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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50년이니 꽤 많은 세월이 흘렀다. 어느새 세월은 거침없이 지났고 머리칼은 허연 것이 몇 개만 남고 말았다.

오래 전의 고등학교 친구들, 시간이 날 때마다 어울려 축구를 했다. 종소리를 아쉬워 하며 웃통을 벗고 수돗가로 달려갔다. 몸을 씻고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물을 마시기 위해서다. 내장까지 시원함에 온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세월이었다.

세월은 어기적거렸어도 어느새 반세기를 옮겨놓고 말았으니 어쩌란 말인가? 친구들과 어울려 아직도 술잔을 주고받는다. 새해도 되었으니 한 잔해야 할 것 아닌가? 서울로 자리를 정하고 만나기로 했다. 지방에서 오는 친구들을 위해 만나는 장소는 언제나 터미털 부근이다. 

쉽지 않게 휴대폰으로 예약을 하고 고속버스를 타러 갔다. 언젠가 정류소에 들어서니 표를 끊는 기계가 앞을 막아섰다. 매표소가 있지만 언젠가는 해야 할 일, 용감하게 기계 앞에 섰다. 젊은이가 순식간에 표를 끊고 자리를 내준다. 뒤엔 젊은이가 서 있어 불안하다.

바쁜 와중에 버벅거리면 미안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창피한 생각에서다. 순서를 양보할까 아니면 물어볼까 하다 용기를 냈다. 안내에 따라 해결은 했지만 손놀림은 젊은이만큼 어림도 없다.

할 수 없이 이번엔 핸드폰에 앱을 받아 표를 예약하는 위업(?)을 달성한 것이다. 우중충한 날씨에 비까지 추적거린다. 차를 터미널 주차장에 넣고 찾아간 터미널에 타야 할 버스는 보이지 않는다. 

대합실에 들어서자 사람들은 많지만 조용하다. 마스크를 쓰고 휴대폰에 눈이 멎어있다. 누구의 발걸음도 관심이 없고 오로지 정적만이 가득한 대합실이다. 잠시 후 타야 할 고속버스가 보인다. 자랑스럽게 예약 화면을 찾아 버스에 올랐다.
 
오래전 네팔, 카트만두에서 포카라로 탔던 버스. 너무나  힘겨웠던 기억이 가득한 버스임.
▲ 힘겨운 버스 오래전 네팔, 카트만두에서 포카라로 탔던 버스. 너무나 힘겨웠던 기억이 가득한 버스임.
ⓒ 박희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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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 마련된 단말기에 큐알코드를 대니 딩동 소리와 함께 몇 번 자리라는 음이 들린다. 보무도 당당하게(?) 차리를 찾아 앉았다. 자리는 거의 찼지만 여기도 사람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휴대폰으로 무엇인가 검색을 하며 눈이 멎어 있다.

기사 위쪽 모니터엔 어느 좌석이 체크되었는지 표시가 된다. 좌석이 다 채워지고 시간이 되자 버스는 출발했다. 차량이 출발하기까지 한 마디의 사람 소리도 듣지 못했다. 오로지 기계음만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고요를 깬 건 운전기사 뿐이었다. 좌석에 앉은 사람 좌석표를 확인하고, 안전벨트를 맬 것을 부탁했다. 버스가 도착할 때까지 주의 사항을 안내하고 출발함을 알려주었다. 가끔, 입구에선 남은 자리가 없는지 대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모두가 온데간데없이 모든 것이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자칫 머뭇거리다간 버스도 탈 수 없는 세월이 되었다. 은퇴를 하고 시내버스를 처음 타던 날의 기억이다. 앞사람을 보며 눈치껏 처신했지만, 카드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허둥거렸다. 결국 버스를 잘못 타서 먼 곳에서 내렸고, 택시를 타야 하는 수모를 당했지만 아직도 아내에겐 비밀인 사실이다. 

고속도로 입구에서 표를 내주던 사람도 없다. 버스가 휙 지나가면 체크인이 되었다는 음이 들린다. 버스는 휑하니 고속도로로 줄달음치고 만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가끔 모니터에 궁금한 사항을 알려준다. 도착지까지 남은 거리와 시간이 영어와 한글로 동시에 나오는 화면이다.

기사가 버튼 하나로 모든 것을 해결해 주니 말을 할 필요가 없다. 모두는 잠을 자거나 휴대폰과 놀고 있다. 지금까지도 사람이 말하는 소리는 한 마디 없고, 가끔 가늘게 코 고는 소리만 들린다. 도착지에 도착하자 문이 열리고 승객들은 짐을 챙겨 내린다. 기사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남길 여유도 없다. 

기사가 문만 열고 보이지 않음은 트렁크 문을 열어야 해서다. 기사는 무심코 문을 열어주고, 손님들은 표정 없이 짐을 꺼낸다. 오래전에 들었던 수고 하셨다는 말도 없다. 무엇이 바쁜지 서둘러 각자 목적지로 향하는 모습이 낯설기만 하다. 오랜만에 외출이어서 그런가 보다.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먹던 물은 사서 마셔야 한다. 주머니에 있던 돈이 이 주머니에서 저 주머니로 소리없이 돌고 도는 세상이다. 삶의 모습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자칫 머뭇거리다간 버스도 탈 수 없다. 음료수 하나를 먹고 싶어도,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싶어도 쉽지 않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아야 하는 세월을 실감하지만, 오래 전의 기억은 아직도 남아있어 추억 속을 서성거렸다. 늙어가는 청춘의 서울 나들이는 왠지 낯설기만 했다.

태그:#세월, #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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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무렵의 늙어가는 청춘, 준비없는 은퇴 후에 전원에서 취미생활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면서, 가끔 색소폰연주와 수채화를 그리며 다양한 운동으로 몸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세월따라 몸은 늙어가지만 마음은 아직 청춘이고 싶어 '늙어가는 청춘'의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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