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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역사산책>은 소설가 황석영과 맺은 희한한 인연으로 이야기를 풀어보고 싶다. 내가 황석영의 <객지>를 처음 읽은 것은 1975년 고교 2학년 시절이었다. 그때 시국이 수상하여 나는 광주교도소에서 <객지>를 읽었다. 조선대학교에 다니는 어느 분이 고맙게도 <객지>를 빌려주었다. 문체가 아주 단단하였고, 사실주의 계열의 작품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젊어서 황지우 시인은 김승옥의 문체에 홀딱 반했다고 한다. 늘 <서울 1964년 겨울>을 찬미하였다. 그러던 시인이 노년이 되면서 작품 평이 달라졌다. "이제 읽으니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이 한국 문학의 절창인 것 같애."

황석영이 내게 알려준 비기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을 영화화한 이만희 감독의 <삼포 가는 길>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을 영화화한 이만희 감독의 <삼포 가는 길>
ⓒ 한국영상자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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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황석영을 만난 것은 김해 교도소에서였다. 1978년 가을 내내 나는 서울 달동네에 독재정권을 몰아내자는 유인물을 뿌리다가 투옥되었다. 1979년 2월이었을 것이다. 최후 진술을 하고 뒤를 돌아보니, 먼 길을 달려와 재판을 지켜보고 있는 여인이 있었다. 이화여대에 다니는 그 여인은 이후 매달 책을 넣어주었다. 고마운 일이었다. 그 여대생이 넣어준 <장길산>을 무협지마냥 재미있게 읽으면서 징역을 깨나가고 있었다.

그때 지미 카터라는 양반이 한국에 왔다. 학생들에 대한 인권 탄압을 그만두라고 박정희에게 압력을 넣었나 보다. 그 덕에 1979년 7월 교도소의 문을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광주에 계시는 어머님께 인사를 드리고 며칠 후 서울로 가는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때 옆 좌석에 앉아 있는 분이 바로 황석영 작가였다. 황석영은 눈치가 빠르기로 따를 자가 없다. 빡빡머리에 밀짚모자를 쓰고, 하얀 고무신을 신고 있었으니 '이 자식이 전과자구먼...' 짐작했을 것이다. "야, 너 빵잽이지?" 선배는 금방 나의 정체를 짚어버렸다.

이후 버스에서 무슨 대화를 주고받았던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내 아들놈 때는 말이야, 감옥 가는 일이 없어야 할 터인데 어쩔지 모르겠어." 그 아들이 국악가 황호준이다. "거 있잖아, 중앙일보 1973년도를 뒤져봐. 박헌영 일대기가 있어." 백두산 도사가 산에서 내려와 비기를 건네주고 홀연 사라지는 것처럼 황석영 선배는 이름도 모르는 젊은이에게 이렇게 말하고는 사라졌다.

1979년 10월 26일 그러니까 황석영 작가와 헤어진 석 달 후, 궁정동에서 총소리가 울려 퍼질지 누가 알았겠으며, 그해 겨울 12월 12일에 군바리들이 쿠타를 일으킬지 또 누가 알았겠으며, 1980년 '서울의 봄'이 '빛고을의 피'로 물들지 누가 알았겠는가?

가도 가도 세상은 변함이 없었다. 독재는 여전하였다. 변한 것은 한가지였다. 군부독재는 한 하늘을 같이 이고 살 수 없는 원수라는 것, 이것만큼은 명확하였다. 1980년 내내 나는 잠수함('피신'의 은어)을 타면서 혁명이론을 탐구하였다. 레닌의 <국가와 혁명>을 미친 듯 읽었고, <공산주의에서의 좌익소아병>을 신나게 탐독하였다. 두 권의 원서를 읽으면서 마침내 혁명의 길에 들어서기로 작심했다.

