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갠지스 강 인근 가트 변에서 복잡한 골목을 통과해 큰 길로 나옵니다. 버스를 탈 수도, 시간만 맞으면 기차를 탈 수도 있겠지만 이번에는 쉬운 방법을 택하기로 했습니다. 오토릭샤를 타고 바라나시 교외의 사르나트로 향합니다.

교통체증 속에서 오토릭샤는 거의 한 시간여를 달렸습니다. 사실 달린 시간보다는 서 있는 시간이 많았던 것 같기도 하고요. 아무튼 그렇게 사르나트에 도착합니다. 제 일정에서는 마지막 불교 성지순례입니다.

이미 이전 글에서 소개해 드렸던 것처럼, 인도와 네팔에는 불교의 4대 성지가 위치해 있습니다. 룸비니는 석가모니가 탄생한 곳이죠. 보드가야는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곳입니다. 이곳 사르나트는 석가모니가 처음 설법을 한 곳입니다. 쿠쉬나가르는 석가모니가 마지막으로 열반에 든 곳이죠.
 
사르나트 유적
 사르나트 유적
ⓒ Widerstand

관련사진보기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얻고 자신의 깨달음을 설법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석가모니는 사르나트로 향했습니다. 보드가야에서 함께 수행하던 다섯 명의 수행자들이 사르나트에 있었기 때문이죠. 이들은 석가모니가 고행을 멈추고 우유죽을 먹자 타락했다고 생각했고, 그를 떠나 사르나트에 와 있었습니다.

석가모니는 보드가야에서 걸어서 사르나트로 향합니다. 갠지스 강에서는 강을 건널 뱃삯을 낼 수 없자 날아서 강을 건넜다는 전설도 있죠. 처음에는 석가모니가 타락했다고 생각한 다섯 수행자는 그를 무시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저절로 일어나 석가모니를 모시고 설법을 들었습니다.
 
다섯 제자가 석가모니를 만난 곳에 세워진 영불탑
 다섯 제자가 석가모니를 만난 곳에 세워진 영불탑
ⓒ Widerstand

관련사진보기


석가모니는 사슴이 뛰노는 사르나트에서 첫 설법을 합니다. 그래서 이곳을 한자로 '녹야원(鹿野園)'이라 쓰기도 하죠. 석가모니는 집착으로 인해 고통이 만들어지고, 이 집착을 없애야만 깨달을 수 있다고 설법했습니다. 이 최초의 설법을 처음으로 법륜(法輪, Dharmachakra)을 돌렸다고 해 '초전법륜'이라 말합니다.

한국 불교에서는 여름과 겨울에 스님들이 하안거와 동안거에 들죠. 이 전통은 석가모니 당대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원래 당시의 출가 수행자들은 특별한 거처 없이 각지를 유랑했습니다. 그러다 이동이 어려운 우기가 되면 한 곳에서 몇 달 정도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것을 '우안거(雨安居, vassa)'라고 합니다.

처음 설법을 한 석가모니는 사르나트에서 우안거에 들어갔습니다. 그 사이 60명의 제자가 사르나트를 찾아왔다고 합니다. 안거가 끝난 뒤 이들이 각지로 흩어지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했죠. 어찌 생각하면 교단종교로서의 불교가 탄생한 땅이 바로 사르나트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사르나트 양식의 불상
 사르나트 양식의 불상
ⓒ Widerstand

관련사진보기


미술사의 입장에서도 사르나트는 중요한 땅입니다. 사르나트에서는 인도의 다른 지역과 다른 '사르나트 양식'의 불상이 등장했거든요. 옷주름 없이 매끈하고 얇은 재질의 옷을 입은 부처를 표현하는 양식입니다. 이런 양식의 불상은 해상 교역로를 타고 동남아시아로 전해지며 동남아시아의 불상 양식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사르나트 석주의 상단부를 장식한 동물 장식 역시 아주 유명하죠. 아쇼카 왕이 사르나트에 세웠다는 석주 위에 장식되어 있던 조각품입니다. 동서남북을 바라보고 네 마리의 사자가 있고, 그 위에 법륜이 올라가 있는 형태죠. 아쇼카 왕의 석주도, 그 위에 있던 동물 장식도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지만 사르나트에서 발견된 것이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금으로 재현한 사르나트 석주
 금으로 재현한 사르나트 석주
ⓒ Widerstand

관련사진보기


사르나트는 한때 불교 성지로 부흥했습니다. 하지만 인도에서는 12세기를 넘어서며 불교가 소멸하죠. 사르나트 역시 폐허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바라나시 교외의 작은 마을로만 남아 있죠.

