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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계시장길에 자리잡고 있는 어느 가게의 정겨운 간판
 안계시장길에 자리잡고 있는 어느 가게의 정겨운 간판
ⓒ 배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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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성사, 칼라 미용실, 한아름 패션 또는 영화 토탈 패션... 의성 안계시장길에 들어서자 차 두 대쯤 지나갈 정도일까요. 그리 넓지 않은 길을 사이에 두고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간판을 단 가게들이 양쪽으로 조르르 들어서 있습니다. 한적한 시골 정취 속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간판을 구경하며 천천히 걷다가 발걸음을 멈췄습니다.
 
의성 안계미술관
 의성 안계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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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길 어느 좁은 골목 안, 뜻밖에 미술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계 미술관이란 글자 아래 또 다른 글자, '안성 목욕탕'. 이곳은 과연 미술관일까요, 목욕탕일까요. 어쨌든 '전자 사우나, 기포탕, 목욕합니다'란 문구를 보자니 정겹고, 왠지 웃음도 납니다.

미술관으로 변신한 동네 목욕탕

그러니까 사실 이곳은 목욕탕이 아닙니다. 물론 과거에는 목욕탕이었지만, 지금은 미술관입니다. 예전부터 꼭 한 번쯤 와보고 싶었던 곳이어서, 안계 미술관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두근두근, 조금 설렜습니다. 창턱에 놓여 있는 작은 네온사인 간판 속 빨간 바탕에 하얀 글자 역시 마음에 쏙 듭니다. '목욕합니다'를 떠올리게 하는 위트 있는 다섯 글자, '예술합니다.' 그리고 그 맞은편의 여닫는 창문은, 아마도 예전에 목욕 요금을 내던 용도로 사용했을 거라 짐작됩니다.

미술관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작품보다 먼저 눈길을 사로잡은 건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공간, 그러니까 과거의 작은 목욕탕이었습니다. 온탕과 냉탕, 그리고 몇 개의 샤워기가 달려있던 흔적이 전부인 걸 보니, 이곳은 작은 시골 목욕탕이었던 것 같습니다.
 
안계 미술관 내부
 안계 미술관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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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주말이나 명절을 앞둔 날, 동네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쓱싹쓱싹 묵은 때를 밀었겠죠. 어느 누가 때를 밀러 왔는지, 모르려야 모를 수 없을 만큼 작은 공간입니다. 엄마 손에 이끌려온 어느 아이는, 씻으란 소리는 한 귀로 흘린 채 냉탕에서 첨벙첨벙 물장구를 치다, 그만 등짝을 맞고 결국 씻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혼자서 과거의 모습을 실컷 마음대로 상상하고 나니, 이제 현재의 공간을 돌아볼 마음의 준비가 됐습니다.

박정일 작가 사진전 '중첩된 공간들'

하늘색의 낡은 목욕탕 타일이며 바닥, 오래된 수납장이 그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는 걸 보니, 기존의 목욕탕 구조를 크게 해치지 않는 선에서 미술관으로 단정히 잘 꾸민 듯 보였습니다. 이곳에 작품들이 전시돼 있었습니다.
 
박정일 작가 사진전 '중첩된 공간들'
 박정일 작가 사진전 '중첩된 공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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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일 작가 사진전 '중첩된 공간들'
 박정일 작가 사진전 '중첩된 공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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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린 안계평야 위 경운기 바퀴 자국, 일상적인 시장길 풍경, 낡은 우편함의 모습, 그리고 공사 현장의 모습 등을 담은 사진들과 마주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실제로 '안계행복플랫폼' 공사 현장이 미술관 바로 근처에 있었습니다.

