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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하나금융경영연구소가 발간한 '2023 웰스리포트'가 주요 매체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초고액 자산가의 평균 총자산이 323억 원이고, 자산가들의 MBTI를 조사해보니 'ESTJ'가 가장 많았다는 게다. 일반 대중의 ESTJ 비율은 8.5%인데, 슈퍼리치는 26.8%나 됐단다.

점입가경인 것은 아래의 분석이다.

"ESTJ형은 흔히 지도자형, 경영자형으로 불리는데, 사회적인 질서를 중시하면서 현실적이고 추진력이 있다고 평가받는다. 다수의 은행 PB(프라이빗 뱅커)도 부자의 특징으로 실행력을 언급했다."

'2023 웰스리포트'는 하나금융연구소가 지난해 12월 2013명(부자 745명, 대중부유층 818명, 일반대중 450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조사를 하고, 별도로 PB 인터뷰를 진행한 보고서란다. 표본집단에 대한 건 차치하고, 나는 'ESTJ'라는 단어를 보고 한국이 MBTI 공화국이 된 것 같아 뜨악했다.

유사과학이 판치는 대한민국

필자는 MBTI를 신뢰하지 않는 부류다. 그저 단순히 80억 지구인을 16개의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는 게 논리적이지 않다는 생각에서다. 더군다나 한국은 얼마 전까지(아니 지금도) 혈액형 성격설이 지배한 나라 아니었던가. AB형인 필자에게 친구들은 천재 아니면 바보라고 놀렸다. 중간이면 안 되나?

1901년 독일의 병리학자 카를 란트슈타이너는 ABO식으로 혈액형을 구분했다. 단순히 수혈을 편하게 하려고 구분한 ABO식은 인간의 혈액형은 4가지라는 고정관념을 만들었다. 이를 근거로 상대적으로 B형이 많은 아시아인은 열등하고, A형과 O형이 많은 유럽인은 우등하다는 인식까지 만들어졌다.

우생학이 유행했던 독일에서 유학한 일본인 후루카와 다케다는 319명의 표본으로 혈액형 성격론을 만들었다. 1970년대 일본의 방송작가 노미 마사히코가 다케다의 이론을 바탕으로 책을 쓰면서 한국에까지 혈액형 성격론이 전파된 게다.

혈액형 성격론의 망령은 여러 차례 과학계와 방송사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으로 그 허구성을 밝혔는데도 우리 사회를 지배했다. 이제 그 망령은 'MBTI'라는 가면을 쓰고 우리 앞에 나타났다.   

MBTI는 과학이 아니다

MBTI 성격유형검사는 스위스의 정신분석학자인 칼 융의 심리 유형론을 토대로 고안된 자기 보고식 성격 유형 검사 도구다. 융은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디오니소스형', '아폴론형' 인간 유형 분류에서 영감을 얻어 고유의 심리 유형 이론 체계를 발전시켰다.

'디오니소스형'은 고대 그리스 신화 속 광기의 신 디오니소스에서 이름을 따왔다. 도취, 광란, 본능, 무질서, 열광, 환상 등의 이미지를 표상한다. '아폴론형'은 이성의 신 아폴론의 이미지인 균형, 조화, 합리성, 절제, 지식, 질서 등을 표상한다.

니체의 대립항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융은 인간 유형을 크게 인식자(Perceiver)와 판단자(Judger)로 나누고, 구체적으로 감각(Sensing)을 선호하는 사람과 직관(Intuitive)을 선호하는 사람, 사고를 선호하는 사람(Thinker)과 감정을 선호하는 사람(Feeler), 태도에 따라 내향성(Introvert)과 외향성(Extravert)을 가진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고 주장했다.

MBTI는 이런 분류를 기반으로 인간의 성격을 16개 타입으로 구분하고 유형별로 타고난 선호와 경향성에 관해 설명한다. 다시 말해 니체와 융이 과학자가 아니듯 MBTI도 과학이 아닌 게다. 최근 출간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MBTI>의 작가 임수현도 이 점을 강조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MBTI 표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MBTI 표지
ⓒ 디페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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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TI가 엄밀하고 객관적으로 개인의 성격을 진단하는 과학적 도구로서보다는, 스스로의 내면을 돌아보고 삶의 방향을 바로잡는 철학적 길잡이로서 가치를 더 크게 가질 수 있다."

MBTI를 현명하게 활용하는 방법

MBTI를 처음 만든 마이어스-브릭스 모녀는 '주변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서로를 파괴하지 않고 존중할 수 있는 수단을 찾도록 돕기 위해' MBTI 검사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즉, 인간 대 인간의 소통을 원활하게 만드는 수단인 게다. MBTI 검사 결과를 맹신하기보다 나와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참고만 하거나, 재미로 승화하는 건 어떨까. 임수현 작가처럼 말이다.

눈치챘겠지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MBTI>는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차용한 제목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가벼움'과 '무거움'이라는 개념적 이분법을 기반으로 인간의 삶과 존재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시도하는 작품이다.

임수현은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주인공 토마시를 이렇게 분석한다.

"그가 새로운 생활에서 좌절이나 자괴감보다 자유와 쾌감을 느끼는 것은 주기능인 강력한 외향직관(Ne)의 영향이다. 탐험 되지 않은 영역에 대한 호기심과 도전 의식이 ENTP를 움직이게 만드는 핵심 추동력이다. 또한 권위와 평판, 명예와 위신보다는 '지금 이 순간 내가 자유롭고 행복한가?'에 방점을 두는 개방적인 삶의 태도가 드러난다."

물론 나는 임수현의 말에 100% 동의하진 않는다. 하지만 나름대로 신선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작품을 읽고 느끼는 감정에 정답은 없다. 각자 해석을 존중하고 토론하는 과정이 소설을 읽는 또 다른 재미 아니겠나. 이처럼 MBTI도 재미로 즐기면 그뿐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MBTI>는 밀란 쿤데라 외에도 레프 톨스토이, 헤르만 헤세, 조지 오웰, 장 폴 사르트르, 마르셀 프루스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스탕달, 마트 트웨인 등 작가들의 대표작에서 총 32인의 등장인물을 선별해 MBTI 유형별로 분석을 곁들였다.

과학이라는 이름을 떼고 이런 재미있고 건설적인 MBTI 분석이 회자한다면, 얼마든지 환영이다.

"각 유형을 대표하는 캐릭터들이 어떠한 언어습관과 행태, 정서와 심리 상태를 드러내며 그것이 어떠한 결과를 야기하는가를 살펴봄으로써 타산지석(他山之石)의 깨달음은 물론 자아 성찰의 계기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임수현

태그:#고전, #MB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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