하지만 사르나트에서 만들어진 불상은 살아남았습니다. 생명력을 갖고 각지에 확산됐죠. 후대에도 석가모니를 묘사한 불상은 처음 설법하는 순간을 묘사한 경우가 많습니다. '초전법륜인'이라 부르는 독특한 손 모양을 통해 확인할 수 있죠.

아쇼카 석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석주의 장식품과 법륜은 인도의 국장이 되었습니다. 인도 국기의 중앙에는 법륜의 모양이 그려져 있죠. 물론 법륜에는 꼭 불교적인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요.
 
초전법륜인
 초전법륜인
ⓒ Widerstand

관련사진보기


인도에서 불교는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불교가 가지고 있는 생명력을 생각하면, 그게 그리 중요한 사실은 아니었던 셈입니다. 그렇게 보면 불신자로서 성지를 순례하고 있지만, 내가 불신자인지 신앙인인지가 중요한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을 뒤늦게 했습니다.

불교 성지에서는 여러 국적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이 불교를 믿는 순례객일 수도 있겠지만, 아닐 수도 있겠죠. 외국인보다 훨씬 많았던 인도인들이, 모두 불교 신도라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들은 교외에 있는 일종의 역사유적을 찾아온 것 뿐이었을 테죠.

아니면 다른 종교의 순례객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불교의 성지는 남아시아 다른 종교의 성지와 겹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보드가야 인근에는 비슈누 신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는 힌두교 성지가 있습니다. 4대 성지는 아니지만, 8대 성지에 드는 라즈기르는 사실 불교 성지보다는 자이나교의 성지로 유명하죠. 사르나트 역시 자이나교의 성지입니다.

그렇게 보면 불교는 확실히 남아시아에서 만들어진 종교이기는 합니다. 같은 문화권을 공유하는 종교가 신성하게 여기는 곳은 비슷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당연한 사실이지만, 그것을 종종 잊습니다.
 
공사 중이던 사르나트의 사원
 공사 중이던 사르나트의 사원
ⓒ Widerstand

관련사진보기


성지를 순례했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이 종교에 신앙인으로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 종교가 어떤 땅에서 만들어졌고, 어떤 맥락에서 만들어졌는지였죠. 그리고 어떤 맥락 위에서 당대의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는지를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불교라는 사상이 갖는 현대적인 의미도 또 판별할 수 있을 테니까요.

저는 이러나 저러나 불신자입니다. 불교뿐 아니라 다른 어떤 종교를 갖고 있지도 않습니다. 전투적인 무신론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종교를 가질 수 있는 성격의 사람은 또 아닙니다. 불신자인 저는 당연히 성지에서 어떤 성스러움을 느끼거나, 종교적 체험을 하진 못했습니다.

오히려 제게 성지는 물성을 갖고 내 앞에 존재하는 유적과 땅을 확인하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들이 역사 속에 실재했던 현실적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들 역시 남아시아라는 문명, 인도 아대륙이라는 땅, 현실이라는 맥락 위에 존재했음을 상기하는 경험이었습니다.
 
사르나트 유적
 사르나트 유적
ⓒ Widerstand

관련사진보기


언급했듯 사르나트는 불교라는 종교가 탄생한 곳이라 말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여러 상징과 조형을 만들어낸 공간이기도 하지요. 그 강한 힘을 가진 가르침도, 바로 이 땅 위에 발붙이고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사르나트의 사원을 쌓아올렸던 한 장 한 장의 벽돌을 인상 깊게 기억합니다. 그 벽돌이 입체감을 갖고 제 눈 앞에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죠. 부처님의 가르침도, 사원을 쌓은 벽돌도, 현실에 존재하는 실체였습니다. 시간도 공간도 초월해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허울 뿐인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야 저는 물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역시 그들의 현실 위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것을 우리의 현실 위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부처님의 가르침이 여전히 가지고 있는 힘은 무엇이고, 이제는 잊혀져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불신자다운 생각을 하며, 사르나트의 푸른 잔디를 바라보고 한참을 앉아 있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에 동시 게재됩니다.


태그:#세계일주, #세계여행, #인도, #사르나트, #성지순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기록되지 않은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