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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긴 시간 방황하는 중이다.

뒤늦게 다시 역사 공부를 하겠다며, 잘 다니던 직장을 관두고 대학원에 진학했더랬다. 그렇게 2년 반의 석사과정 동안 치열하게 공부했고 열심히 논문을 썼다.

그 결과 석사라는 타이틀은 얻었지만, 다시 고민이 시작됐다. 박사과정 진학이냐 취업이냐의 갈림길에 서게 된 것이다.

먼 길 돌아 다시 시작한 공부인 만큼 끝까지 한번 가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과연 내가 공부를 계속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고, 무엇보다 등록금 마련이나 생계유지와 같은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쉬이 선택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중이다.

충동적으로 구입한 <난중일기>

나이 서른둘에 다시 한번 마주한 일생일대의 갈림길 앞에서, 충동적으로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구입했다. 7년이라는 기나긴 시간 전쟁을 치르며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을 이순신의 일기를 통해 무언가 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공교롭게도 <난중일기>를 구입한 직후, 한산해전을 다룬 영화 <한산: 용의 출현>이 개봉했다. 개봉 당일 영화를 보고 나오자마자 바로 <난중일기>부터 펼쳐 들었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던 영화의 감동이 사그라들기 전에, 얼른 이순신의 삶에 스며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구입한 <난중일기> 교주본(校註本)은 한문 초서(草書)의 대가인 노승석 선생이 새로이 교감(校勘: 다른 책들과 대조하여 진위를 고증하는 것)하고 주해(註解: 본문의 뜻을 알기 쉽게 풀이한 것)를 달아 낸 책으로, 지금까지 나온 <난중일기> 중 가장 완벽하게 해독한 버전이라 한다. 앞에는 해석본이, 뒤에는 탈초된 원문이 실려있다.
 
필사용 텍스트로 삼은 '신완역 <난중일기> 교주본'
 필사용 텍스트로 삼은 "신완역 <난중일기> 교주본"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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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난중일기>를 처음 읽는 것은 아니었다. 한글 번역본은 여러 번 읽었다. 그러나 한문으로 된 원문을 직접 손으로 베껴쓰며 읽으면 좀 더 깊이 있는 독서가 되지 않을까 싶어 이번엔 필사(筆寫)를 한 번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바로 노트 한 권을 꺼내 볼펜으로 한 줄 한 줄 필사를 시작했다. 필사를 하다 보니 점점 욕심이 생겼다. 좀 더 고풍스러운 글씨를 연출하고 싶어서 인근 문구점에 가서 '붓펜'까지 구입했다.
 
필사용 '붓펜'. 붓펜으로 한문 필사를 하면 좀 더 고풍스러운 필사가 가능하다.
 필사용 "붓펜". 붓펜으로 한문 필사를 하면 좀 더 고풍스러운 필사가 가능하다.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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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할까' 반신반의했지만

'내가 언제까지 이걸 할 수 있을까'

처음 필사를 시작할 때만 해도 내가 과연 <난중일기> 필사를 언제까지 이어갈 수 있을지 반신반의했다. 그도 그럴 것이 군 시절 야심 차게 시작했던 <백범일지> 필사도 흐지부지 끝내고 말았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필사를 하는 동안 며칠씩 길게 쉴 때도 있었다. 그러나 마감 기한이 있는 과제가 아니기에, 그냥 쓰고 싶을 때 쓰자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유독 마음이 우울할 때, 무언가 큰 결정을 앞두고 있을 때 혹은 혼술이라도 한 잔 하고 나서 기분이 센치해졌을 때 한 구절, 두 구절씩 쓰다 보니 어느새 임진년(1592년) 1~3월 치 일기를 모두 옮기고 임진왜란 발발 직후까지 왔다. 필사를 시작한 지 두 달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작심삼일로 끝나지는 않고 계속 이어 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스스로에게도 놀라고 있다.
 
붓펜으로 옮겨 적은 <난중일기>
 붓펜으로 옮겨 적은 <난중일기>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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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량이나 시간 등에 대해 따로 정해둔 원칙 같은 건 없다. 그날 기분에 따라 쓰고 싶은 만큼 쓴다. 하루치만 쓸 때도, 며칠 치를 몽땅 옮겨 적을 때도 있다. 다만 필사 과정만큼은 아래와 같은 루틴으로 진행하고 있다.

