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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는 상식과 원칙이 잘 통하지?"

교사가 아닌 한 친구가 아마 그럴 것이라는 기대를 담고서 물은 말이리라. 그렇다. 그러해야 한다. 학교에는 상식과 원칙이 강물처럼 흘러야 한다. 상식과 원칙이 흘러넘치지 않는 학교가 어찌 상식과 원칙을 지닌 학생들을 길러낸다는 말인가. 상식과 원칙을 지닌 학생들을 길러내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에 상식과 원칙이 작동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우리라.

친구의 기대대로, 학교는 상식과 원칙이 잘 통하는 공간인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너무나 많아, 안타깝다. 내가 근무했던 학교의 몇 가지 사례를 보자.

'공동연수'라는 게 있다. 대개 방학하는 날, 당일치기 또는 1박 2일 일정으로 어디론가 가서 회식도 하고 지난 일을 반성도 하고, 더 나은 학교를 만들기 위해서 앞으로 어떻게 할지도 이야기하는 그런 행사다. 예전엔 다른 건 대충 형식적으로 하고 회식에 집중했다. 요즈음은 연수라는 이름에 걸맞게 분임 토의도 하고 강사를 초빙해 강연을 듣기도 한다. 물론 회식도 한다.

공동연수를 추진하는 일반적인 과정은 다음과 같다. 업무 담당자가 연수 장소와 당일치기로 갈 건지 1박 2일로 갈 건지 투표에 붙인다. 결정이 되면, 웬만하면 다 간다.

이만하면 상식과 원칙이 통한 거 아니냐고? 공동연수를 반드시 실시하라는 어떤 규정이 없다면, 공동연수 실시 여부에 대한 학교 구성원들의 의견을 묻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실시 여부에 대한 찬반을 물어보는 학교는 거의 없다. 관행적으로 그냥 간다.

이런 상황에서 공동 연수 실시 여부에 대한 구성원들의 의견을 들어보자고 얘기하는 건 몹시 어렵다. 또 공동 연수가 결정되면 웬만하면 다 가는 상황도 상식과 원칙이 통하는 경우는 아닐 터이다. 가고 싶은 사람은 가고 가기 싫은 사람은 안 갈 수 있어야 할 텐데, 안 간다고 얘기하기가 쉽지 않다.

어떤 용감한 젊은 교사(3년 차 정도 된 분으로 기억한다)가 방학식에 맞춰 부모님과의 여행 일정을 잡았다. 원론적으로 공동 연수는 가고 싶은 사람만 가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 큰 문제 없으리라 생각했을 터이다. 그런데 공동 연수 담당 부장 교사가 젊은 그 교사를 불러, 평판이 좋지 않게 날 수도 있으니 신중하게 결정하라고 했단다.

그 교사는 부랴부랴 여행 일정을 취소했다고 한다. 또 학교장은 딱히 강제하지도 않았는데 대부분 교사가 연수에 참여한다고 싱글벙글했다고. 자신의 자유 의지로 공동 연수 참여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학교 현장 분위기가 만들어질 날은 과연 언제일까? 곧 정년을 맞는 나도 공동 연수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하려고 할 때, 제법 망설이곤 한다. 이런 상황에 씁쓸함을 느끼는 건 나뿐일까?

여러 학교에서 '연구학교'를 운영한다. 특정 주제에 대해 1년 또는 2년 동안 연구를 진행한 다음 결과 보고서를 만든다. 내가 근무한 학교에서는 '화재 예방 프로그램 구안∙적용을 통한 학교 소방의 생활화', '교과 교실 맞춤형 교수-학습 프로그램 운영을 통한 으뜸 실력 함양' 등을 주제로 연구학교를 운영한 적이 있다.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요즈음은 연구학교 운영 여부에 대한 구성원들의 찬반을 묻는다. 찬성이 80% 이상 나와야 연구학교를 운영할 수 있다고 한다. 한 사람 반대한다고 해서 연구학교 운영이 안 되는 건 아니니, 내 소신에 따라 반대했다. 담당 부장 교사가 득달같이 왔다. 찬성해 주면 안 되느냐고. 내가 반대하면 연구학교를 운영할 수 없냐고 했다. 그렇지는 않지만 다 찬성해 주면 모양새가 좋지 않겠냔다. 끝까지 내 생각대로 반대하면 이상한 사람 되기 십상이다. 속절없이 찬성해 주었다.

이만하면 상식과 원칙이 통한 거 아니냐고? 뭐, 그럴 수도 있겠다. 구성원들의 동의를 묻는 쪽으로 진일보했다고 할 수 있겠다.

문제는 다음부터다. 연구학교 운영은 담당자 몇몇만의, '그들만의 리그'다. 뭘 하는지 잘 알 수가 없다. 담당 부서 이외의 사람들은 알려고 하지도 않고 담당 부서에서 구체적으로 알려주지도 않는다. 아, 이건 내 잘못일 수도 있다. 담당 부서에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주었는데 내가 무시했을지도 모르겠다.

분명히 기억이 나는 건, 가끔 이러저러한 자료를 제출해 달라는 메시지가 문득 오기는 온다는 정도다. 그러면 영혼은 쏙 빼고 대충 요구 사항에 맞춰 자료를 보낸다. 그런데 어떻게 했는지는 알 도리는 없으나, 입이 쩍 벌어지도록 멋들어진 연구학교 운영 결과가 산출된다. 연구학교를 거치기만 하면, 그 학교 학생들의 인성은 거의 날개 없는 천사 수준으로 높아진다. 맞춤형 교수-학습 프로그램을 운영한 연구학교의 학생들의 학력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다. 그 수많은 연구학교들의 연구 결과 대로라면 우리나라 교육 현실이 이럴 리가 없을 거라는 말을 교사들은 종종 우스개 삼아 한다.

자신이 속한 조직의 경우와 견주어 보면, 저 정도는 양반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학교라는 조직에는 상식과 원칙이 강물처럼 흘러넘쳐야 한다.

우리나라의 다른 조직들이 설령 편법적인 방식으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학교만은 철저하게 상식과 원칙에 바탕하여 작동되어야 한다. 학교에서마저 상식과 원칙이 통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는 불 보듯 뻔하다.

하지만 학교 현실은 녹록지 않다. 다양한 이유로 상식과 원칙이 가볍게 무시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이런 상황을 바로 눈앞에서 보면서도 적극적으로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모난 돌이 되어 정 맞기 싫었던 것이다.

퇴임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에서야 후회가 밀려온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생각이 있는 후배 교사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흥분하지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조근조근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후배 교사들이 늘어나고 있다. 좋은 징조이다. 희망적인 신호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응원한다. 그리고 기원한다. 상식과 원칙이 학교에 강같이 흘러넘치기를.

태그:#학교, #상식,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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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넘게 교사로 재직 중. 2년을 제외하고 고등학교에서 근무. 교사들이 수업에만 전념할 수 있는 학교 분위기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이 있음. 과연 그런 날이 올 수 있을지 몹시 궁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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