1981년도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연구하였다. 서울대 도서관에서 대출할 수 있는 전 세계 모든 공황 이론을 다 섭렵하였다. 만델의 <후기자본주의론>도 번역하였다. 그런데 공황이론을 탐구할수록 가슴은 허전했다. 자본주의는 자체의 모순으로 사멸하게 되어 있다고 마르크스는 선언하였으나, 이는 이론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주장이었다. 공황이 발발하면 인간은 공황을 극복하는 수단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이론은 영국의 이야기였다. 레닌의 이론은 러시아의 이야기였다. 모두가 남의 나라 이야기였다. 나는 우리의 혁명운동사를 연구하고 싶었다. 1982년 6월 신림동 낙골에서 야학을 하고 있었다. 장마철이었다. 비는 주룩주룩 내리는데, 다시 서울대 도서관 5층을 찾았다. 백두산 도사가 가르쳐준 비기, 중앙일보의 박헌영 일대기를 찾았다.

박정희가 허락한 박헌영 연재
 
중앙일보에 박헌영 연재를 한 작가 박갑동(왼쪽)과 박헌영의 아들 원경스님.
 중앙일보에 박헌영 연재를 한 작가 박갑동(왼쪽)과 박헌영의 아들 원경스님.
ⓒ 원경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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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의 아들 원경 스님에 의하면 박헌영의 일대기를 중앙일보에 싣게 한 것은 놀랍게도 박정희였다. 젊은 시절 박정희는 박헌영을 존경하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중앙일보에 실린 박헌영 일대기의 제1호 독자는 박정희였던 셈이다. 참으로 역사는 아이러니로 가득하다. 역사란 정반대의 이질적인 새끼들로 꼬아 만드는 새끼줄인가 보다. 박정희 때문에 나는 학교를 잘렸다. 그런데 그 박정희가 박헌영 일대기를 출간하였고, 나로 하여금 혁명의 길을 걷게 하였으니 이게 무슨 조화인가?

서울대 도서관 5층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선배들의 혁명운동사를 탐독하였다. 1973년 4월 5일자 중앙일보에는 박헌영이 광주의 벽돌공장에서 일하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얼마나 반가웠던지, 바로 고향에 내려가 붉은 벽돌을 주워와 책상 앞에 놓았다.

1973년 4월 11일자 중앙일보는 또 놀라운 사실을 적어놓았다. "박헌영이 해방 전에 쓴 타블로이드판 신문, 책자 등이 젖가슴 높이까지 쌓여 있었으니 1m 30cm쯤은 되어 보였다." 이후 나는 청계천 고서점을 돌면서 박헌영을 찾아다녔다. 해방 직후 발행된 잡지에서 박헌영의 논문을 찾았고, 이후 <들어라 역사의 외침을>을 쓰면서 박헌영의 논문을 인용하였다. 책을 다 쓰고 그 잡지들을 소각하였는데 참으로 가슴 아프다.
 
1937년 12월 이재유가 체포를 알리는 경성일보 호외.
 1937년 12월 이재유가 체포를 알리는 경성일보 호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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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중앙일보에서 또 한 분의 혁명가를 알게 되었다. "이재유는 서대문서 유치장을 두 번이나 탈출하였다. 끝내 붙잡혀 44년 청주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옥사하신 분들은 달리 살펴드려야 한다. 얼마나 지독한 고문을 당하였으면 옥사하겠는가? 유관순도, 권오설도, 이재유도 그렇게 차디찬 감방에서 숨을 거두었다.

오는 4월 30일 서대문형무소 앞에서 이재유기념사업회의 총회를 거행한다고 한다. 너무 늦은 일이 아닐까? 나는 지인들에게 알렸다. "오는 일요일, 서대문형무소에서 봅시다."

작가 황광우 (사단법인 인문연구원 동고송 상임이사)

<알림- 이재유선생기념사업회 출범식>
일시 : 2023년 4월 30일(일) 오후 4시
장소 :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의정원홀

태그:#박헌영, #이재유, #황석영, #황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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