1. 원문을 먼저 읽는다.
2. 해석본을 보고 제대로 읽었는지 확인한다.
3. 모르는 한자를 메모지 등에 따로 옮겨 적는다.
4. 해당 구절을 필사용 노트에 필사한다.
5. 따로 옮겨 놓았던 한자를 10번씩 베끼며 외운다.


번역본을 읽을 때와는 달리 한문 구절구절을 좀 더 깊이 있게 읽다 보니 숙독(熟讀)이 이뤄진다. 무엇보다 한문 공부에 정말 좋다. 생소한 한자를 익히는 재미가 있고 반복해서 읽다 보니 한문 문장 구조도 점점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처음엔 간단한 문장 하나 옮기는 것도 쉽지 않았다. 모르는 한자가 너무 많아서 일일이 검색하느라 시간도 많이 걸렸고, 한자들을 베끼며 암기하느라 진도를 많이 빼지 못했다.

그러나 두 달가량을 꾸준히 하다 보니 이제는 간단한 구절 정도는 조금씩 읽히기 시작한다. 한문이 읽힐 때의 뿌듯함이 필사의 즐거움을 더해준다.
 
필사를 하며 몰랐던 한자들은 따로 메모지에 옮겨 적은 뒤 여러 번 반복해서 베껴쓰며 암기한다.
 필사를 하며 몰랐던 한자들은 따로 메모지에 옮겨 적은 뒤 여러 번 반복해서 베껴쓰며 암기한다.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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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를 통해 마주한 인간 이순신

<난중일기> 속에는 오로지 나랏일밖에 모르는 우직한 장수가 한 명 있을 뿐이다. 적에 대한 방비가 소홀한 부하 장수에게는 가차 없이 형벌을 가하는 엄격한 모습을 보이지만, 반대로 유능하고 성실한 장수와는 만취할 때까지 더불어 술을 마시는 덕장(德將)의 모습도 엿보인다.

필사를 하다 보면 인간 이순신의 다양한 감정이 내게도 고스란히 전달된다. 멀리 고향에 계신 어머니가 편안하다는 소식을 듣고 남긴 '多幸多幸(다행다행: 참으로 다행이다)'이라는 구절에서는 어머니를 생각하는 아들의 지극한 마음이, 임진왜란 발발 직후 부산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접한 뒤 남긴 '不勝憤惋(불승분완: 분하고 원통함을 이기지 못했다)'이라는 구절에서는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는 장수의 마음이 느껴진다.

취미로 활쏘기(국궁)를 즐기는 활량의 입장에서 활쏘기 관련 구절 역시 주의 깊게 살펴보는 중이다. <난중일기>에는 활쏘기와 관련된 기록이 거의 매일 같이 등장한다. 활쏘기와 관련해서는 '出東軒公事後射帿(출동헌공사후사후: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뒤에 활을 냈다)'라는 구절이 자주 등장한다. 전란이 터진 직후에도 어김없이 이순신은 사대에 섰다. 왜적의 침략으로 분하고 원통한 마음을, 이순신은 활을 쏘면서 달랜 것이다.

나의 새로운 버킷리스트

<난중일기> 필사는 내게 있어 일종의 '힐링' 방법이다. 심사가 복잡할 때마다 <난중일기>를 베끼다 보면 마음이 많이 편안해진다.

한편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오직 나라만을 생각했던 이순신 장군을 보면서 불망초심(不忘初心: 초심을 잊지 말자)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러면서 내가 걸어가야 할 길도 점점 명확해지는 느낌이었다.

<난중일기> 필사를 마무리하는 것은 이제 나의 버킷리스트이기도 하다. 우선은 탈초된 버전을 한 번 다 옮기는 것을 1차 목표로 삼고 있다. 그다음 목표는 초서로 된 원문을 필사하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붓끝에서 나온 실제 글씨체를 따라 베껴봄으로써 장군의 숨결을, 마음을 좀 더 진하게 느껴보고 싶은 까닭이다.

각자의 일상에서 지치고 힘들 때, 마음을 울리는 책 속의 문장을 필사해보는 것도 좋은 힐링 방법이라 생각된다. 특히나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극복하고는 싶은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고민하고 방황하는 이들이 있다면 <난중일기>를 한 번 필사해보라 권하고 싶다. 어쩌면 이순신 장군이 <난중일기> 속에서 걸어 나와 그대에게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북돋워 줄지도 모를 일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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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석사 졸업(한국근대사) / 형의권·팔괘장·활쏘기(국궁) 수련 / 好武善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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