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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비엥에서 넓은 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는 버스는 한 시간 만에 비엔티안에 도착합니다. 라오스에 들어온 지 약 일주일 만에 라오스의 수도에 도착했습니다.

비엔티안은 라오스의 수도이지만 그 입지는 독특합니다. 지도를 보시면 바로 눈치채실 수 있겠지만, 비엔티안은 태국과 접경하고 있는 국경 도시입니다. 수도가 이렇게까지 국경에 가까운 경우는 흔치 않죠. 메콩강을 넘으면 곧바로 태국의 농카이입니다. 비엔티안 시내에서는 태국 통신사의 신호도 간간이 잡힙니다.

라오스를 식민지로 삼은 프랑스
 
메콩강 너머로 보이는 태국 영토
 메콩강 너머로 보이는 태국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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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콩강을 끼고 국경에 위치한 도시인 만큼, 비엔티안의 역사에서 태국은 빼놓을 수 없는 변수였습니다. 라오스인이 처음 루앙프라방을 중심으로 란쌍(Lan Xang) 왕국을 세웠을 때부터 비엔티안은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태국과의 교역 혹은 분쟁의 최전선에 있었으니까요.

란쌍 왕국은 버마의 침략을 피해 수도를 비엔티안으로 옮겼습니다. 란쌍 왕국이 계승 분쟁으로 분열한 뒤에는 비엔티안 왕국이 세워졌죠. 하지만 태국과 가까운 지리적 위치는 안보상의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비엔티안 왕국은 태국의 속국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비엔티안의 운명을 결정한 것은 1826년에 벌어졌던 아누웡 왕의 반란이었습니다. 지난 글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비엔티안 왕국의 아누웡 왕은 라오스에 대한 태국의 간섭과 탄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물론 아누웡 왕의 아들이 강제노역에 차출되어 폭행당한 사건도 직접적인 계기가 되기도 했죠.

그러나 태국은 이미 영국과 조약을 체결하고 서양식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아누웡 왕의 반란은 결국 실패했습니다. 태국은 비엔티안을 정복하고 철저하게 파괴했죠. 수십년 뒤 프랑스인 선교사들이 비엔티안에 도달했을 때에는 정글 속에 묻힌 도시의 흔적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메콩강 너머를 바라보고 있는 아누웡 동상
 메콩강 너머를 바라보고 있는 아누웡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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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이게도 이렇게 완전히 파괴된 비엔티안을 다시 일으킨 것은 식민 지배자인 프랑스였습니다. 1893년 프랑스는 태국과 전쟁을 벌여 라오스에 대한 종주권을 확보했습니다. 이름 뿐인 라오스의 국왕은 루앙프라방에 남아 있었지만, 프랑스는 비엔티안을 식민지의 수도로 결정했습니다. 파괴되었기는 했지만 과거의 수도였고, 국경에 접해 있지만 남북으로 봤을 때는 가운데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었죠.

그렇게 폐허 뿐이었던 비엔티안은 다시 재건되었습니다. 도로가 만들어지고 사원이 다시 세워졌죠. 총독의 관저를 비롯한 유럽식 건축도 시내에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비엔티안은 곧 라오스 최대의 도시를 명성을 되찾았습니다.

물론 식민주의는 언제나 폭력을 수반했습니다. 사실 프랑스가 라오스를 식민지화 한 것은 라오스 영토 자체에 관심이 있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는 베트남을 지배할 때에도 남부 메콩강이나 북부 홍강을 통해 중국에 접근할 계획을 갖고 있었죠. 이를 위해 메콩강이 흐르는 캄보디아와 라오스 지역이 필요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메콩강과 홍강의 상류까지 거대한 무역선이 오가기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이후 프랑스는 강보다는 바다를 이용하는 해안 무역기지 건설에 집중하게 되죠. 그리고 라오스와 캄보디아는 이 해안 무역기지를 보호하기 위한 완충 지대로서 기능하게 됩니다. 프랑스에게는 그것이 이 두 국가의 존재 이유였습니다.
 
비엔티안 황금사원 인근의 풍경
 비엔티안 황금사원 인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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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에게 프랑스의 식민지배는 또다른 수탈의 연속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경제의 성장이나 근대의 수입은 결코 수반되지 않았습니다. 특히나 내륙국인 라오스는, 역사상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수출액 가운데 1% 이상을 차지한 역사가 없습니다. 1940년대까지 라오스에 거주하는 프랑스인은 600여 명에 불과했습니다.

직접 거주하는 프랑스인이 극소수인 상태에서, 프랑스는 베트남인을 이용해 라오스를 간접 지배하기도 했습니다. 상당수의 베트남인이 라오스로 이주했고, 중간 관리직을 담당하며 라오스 경제의 상층부를 장악하기도 했습니다.

