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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에 태어났으니, 내 나이는 어느덧 육십 하고도 셋. 이른바 1차 베이비부머 세대(1955~1964년생)다. 생애 주기로 보면 나는 노년으로 들어가는 문턱에 서 있다.

국민안전처는 개인의 생애 주기를 영‧유아기(0~5세), 아동기(6~12세), 청소년기(13~18세), 청년기(19~29세), 성인기(30~64세), 노년기(65세 이상)로 구분한다. 성인기를 30년이 넘도록 길게 구분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마 안전을 다루는 정책 목적상 유효하기 때문이지 싶다.

기획재정부의 'e나라도움(국가보조금통합관리시스템)'에서는 성인기를 중년기(30~49세)와 장년기(50~64세)로 좀 더 세분하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인 듯하다. 경제불황기가 아니더라도 30대~40대와 달리 50대에 이르면 정년을 채우지 못하는 비중이 확연히 달라지는 현실을 파악하기 위해서 말이다.

노년으로 들어가는 문턱에서

생애 주기 구분이 어떠하든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대체로 장년을 중년으로 인식하는 경향이다. 흔히 말하는 '중년의 위기'만 하더라도 이때의 중년을 30대나 40대라 하기보다는 50대나 60대 초반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나 스스로는 중년이라고 우기지만 노년이 끌어당기는 힘에 어쩔 수 없어 하는 처지다. 아래 이성복 시인이 쓴 표현대로 종이컵 커피를 포기하지 못하고, 떠나는 버스를 허둥지둥 쫓아가는 중년 사내의 모습에서 나를 보게 된다.
 
버스가 지리산 휴게소에서 십 분 간 쉴 때, 흘러간 뽕짝 들으며 가판대 도색 잡지나 뒤적이다가, 자판기 커피 뽑아 한 모금 마시는데 버스가 떠나고 있었다. 종이컵 커피가 출렁거려 불에 데인 듯 뜨거워도, 한사코 버스를 세워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가쁜 숨 몰아쉬며 자리에 앉으니, 회청색 여름 양복은 온통 커피 얼룩, 화끈거리는 손등 손바닥으로 쓸며, 바닥에 남은 커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렇게 소중했던가, 그냥 두고 올 생각은 왜 못했던가. 꿈 깨기 전에는 꿈이 삶이고, 삶 깨기 전에는 삶은 꿈이다.  (이성복 시집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중 '그렇게 소중했던가' 전문, 열림원, 2003, 32쪽)
 
어쩌면 마음과는 달리 몸이 얼어붙어 쫓아갈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버스 뒤만 속절없이 바라보는 늙은이에 가까워진 건지 모르겠다. 꿈이든 삶이든 지금의 나를 부정하긴 어렵다.
 
지난 봄 한양도성을 걷다 성벽 돌 틈새에 핀 꽃과 잡초를 보았다. 어떠한 조건에서든 자기만의 삶을 살아내는 모든 생명은 아름답다.
 지난 봄 한양도성을 걷다 성벽 돌 틈새에 핀 꽃과 잡초를 보았다. 어떠한 조건에서든 자기만의 삶을 살아내는 모든 생명은 아름답다.
ⓒ 정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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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에 가깝다는 건 생의 마지막 단계가 시작된다는 의미다. 백세시대라고 하니 30년 남짓 남은 삶이 짧다고 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60대에 접어든 나에겐 저승이 코앞에 있다는 말이 그다지 낯설지는 않다.

친구들과 만나면 죽음 문제가 제법 화제에 오르기도 하거니와 코로나 방역기준에 비춰보더라도 이미 나는 고위험군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아내와 나는 사전연명의료 중단의향서를 제출해 등록증도 받았다.

이제 나로서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진지하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삶이 나에게 묻고 있다.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올라오는 소리는 '네 마음 가는 대로 너답게 살아라!'다. 다행히 작가 유시민도 자신의 책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나답게 사는 인생'을 살고 싶음을 피력했다.
 
