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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는 마을학교 성인문해교원입니다. 여러 면 소재지에서 모인 '마을한글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을 씁니다. [기자말]
"선생님 얼마나 아프길래 수업을 못 오신대유?"

마을 학교 어르신 학생들이 전화가 왔다. 몸살 감기가 심해 몸이 많이 아프고 입이 다 헤져 물 삼키기도 어려워서라고 말했다.

나는 여행을 좋아하지만, 실제 여행 떠날 엄두는 못 내는 1인이다. 핑계를 대자면 어르신 수업하고 가끔 초.중학교에서 북텔링 수업과 청소년 웰라이프 강의, 시 낭송 수업을 해서다. 수업 준비도 있지만 그사이 비는 요일엔 취미 생활을 하다 보니 시간 내기가 어렵다. 이러다 좋아하는 여행 한번 못해보고 늙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서울 사는 여동생에게 꽃 축제 투어를 하자고 제안했다. 동생은 흔쾌히 수락했다. 5년만의 여행. 설렜다. 첫 번째로 충남 태안군 코리아 플라워파크서 하는 세계튤립축제부터 시작했다.
 
태안세계튤립축제 에서 촬영
▲ 태안세계튤립축제 태안세계튤립축제 에서 촬영
ⓒ 이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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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6일 튤립 꽃은 절정이었다. 꽃들이 얼마나 싱그럽게 피어있던지 입에서 '와! 와!' 탄성이 절로 나왔다.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점심 먹는 것도 잊고 꽃에 흠뻑 취해 넋을 놓고 바라봤다.

분홍색, 빨간색, 노란색, 주황색, 보라색, 하얀색, 튤립 꽃 천지다. 황홀 그 자체다. 사람의 일생으로 보면 18세 소년, 소녀처럼 어여뻤다. 여기를 가도 저기를 가도 끝없는 튤립의 향연 속에 파묻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핸드폰에 영상으로 담고 사진으로 담았다. 갑자기 스마트 폰이 캄캄해졌다.
 
태안 세계 튤립 축제에서 촬영한 사진
▲ 태안 튤립축제 태안 세계 튤립 축제에서 촬영한 사진
ⓒ 이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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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세계튤립 축제에서 촬영
▲ 태안 튤립축제 태안세계튤립 축제에서 촬영
ⓒ 이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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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러지?' 아직 사진에 담을 꽃들이 많은데 핸드폰이 고장 난 걸까? 핸드폰을 껐다가 전원을 눌러도 소식이 없다. 충전할 곳을 찾아다니느라 땀이 비 오듯 흘렀다. 간신히 간이 매장에서 충전기를 꽂아본 후에야 배터리가 다 된 것을 알게 되었다.

고장이 아니라서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아름다운 꽃들을 사진에 담지 못함이 못내 아쉬웠다. 더 아쉬운 것은 어느 매장에서도 충전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한참 두리번거렸다. 플라워파크 한쪽에 자리하고 있는 <건식 반신욕기> 홍보부스에서 충전을 할 수 있었다.

충전을 위해 요금 내고 체험했다. 따뜻해서 온몸의 피로가 풀렸다. 다시 꽃 사진 찍으러 갔다. 핸드폰에 200기가바이트 외장 메모리를 장착하고 오길 잘했다. 집에 오기 싫었다. 꽃을 두고 올 수가 없어 발이 떨어지지 않지만 돌아오기로 했다. 가슴가득 싱그러운 튤립향기 안고.

돌아오면서 5월 5일~7일 꽃 축제에 또 가기로 했다. 날씨 검색을 하니 비가 온다는 예보다. 그렇다면 다음에 갈까 하다가 <피나클랜드 튤립 축제> 5월 7일이 마지막이었다. 비 온대도 여행을 강행하기로 했다. 태안 튤립 꽃이 눈에 아른거려 미룰 수가 없었다. 미루면 내년에 가야 하니까. 대신 집에서 멀지 않은 충남권에서 꽃을 보러 다니기로 했다.