단순히 이민자의 증가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라오스는 이미 태국의 지배를 거치며 상당수의 라오스인이 강제 이주당해 인구가 크게 줄어있는 상황이었죠. 여기에 베트남인이 대규모로 이주하며 비엔티안 인구 가운데 절반 이상을 베트남인이 차지했습니다. 타케크를 비롯한 일부 도시에서는 인구 80% 이상이 베트남인으로 채워지기도 했습니다. 라오스에게 프랑스의 지배는 베트남인의 얼굴을 하고 찾아온 셈입니다.
 
라오스 독립기념문
 라오스 독립기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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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시기 짧게 일본의 지배와 전후 혼란기를 겪은 라오스는 1946년 8월, 프랑스 연맹 산하의 반독립국이 되었습니다. 점차 자치권을 확대하던 라오스가 완전히 독립국가가 된 것은 1953년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는 라오스를 비롯한 인도차이나 전역의 이권을 완전히 포기하고 철수하죠.

라오스는 1955년 처음 총선을 치렀고, 각 세력 사이의 연합정부가 수립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신생 독립국가의 다양한 정치세력이 함께 정부를 세우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죠. 라오스의 정치는 한동안 연합과 쿠데타, 내각 붕괴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 라오스의 공산주의 세력, '파테트 라오'의 힘은 점차 거세졌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2차 인도차이나 전쟁, 곧 베트남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역시 지난번 언급한 것처럼 라오스는 전쟁의 당사국이 아님에도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폭격을 받았습니다. 이 당시 발생한 불발탄은 지금까지도 라오스 국토 개발의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당시 미국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소수민족에 대한 탄압도 벌어졌죠.

결국 베트남 전쟁이 북베트남의 승리로 끝나가던 시기, 라오스에도 공산주의의 승리가 분명해졌습니다. 사이공이 함락되고 4개월 뒤인 1975년 8월, 파테트 라오도 비엔티안에 입성했습니다.

라오스 왕국은 그렇게 무너졌고, 라오스 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 수립되었습니다. 당시 파테트 라오를 이끌던 수반으로, 라오스 인민민주주의공화국의 초대 주석이 되는 수파누웡 본인이 라오스 왕국의 왕족이었다는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지요.

비엔티안에서 버스를 타고 태국 농카이로
 
라오스 주석궁
 라오스 주석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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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그렇게 수립된 라오스 인민민주주의공화국은 비엔티안을 수도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뒤로 여러 개혁과 개방을 거치며 사회주의 국가로서의 색채는 많이 옅어졌지만 말이죠.

라오스의 현대사는 주변국과 끝없는 충돌의 연속이었습니다. 내륙국의 숙명이라고 해야 할까요. 태국의 지배로 도시는 파괴되었고,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았고, 또 그 사이를 베트남이 밀고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라오스의 수도는 태국과 접경하고 있는 비엔티안입니다. 라오스는 최근 중국의 막대한 투자를 받고 있지만, 여전히 라오스가 가장 많이 교역하는 국가는 태국입니다. UN 세관통계 자료를 보면, 태국과의 교역량은 2위인 중국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많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라오스는 라오어와 함께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지정하고 있습니다. 일상생활에 프랑스어를 활용하는 경우는 없다지만, 관공서의 표지판은 라오어와 프랑스어가 늘 병기되어 있습니다. 라오스는 프랑코포니 회원국이기도 하죠.

베트남과도 썩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까지도 공산주의 정당이 집권하고 있는 베트남과 라오스는 동남아시아 정치에서 중요한 파트너이고 협력국입니다. 파테트 라오의 집권 자체가 베트남의 도움을 크게 받은 면이 있었죠. 덕분에 베트남군은 한동안 라오스에 진주하면서 라오스의 정치와 경제 전반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런 결말도, 내륙국의 숙명이라면 숙명일까요.
 
농카이에서 메콩강 너머를 바라보고 있는 불상
 농카이에서 메콩강 너머를 바라보고 있는 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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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의 국가주석이 기거하는 주석궁 뒤, 메콩강을 끼고 있는 작은 공원에는 아누웡 왕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칼 한 자루를 손에 들고, 손을 뻗어 강 너머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 넓지 않은 강을 넘어 보이는 태국의 영토를요.

비엔티안에서 버스를 타고 태국의 농카이로 넘어오며, 저는 짧은 라오스 여행을 마쳤습니다. 강 하나를 건넜을 뿐인데 많은 것이 달라집니다. 우측통행을 하던 차선은 좌측통행으로 바뀌고, 돈도 언어도 바뀝니다.

농카이에도 강 너머를 바라보고 있는 거대한 장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 설치된 것은 장군이나 국왕의 동상이 아닌 불상입니다. 높은 사원의 지붕에 앉아 평화로이 강 너머의 비엔티안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지요.

비엔티안을 향한 불상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도 강 하나를 넘으면 쉽게 변할 수 있는 것일까요. 다섯 나라와 땅으로만 국경을 접한 라오스의 역사가 알면 알수록 역설과 난제로 가득했던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에 동시 게재됩니다.


태그:#세계일주, #세계여행, #라오스, #비엔티안, #국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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