비가 많이 오다보니 감지기가 오작동했다는 것이었다. 몇 달 전과 같은 결론이었다. 모두들 별 일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가족 밥상 차리던 소년은 자라서 

같은 사건이었지만 소방대원들을 보는 나의 시선은 달라져 있었다. <소방관들을 위한 특별한 한 끼>라는 책을 읽은 덕분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대신 장을 봐서 집에 와 가족의 저녁 밥상을 차린 젊은이가 119 안전센터에서 소방대원들을 위해 특식을 만든 이야기를 쓴 책이다.

사회복무요원이니 굳이 요리를 할 필요는 없음에도 음식을 하는 이모님이 휴가인 날에 대원들을 위해 요리를 하고 싶다고 저자는 작은 용기를 낸다. 복무기간 동안 소방관들을 위해 만든 음식들이, 그 음식을 만들던 날 있었던 소방서의 크고 작은 출동들과 함께 조곤조곤 소개되는 책이다.
 
소방관을 위한 특별한 한 끼
 소방관을 위한 특별한 한 끼
ⓒ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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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만 원이라는 제한된 예산으로 열 명이 넘는 대원들이 다 먹을 수 있을 만큼의 분량을 만들어내기 위해 포기할 재료는 과감히 포기하고, 대체제를 구하는 모습에서는 18년차 주부로서의 나를 돌아보았다.

어딜 가나 소방대원들의 식사를 위해 장을 본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인분들이 조금이라도 덤을 더 주려고 한다는 대목에서는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도 아직 따뜻한 마음들이 남아있구나 싶어 마음이 따뜻해졌다.

저자의 고등학생 시절 이야기는 이미 작가인 엄마인 배지영 작가의 글로 묶여 <소년의 레시피>라는 책으로 나왔다. 글 쓰는 엄마가 기록한 요리하는 아들의 이야기. 그 아들이 자라 사회복무요원으로 119안전센터에서 특식을 만든 이야기. 이 이야기들을 연달아 읽는 것은 마치 닭과 계란으로 요리한 오야꼬동을 먹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소년의 레시피
 소년의 레시피
ⓒ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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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에는 관심이 없는 내가 이 책들을 읽은 것은 나에게도 요리하고 싶다고 말하는 중2 아들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는 공부를 하지 않으려고 매일 최선을 다한다. 열심히 하는 게 또 있다. 엄지 손가락 하나로 그날그날 새로 올라온 온갖 숏폼 동영상을 다 섭렵해내고 말겠다는 듯 바쁘게 핸드폰 화면을 밀어올리는 일이다.

공부를 안 하는 것은 괜찮은데 유튜브, 웹툰, 게임 같은 가벼운 즐거움만 탐하는 것은 괜찮지 않았다. 이십대가 되면 집에서 나가 독립을 해야 한다고 아이들에게 늘 말해왔다. 아이가 집을 떠나기 전까지 알려주고 싶은 단 하나는 책 읽는 즐거움이다.

하루 8시간 일하는 풀타임 직장인인 나는 회사원, 엄마, 아내로 사는 일에 많은 시간을 써야 하기에 내 시간이 거의 없다. 그 작고 소중한 나만의 시간을 아이가 엄마 눈을 피해 게임을 하고,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보는 것을 쫓아다니면서 감시하는데 쓸 수는 없었다.

다만 책을 읽는 즐거움은 아이가 집을 떠나기 전에 알려주고 싶었기에 아이가 읽었으면 싶은 책을 여럿 내밀어 보았지만 딱히 아이에게 흡수되는 느낌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 오야꼬동은 달랐다.

예상치 못한 독후 활동

아이는 <소방관들을 위한 특별한 한 끼>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 시민들이 소방서에 전해준 수박을 손질하는 방법에 대한 설명을 읽고는 수박을 사오면 책에 나오는 방식으로 손질을 해준다.
 
교차오염을 줄일 수 있는 수박손질 방법
 교차오염을 줄일 수 있는 수박손질 방법
ⓒ 최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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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한 사람은 음식 만드느라 수고하니 가장 맛있는 부위를 먹어도 된다는 주방 이모님의 이야기를 읽고는 수박에서 가장 맛있는 부분을 잘라 제 입에 쏙 넣는 데도 면죄부를 얻었다.

아이의 독후감은 언젠가 소방대원들에게 음식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것으로 끝났다. 책에 나온 삼계탕을 해보고 싶다고 했고, 돈가스 만들 돼지고기를 사달라고 했다. 예상치 못한 독후 활동이다.

모두가 시험 성적을 향해 전력 질주하는 와중에 하고 싶은 일을 찾고, 그 일을 해낸 이야기를 그리고 그런 아이들 지켜본 엄마의 이야기를 책으로 읽을 수 있어 반가웠다. 덕분에 예체능만 우수한 아들의 성적표를 너그러이 받아들 수 있는 인내심을 채울 수 있었다.

아이가 끝까지 요리를 하게 될지 다른 길을 찾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의 관심사와 맞닿아 있는 책은 재미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부디 <소방관들을 위한 특별한 한 끼>가 책 읽는 재미를 아는 세상으로 건너가는 문을 열어준 책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제 블로그나 브런치에 게재될 수 있습니다.


글쓰기 모임에서 만나 시민기자가 된 그룹. 70년대생 동년배들이 고민하는 이야기를 씁니다.
태그:#수박손질, #요리사지망생, #배지영, #강제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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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만드는 삶을 지향합니다. https://brunch.co.kr/@sword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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