첫날 부슬부슬 비 오는 거리를 달려 세계꽃식물원에 도착했다. 대 실망이다. 화려하고 아름답던 태안 튤립 꽃을 가슴에 한가득 담고 가서 아산세계꽃식물원을 둘러보니 꽃들은 더러 있었지만, 볼 게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싱거웠다. 거기 있는 꽃들에 미안할 정도로 내 얼굴이 실망으로 가득 찼다.

서운한 마음으로 둘러보며 아쉬운 대로 사진을 찍었다. 입장료는 받았지만 돌아갈 때 입장권 액수만큼 꽃을 가져갈 수 있어서 화분 세 개를 가져왔다. 꽃향기 퐁퐁 풍기는 차를 타고 재빨리 <피나클랜드>로 출발했다. 튤립 축제와 불꽃놀이를 기대하며 달렸다.

날씨는 가끔 비를 뿌렸지만, 차창 밖 풍경은 5월의 신록이 절경이다. 눈 호강으로 마음은 나비처럼 나풀댔다. 들뜬 마음으로 피나클랜드에 도착했다. 비가 와서 불꽃축제는 취소되었다고 했다. 튤립도 다 지고 없었다. 급 실망이다. 입장권을 샀다. 불꽃축제도 취소되고 튤립 축제에 튤립도 지고 없는데 입장료는 받았다.

피나클랜드 들어가는 입구는 정말 멋있었다. 외국에 온 느낌이 들었다. 비가 솔솔 뿌려서 우산을 펼쳐 들고 걸어갔다. 튤립축제는 7일까지였지만 튤립은 이파리만 무성했다. 공연도 취소되고, 볼거리라고는 산으로 나 있는 길과 초록빛의 나무들 뿐이다. 그래도 꽃을 보지 못해서 다시 오고 싶은 장소였다.

도고 역 근처 모텔에서 1박 했다. 세상에 모텔 서비스가 짱이다. 하얀 침대 시트와 하얀 이불, 거울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방. 쟁반 가득 수박, 바나나, 포도, 사과, 오렌지, 양말 두 켤레. 여동생과 나는 배를 잡고 웃었다. 과일이 쟁반 가득인 것도 놀라운데 양말도 남녀 두 켤레나 서비스하다니.

아침이다. 일기예보는 오전에 날이 든다고 했으나 흐렸다가 비를 뿌렸다가 하는 날씨다. 일찍 일어나 외암리 민속마을로 향했다. 돌담길이 그윽하다. 마음이 훈훈해지면서 따뜻해져 왔다. 내가 시골 길을 좋아해서 인가보다. 당진 천 크기 정도의 냇물이 흐르는 다리를 지나 외암리 민속마을로 들어서자, 현지 할머니들이 여러 가지 농산물을 팔고 계셨다.

"내가 직접 뜯어서 만든 쑥 개떡이니 사가유. 맛있어."

직접 쑥을 뜯어서 만들었다니 맛있을 것 같았다. 엄마가 해주시던 쑥 개떡 생각이 나서 얇고 동그랗게 빚은 초록빛의 쑥 개떡을 세 개 샀다. 마을엔 초가삼간 집, 중류층 집, 상류층 집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집안 곳곳 예전에 농사짓던 여러 가지 농기구들을 볼 수 있었다. 옛날에 김치를 보관하던 저장소를 처음 보았다. 짚을 엮어서 고깔 모양으로 만들어 눈 비를 막아주게 만든 것을 보니 조상들의 지혜를 알 수 있었다.
 
외암리 민속마을에서 촬영
▲ 똥 장군 외암리 민속마을에서 촬영
ⓒ 이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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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통형 오지 그릇 배 부분에 입구가 있는 그릇은 이름이 똥 장군이라고 했다. 똥 장군 자체 만으로도 오지그릇이라 무겁게 생겼는데 거기에다 똥 오줌을 담아 등에 지고 날랐다니 고생스러웠겠다.
 