박정일 작가의 '중첩된 공간들'이란 전시였는데, 이번 전시는 지방 소멸의 위기에 진입한 경북 의성군 안계면을 기록한 것이라고 합니다. '안계행복플랫폼'이 뭔지 몰라 먼저 찾아봤습니다. 경북도와 의성군에서는 지방 소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일자리, 주거, 복지 체계가 두루 갖춰진 안계행복플랫폼 및 안계공공임대주택 건설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전통 시장의 현대화 사업 역시 이에 포함돼 있었는데요, 그래서인지 미술관에 오기 전 걸었던 시장길은 다소 한산했습니다. 잠깐 들렀던 안계 전통시장도 그랬고, 거리에 들어서 있던 가게들도 그랬습니다. 중간 중간 덩그러니 간판만 단 채 비어있는 곳들을 쉽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곳으로 옮겨갈 준비를 하는 걸까요.

그럼 아까 봤던 그 정겹던 간판들을 단 가게들은 사라지게 되는 건지 벌써부터 아쉬움이 몰려옵니다. 하지만 이건 평화로운 시골 풍경을 감상하며 하루 여행으로 잠깐 다녀가는 저 같은 관광객이나 하는 한가로운 소리일 겁니다. 사실 의성뿐만 아니라 근처의 청송, 영양, 봉화 등 경북 북부 지역은 저출산, 노령화 등 지방 소멸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니 말이죠.

과연 지방 소멸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미술관에 왔다가 엉뚱하게도 다소 어려운 문제를 잠시 고민하게 됐습니다. 고민해봤자 제가 해답을 알 리는 없지만, 답은 이 작은 미술관에 있는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목욕탕의 옛 모습을 보존하며 동시에 새롭게 리모델링한 안계미술관

지역의 목욕탕이었던 '안성탕'은 1981년부터 40여 년 간 활발히 운영되며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해왔지만 인구가 줄어들면서 결국 2019년에 영업을 종료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후 의성군의 지원으로 예술의성 프로젝트, 청년시범마을 일자리 사업 등에 참여한 청년 예술가들이 목욕탕을 문화예술 공간으로 바꿔갔다고 합니다.

또한 2022년에 목욕탕의 원형을 일부 보존한 형태로 리모델링을 해서 지금의 안계미술관으로 자리잡게 되었고요. 덕분에 문화예술 향유 기회가 부족했던 지역 주민들과 의성을 찾는 여행객들에게 다양한 문화예술작품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안계 미술관을 소개하는 글 중 일부는 이렇습니다. '40년 오랜 역사를 지닌 안성탕을 리모델링하여 대중 목욕 문화에 대한 개인의 기억과 함께 미술, 공예, 문화체험 등 색다른 경험을 선보입니다.' 옛 모습을 아예 지우기보단 가능한 범위에서 보존하되, 새로운 모습을 더하여 재탄생시키기. '함께'라는 말이 더욱 와 닿습니다.

과거와 현재를 이어 나가고 있는 안계 미술관이 새삼 대단하단 생각이 듭니다. 시정 일은 잘 모르지만 의성군이 청년 예술가와 지역민들에 대한 문화예술 지원을 앞으로도 아끼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도 생기고요.

궁금해지는 향후 안계 미술관의 모습

과거 안성 목욕탕이 그랬듯, 안계 미술관 역시 40년여의 또 다른 시간들 속에서 건재하기를, 그리고 그 이후의 시간들도 오래도록 잘 이어나가길 바라봅니다. 더불어 곧 완공된다는 '안계행복플랫폼'의 모습 역시 개인적으로 안계 미술관을 꼭 닮은 모습이라면 좋겠습니다. 안계시장길의 정겨운 옛 정취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새로운 모습이길.

훗날 이곳을 다시 찾을 이유가 생겼습니다.

덧붙이는 글 | 위 기사는 개인 블로그(https://blog.naver.com/tick11)에도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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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의성, #안계미술관, #안성목욕탕, #문화예술공간, #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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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여행하며 자주 글자를 적습니다. <그때, 거기, 당신>, <어쩜, 너야말로 꽃 같다> 란 책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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