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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 대한 기록을 남긴다는 건 미래를 생각하는 거거든요. 희망 없이는 일기를 쓰지 않아요. 일기를 쓴다는 건 나에 대한 애정이고, 삶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는 거예요."
- 이호 전북대 의대 교수, 법의학자  (tvN <알쓸인잡> 4회 '기적을 만든 인간' 중. 20221223 방영)

24살, 취직 후 받은 첫 월급으로 그녀는 카메라를 샀다. 남들은 첫 월급으로 대출을 갚거나 부모님께 선물을 사드렸다지만, '일시불'로 카메라를 사는 것에 마음이 끌렸다고 한다. 그렇게 얻은 카메라로 신나게 사진을 남겼다. 찍은 사진을 자주 찾아보기 위해 블로그에 짧은 글과 사진을 함께 올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그녀의 첫 기록이었다.

34살, 둘째가 태어났다. 아이의 웃는 얼굴,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아이의 키, 아이가 걸린 감기의 증상 등 뭐든 기억하고 싶은 건 전부 블로그에 기록으로 남겨뒀다. 두 아이를 키우는 게 힘에 겨워도 "남들도 다 힘드니까 나도 힘든 가보다" 하고 넘기며 살았다. 그러다 우울증이 찾아왔다. 육아도 번아웃이 오는구나. 그녀는 자신의 우울증도 우선 기록해 두었다고 한다.

이는 작년 4월부터 현재까지 네이버 블로그와 브런치에 '우울해도 쌀은 씻어야지', '우울한 나도 다정한 엄마가 될 수 있을까'라는 제목으로 우울증 치료 기록 연재를 이어오고 있는 맹수진씨의 사연이다.

지난 5월 23일, 맹수진(37)씨를 만나 왜 '기록'하는지에 대해 물었다. 그녀는 "기록은 결국 나를 살리는 좋은 참고 자료"라고 말했다.

"사람마다 감정을 쏟는 방법은 다양하잖아요. 어떤 사람은 운동을 하고, 어떤 사람은 수다를 떨고요. 근데 저는 두 아이를 키우다 보니까 다른 곳에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면 안되요(웃음). 그래서 처음엔 가볍게 감정을 털어놓는 정도로만 글을 썼죠. 어쨌든 제가 우울증이라는 병을 얻었고, 그 병을 잘 치료 하려면 병의 진행 상황을 기록하거나 스스로 해야 할 일을 찾아야 할 것 같았어요. 책도 많이 읽어봤고 일단 뭐라도 기록해놓으려고 했었던 것 같아요."

두 아이(현재 7살, 4살)를 키우며 그녀의 우울증은 시작됐다. 사랑하는 아이들과 함께 노는 것이 점점 일같이 느껴졌고, 도무지 힘이 나질 않았다. 혼자서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만 있고 싶었다. 타인과 만나서 대화하는 것조차 버겁게 느껴지던 시기에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듯한 느낌이 들고 숨이 안 쉬어졌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 날 그녀는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2022년 3월의 일이다.  
 
인터뷰이 맹수진씨와 그의 아들 사진입니다.
 인터뷰이 맹수진씨와 그의 아들 사진입니다.
ⓒ 맹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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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쓴 우울증 치료 기록은 아이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아이를 유치원에 바래다준 아침, 아이와 함께 먹은 점심, 저녁에 아이를 재우다 생긴 일 등. 우울한 기분이 심해지는 날에는 아이들에게 나쁜 날이 되지 않도록 평소보다 더 힘을 내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가끔 주변 사람들이 그러더라고요. '야 네가 진짜 우울증이야? 아이들이랑 노는 거 보면 우울증 때문에 힘들어하고 고민하는 사람 같지가 않던데.' 그런 얘기를 들으니까 오히려 '그래? 그러면 우울증이 있어도 아이들과 잘 살아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줄까?' 싶어서 아이들이랑 같이 지내는 내용을 블로그에 더 자주 올렸어요.

해시태그(#)를 타고 들어와 제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종종 '공감한다'고 하세요. 특히 저와 같은 엄마들이요. 잘 살아내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될 때 제가 써놓은 글을 보면 공감이 된대요. 이 세상에선 나만 힘든 게 아니라 저렇게 잘 지내는 것 같은 사람도 우울증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거니까요.

제가 글을 써놓는 것만으로도 그런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게 저한테도 큰 위로가 됐고, 위로가 된다는 건 어쨌든 우울증 치료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니까 저에게도 참 좋은 일이죠."


나를 위해 준비된 '나의 기록'

혼자만의 일기로 시작한 기록은 몇 년간 쌓여 맹수진씨만의 자료가 되었다. 아이를 키우는 것과 자신의 우울증을 치료하는 것 모두에 도움이 됐다고 한다. 첫째를 키울 때 남겨둔 기록은 둘째를 키울 때 좋은 참고 자료가 됐다. 매일 조금씩 기록해둔 우울증 치료 일기에선 점차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에겐 '과거에 남겨둔 기록이 지금의 나를 살렸고, 지금 남기는 기록은 미래의 나를 도울 수 있을 것'이라는 강한 확신이 있었다. 말하자면 "의도한 적은 없었지만 내가 나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라는 것이다.
 
"첫째를 키울 때 읽었던 육아 서적도 전부 블로그에 기록으로 남겨뒀고, 그걸 아이에게 적용해보니 '결과가 어땠다'라는 식으로까지 전부 기록을 해놨거든요. 근데 그게 둘째를 키울 때 저에게 너무 도움이 됐죠. 만약 '감기에 걸려 이런 증상이 있다, 그러면 무슨 물을 끓여 먹였을 때 잠을 잘 잤었지?' 하면서 제가 남겨둔 기록을 찾아보는 거죠.