외암리 민속마을에서 촬영
▲ 옛날 남자 소변 통 외암리 민속마을에서 촬영
ⓒ 이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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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암리 닌속마을에서 촬영
▲ 옛날 김치 저장하는 곳 외암리 닌속마을에서 촬영
ⓒ 이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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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예전 농사짓던 기구와 물건들이 잘 보존되어 있고 교육적 가치도 있어 외암리 마을 여행은 좋았다. 걷다보니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나무 타는 냄새가 솔솔 풍겨 저절로 발길이 머물러졌다. 그 집에서 할머니가 나오시더니, "밥 먹고 가. 옛날 반찬이여. 내가 꽃 모종도 줄게. 어서 들어와. 밥값은 오천 원이여".

할머니가 이끄는 대로 대청으로 들어갔다. 옛날 집 그대로였다. 나무로 된 마루에 교자상을 펴놓았다. 비 오는 날이라 그런지 마루가 차디 찼다. 할머니가 벽에 걸린 사진을 보라며 자랑했다. 연예인들이 밥 먹고 간 사진 몇 장이 걸려있었다.

반찬은 10가지가 넘었으나 맛은 권할 만큼은 아니었다. 마당에 우물이 있는 집이고, 마늘을 많이 심어놓은 곳은 옛날엔 바깥마당으로 사용하던 곳 같았다. 할머니는 민박도 하니 자고 가도 된다고 했다. 이 외암리 마을은 옛집 그대로 민박 하는 집이 꽤 되었다.

꽃구경 하고 집에 돌아와 사흘이 지났다. 오슬오슬 춥더니 침을 삼킬 수 없이 목이 아팠다. 잠을 잘 수가 없게 배가 아팠다. 감기인 것 같아 병원에서 약 처방을 받았다. 여덟 알이다. 약 때문인지, 몸살 때문인지 가슴부터 배의 통증 때문에 밤을 꼬박 새우고 다음 날 다른 병원에 갔다. 열은 36.8도인데 코로나와 독감 검사를 동시에 했다. 결과가 나왔다. 아뿔싸! 코로나19 확진.

링거를 두 개 꽂았다. 그동안 코로나 안 걸리고 살았다. 학습자 어르신들 모두 코로나 확진됐을 때도 무사했다. 마스크도 해제됐는데 코로나19에 확진되었다니. 나는 마스크를 착용하고 여행했고 밥 먹을 때만 마스크를 벗었다. 모든 일상이 멈췄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너무너무 아프다. 혀는 다 갈라지고 혓바늘이 돋았다. 입 천장은 껍질이 다 벗겨졌다. 물을 삼킬 수도 없다. 밥을 먹을 수도 없었다. 남편이 코로나 확진되었을 때도 나는 무사했다.

병실에서 링거 맞는 중에 보건소에서 전화가 왔다. '일주일 격리' 통보다. 수업을 모두 연기해야 했다. 학교 수업은 연기했는데 어르신 수업이 문제다. 어르신들이 걱정할까 봐 사실을 알려야 하나 고민하다가 반장님께 내일 수업은 아파서 못 간다고 학생들에게 전해 달라고 전화했다.

격리 해제가 되고 이틀 뒤 금요일 바나나 한 박스를 사 들고 수업하러 갔다. 코로나 때문에 수업을 못해 죄송하다고 했다. 8년 동안 한 번도 수업을 거른 적이 없었다.

"그럴 줄 알았슈. 선생님이 수업을 빠질 분이 아니어서 코로나 걸렸구나 생각했슈."

덧붙이는 글 | 브런치 스토리와 블로그에 게재할 예정입니다.


태그:#마을한글학교, #코로나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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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는 마을학교 성인문해교원입니다. 이밖에 웰다잉강의, 청소년 웰라이프 강의, 북텔링 수업, 우리동네 이야기 강의를 초,중학교에서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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