"나는 열정이 있는 삶을 원한다. 마음이 설레는 일을 하고 싶다. 자유롭게, 그리고 떳떳하게 살고 싶다. 인생이라는 짧은 여행의 마지막 여정까지, 그렇게 철이 덜 난 그대로 가고 싶다. 내 삶에 단단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그렇게 사는 게 나다운 인생이라고 생각한다."(유시민 지음, <어떻게 살 것인가>, 아름다운사람들, 2013, 10쪽)

철학자 강신주는 김수영의 시 <여름밤>을 평(評)하면서 자기만의 삶을 살아낼 때 소음이 날 수밖에 없는데, 그 소음은 자유의 소리라서 아름답다고 했다. 그는 가장(家長) 1인이 지배하는 억압적인 가정과 구성원이 속마음을 드러내는 자유로운 가정을 서로 빗대어 그 이유를 설명한다.

가령 억압적인 가정의 경우 아버지가 베토벤을 좋아하면 그 외 가족 구성원이 설령 다른 작곡가의 음악을 좋아하더라도 내색할 수 없어 이 집에서는 베토벤 음악만 울려 퍼진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불협화음이 없는 '고요하고 평화스러운 가정(?)'이 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반면 구성원이 속마음을 드러낼 수 있는 가정, 즉 저자의 표현대로 '사랑이 가능한 집안'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다소 길지만 그의 말을 들어보자.
 
"사랑이 가능한 집안은 언제나 야단법석이 따로 없다. 아버지는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려고 하고, 어머니도 딸도 아들도 그러려고 한다. 당연히 아버지는 나머지 가족들의 속내를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싶어도 아버지는 아들이 우울해 보이면 아들이 좋아하는 음반을 조용히 플레이어에 넣는다. 그래서 이 가정에는 언제나 자기의 음악을 듣겠다는 소음이, 그리고 다양한 음악이 흘러나올 수밖에 없다. 물론 이것은 "사람이 사람을 아끼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공통된 중심이 없어야 다양한 팽이들이 자신만의 소리를 내며 돌 수 있는 법이다. 마침내 우리는 알게 되었다. 소음은 권력자의 시선에서만 소음으로 들릴 뿐, 자기만의 삶을 살아냈을 때 발생하는 자유의 소리라는 사실을. 그리고 사회는 이런 다양한 소리들로 빚어낸 교향곡이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강신주 지음, <김수영을 위하여>, 천년의상상, 2012, 383쪽)
 
나다운 삶을 살고 싶다

나다운 삶, 자기만의 삶을 살면 자유가 저절로 빚어지고 그 자유가 다른 사람들의 자유와 만나면 자유의 교향곡이 되어 만끽할 수 있는데 마다할 일이 아니다. 저명한 시인, 철학자, 작가가 모두 지지하는데 무엇이 두려우랴. 은퇴도 했겠다 이런저런 눈치 볼 일도 적고 용기만 있으면 되는 걸. 문제는 나다운 삶은 어떤 삶일까다. 나의 답은 이렇다.

무엇보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것이다. 평범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정말 그렇게 살고 싶다. 현역에 있을 때는 이런저런 이유와 사정으로 하지 못했던 아쉬움이 큰 탓이다. 지금이 아니면 나로서 존재하는 하나뿐인 삶에서 이제 기회도 없을 것이기에 더욱 절박하다.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유지하며 살다 삶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촌장(村長)의 지혜가 필요하지 않게 된 시대에, 살아온 경험만을 고집하며 '섬' 같은 존재가 되고 싶지는 않다. 자녀나 후대 그리고 공동체에 짐보다는 미력하나마 도움을 주고 싶다. 늘 죽음을 생각하며 삶의 소중함과 대견함을 지니고 싶다.

지극히 진부하고 알맹이 없는 답을 내놓았지만 스스로 성찰하는 마음, 열린 사고, 공부하는 자세를 가지려고 애쓰는 것은 나다운 삶을 살아내고 싶어서다. 이렇게 글로 남기는 것도 나만의 다짐인지 모른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태그:#베이비부머, #나다운 삶, #노년, #중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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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와 산책을 좋아하며, 세상은 더디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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