우울증과도 밀접하게 연관이 있는 게, 우울증의 상태나 증상을 쭉 기록해두니까 데이터가 쌓이고 시간에 따른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제 몸이 비로소 이해되기 시작한 거죠. 좀 예민하고 화를 내도 스스로 너그럽게 이해해주기도 하고요.

기록을 전부 해뒀기 때문에 힘든 시기 패턴이 보이면 더 노력하게 돼요. 이런 자료를 만들어놓으면 객관화가 정확히 되고 데이터처럼 읽을 수 있으니까 기록이 나를 위해서도 참 중요하겠구나 싶었죠."


맹수진씨는 자신의 우울증이 진행되는 상태나 증상, 운동량, 약 복용량이나 약의 종류, 외출 빈도나 만난 사람 등 전부를 기록해둔다. 그녀는 그 기록이 쌓여 자신만의 최적화된 데이터가 형성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남들이 써둔 수많은 글보다 훨씬 자신에게 유용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 발자국 떨어져서 나를 바라보기

그녀는 "기록에 '제 3자의 시선'을 갖게 해주는 힘이 있다"고 말했다. 자신이 쓴 글이지만, 시간 지나 다시 보면 남이 써둔 글처럼 한 발자국 떨어져 조금은 가볍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울한 기분일 때 써둔 두서없는 일기든, 아이들이 사고를 치거나 힘들게 할 때 찍어놓은 사진이든 말이다. 

"아이들을 사진이나 영상으로 많이 남겨두면 또 좋은 점이 아이들을 제3자의 입장에서 볼 수 있어요.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가끔 사고도 치고 힘들게 할 땐 애가 항상 예쁘지는 않거든요? 근데 그런 모습을 사진이나 영상으로 올려두고 좀 지나서 다시 보면 제3자의 눈으로 아이들을 다시 바라보게 돼요. 너무 귀엽고 예뻐요. 당연하잖아요, 내 아이들인데.

그럼 또 갑자기 아이들한테 가서 '사랑해'라고 말해줘요. 제가 써둔 글이지만 마치 남이 써둔 이야기처럼 가볍게 읽으면 '다음부턴 이런 식으로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아이들을 덕질하는 마음으로 글이든 사진이든 기록해두면 의미 있어요. 정말 좋아요."

 
기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터뷰이 맹수진씨가 인터뷰 시간을 위해서도 자신의 기록을 가져오고 준비해오셨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 인터뷰이 맹수진씨가 인터뷰를 위해 가져온 기록들 기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터뷰이 맹수진씨가 인터뷰 시간을 위해서도 자신의 기록을 가져오고 준비해오셨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 장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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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이를 키우면서도 우울증 치료를 병행하는 맹수진씨는 우울증을 '우울 에피소드'라고 표현한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나는 에피소드, 그러나 끝이 나도 언제나 다시 시작될 수 있는 그런 에피소드. 맹수진씨는 현재 또 하나의 우울 에피소드를 지나고 있다.

이를테면, 지난 2월 브런치에 남긴 [우울증 치료 310일]차 기록은 "우울한 나도 행복한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책에게 물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맹수진씨는 "다시 한 번 행복을 글로 배울 때가 됐다"라며 책 <내향인을 위한 심리학 수업>을 읽은 감상을 남겼다.

책의 일부 내용, "행복은 수단에 가깝다, 힘든 일을 겪었다면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라, 그러면 조금이나마 행복질 것이다, 행복의 핵심은 행복하다고 자주 인정하는 것"을 발췌해 적으며 이를 실천했다. 실천 방법은, '내가 행복해지려면?'을 묻고 스스로 답하는 것이다. 
 
아이를 간지럽히면 된다. 깨밝은 아이의 웃음소리에 행복이 번진다. 
아이가 낮잠 잘 때 옆에서 숨죽이고 웹툰을 본다. 
남편 월급날 피자한 판을 시킨다. 
잠들기 전에 아이들의 발을 만진다. 부드러운 발등과 굳은살이 생기기 시작한 발바닥은 묘한 안정감을 준다. 

하나하나 적은 행복한 순간들 20가지를 나열한 후 맹수진씨는 "(답을) 한 마디도 적지 못했던 것이 이제는 이렇게 많이 늘어났다, 살아있는 사람 같아서 색채가 돋는 것 같아 눈물이 나올 것 같다"며 자신의 지나온 나날을 위로했다. 그는 이런 기록들이 다음 '우울 에피소드'를 만난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고 했다. 

"우울할 땐 부정적으로 생각하다 보니까 정말 끝이 없는 것 같거든요. 내가 세상에서 사라져야만 이 우울증이 끝날 것 같고 모든 걸 끝내고 싶고 그런데, 아닐 수도 있어요. 과거에 제가 기록해둔 글은 지금의 저에게 도움을 주고 있고, 지금 기록해두는 것들은 미래의 언젠가 또 다른 우울 에피소드를 만나게 되는 저에게 도움을 줄 거예요. '이 에피소드도 곧 끝난다!' 하면서요."

맹수진씨는 육아 번아웃과 우울증에 대해 남긴 기록에 '공감한다'고 댓글을 남긴 이들에게 "우리가 모성애가 없는 게 아니다"라는 말을 꼭 전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게으르거나, 부정적이거나, 단점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 아니라는 것. 스스로 생각해봤을 때 이상하다 싶으면 치료를 적극 권한다는 것. 우울증은 단지 의지박약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했다.

"내가 나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주고 싶은 게 있어요. '끝은 있다'라는 거요. 그러니 약 챙겨 먹고 같이 잘 치료해보자고요."

태그:#우울증, #육아, #엄마,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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