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018년부터 약 4년 동안 물밑에서 조용히 진행되던 사업이 2022년 8월 말, 드디어 물 위로 떠 올랐다. 하동에서 남해까지 약 10킬로미터 이상 이어지는 15만 4천 볼트 고압 송전선과 송전탑 건설 사업이다.

사업을 담당하고 있는 건 오래전에 주식회사가 된 한국전력 산하 남부건설본부다. 일종의 공기업인데, 한편으로는 공공성을 추구하지만 다른 편으로는 수익성을 추구한다. 조직의 목적 자체가 모순적이다. 게다가 2050 탄소제로 또는 기후위기라는 절박한 시점에, 하동화력발전소가 석탄이나 가스로 화석연료 발전을 지속한다는 자체가 시대착오적이다.

그런데 하동~남해 구간은 이미 1985년경부터 154kV 고압 송전선로가 지나가고 있다. 당시 생업에 바쁜 주민들은 그저 "국가가 하는 사업이니 협조하는 게 좋지 않으냐"는 마음으로 동의해 주었다고 한다. 그 뒤 인근 주민들이나 농민들은 송전선로나 송전탑으로 말미암아 전자파, 소음, 경관 저해 등에 시달렸고, 최근엔 드론을 활용한 방제 작업에도 방해를 받는다. 게다가 송전선 인근의 땅이나 집을 팔려고 해도 잘 안 나간다. 그런 상황에서 또다시 154kV 고압 송전선로를 복선처럼 만든다니 기가 막힐 일이다.

지난 8월 31일의 주민설명회에서 주민 A가 물었다. "도대체 이 사업의 목적이 무엇인가요? 혹시 남해군에 인구가 폭증하거나 전력 수요가 폭등했다는 증거 자료가 있나요?" 공식 문서엔 그 목적이 "남해 변전소 전력 계통망 보강 및 하동군 일부 지역 안정적 전력공급"으로 돼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하동이나 남해에서 전기가 부족하다거나 부족 예정이란 얘기는 없었다.

흥미롭게도 위 사업은 최초로 "주민주도형 입지선정"을 한다고 했다. 하지만 2018년에 처음 입안된 위 사업은 2020년 8월부터 2022년 8월까지 모두 6차례의 '입지선정위원회' 회의를 했으나 꼬박 2년 동안 실제 마을 주민들은 이를 잘 몰랐다고 한다. 입지선정위원회에는 17명이 참여했는데, 마을 이장과 금남면 이장협의회장, 금남면발전협의회장, 대한노인회 금남면분회장, 하동군 관계공무원 등이 포함돼 있다고 알려졌다. 

만일 6차례의 회의가 명실상부 "주민주도형"이었다면, 위원회 구성 처음부터 각 마을마다 주민 총회를 열어 위 사업 내용 전반에 대한 상세 설명과 함께 주민들을 대표하여 이장을 입지선정위원회에 추대한다는 회의록과 위임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번 사업 진행 과정에서는 이 중요한 절차가 생략돼 있었다. 

일반 주민들은 송전선로에 관해 제대로 된 내용을 모르는 상태인데, 이장들만 6차례 입지선정위원회 회의에 참여했을 뿐, 회의 결과나 토의 안건을 마을총회에서 공개적으로 논의한 사실이 없다고 한다. 중대한 절차상의 하자다.

그렇다면 8월 31일의 주민설명회는 전체 사업 과정에서 무슨 의미를 띠는가? 아마도 사업 주체는 그간 이장이 논의에 참여했으니 "주민주도형"이라며, 주민들이 동의하리라 기대했을 터다. 즉, 요식 행위로 열리는 주민설명회는 위 사업의 거의 마지막 단계를 뜻한 거라고 본다. 그러나 주민들 입장에서는 지금에야 사업의 전모를 알게 되었으니 이제 시작일 뿐이다. 그러니 "주민주도형 입지선정"이란 말 자체가 기만이다. 진정으로 "주민주도형 입지선정" 사업을 한다면, 그것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것이 하동군 금남면 대리치 주민들의 견해다.

154kV 송전선로 사업은 인근 피해자들에게 개별 보상하는 송주법(송전‧변전 설비 주변 지역에 대한 보상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의 대상도 아니기에 만일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마을 차원에 특별지원금까지 나올 수 있다. 이미 10여 년 전 밀양에서 낱낱이 드러났듯, 주민의 생활이나 생업에 지장을 주는 송전탑 사업을 비밀리에 진행하는 건 부적절하고 불가능하다. 또한, 이게 어디 돈 몇 푼으로 보상이 될 일인가? 

그래서 송전선로 시행사 측 설명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을 주민들의 질문이나 비판이 쏟아졌다. "도대체 1안인지 2안인지 저 송전선로들은 누가 무슨 근거로 그은 겁니까?", "한전 측이 용역사에게 준 사업 계획서를 공개하시오", "현재 있는 송전선도 흉물이라 모두 뽑아버리면 좋겠는데, 그것도 모자라 또 하나 더 설치한다니 말이나 되느냐?", "주민들 모르게 회의를 6차례나 해놓고 이제야 설명회를 하고서는 곧 설계측량을 한다니, 이건 일의 순서가 완전히 거꾸로 된 것이다", "주민들 말을 듣고 책임성 있는 답을 할 수 있는 본부장급 사람이 나와야지 책임도 질 수 없는 하급 직원이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은 주민을 아주 무시하는 처사다", "정말 터무니없는 주민설명회이니 모두들 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냥 나가버립시다"...

이 말에 주민 B씨가 나섰다. 그는 우연히 송전탑 사업에 대한 얘기를 듣고서는 위 사업의 실체를 파악한 뒤에 대안까지 제시했다. 그가 제시한 제1의 대안은 해저 케이블이다. 그는 이미 LG전선이 지난 4월부터 전남 완도~제주에 해저 케이블 공사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가 제시한 제2의 대안은 마을 너머로 선로를 돌리는 것이다. 현재 한전 남부건설 측이 제안한 선로보다 비용이 더 들더라도 주민들에게 전자파 우려나 재산권 침해, 나아가 자연경관 저해 등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 차선책이란 주장이다. 아예 사업 자체를 없었던 걸로 하는 게 가장 좋지만, 굳이 해야 한다면 이런 대안들을 검토하라는 얘기였다. 현재까지 대치리 주민들 100여 명이 송전탑 반대 및 경로 변경 요구에 연대 서명했다.

이어 주민 C씨는 "회사 측이 설명한 주민주도형 입지선정이란 처음부터 허구적인 것이기에, 우리는 이 주민설명회가 무효라 본다"고 설명회 무효화를 주장하기도 했다. 또 다른 주민 D씨는 미리 준비한 기자회견문을 낭독했다.

"오늘 한전 남부건설의 설명회는 며칠 전까지 아무도 몰랐던 청천벽력 같은 일입니다. 하동군이나 금남면 우리 마을 모두가 가장 염려하는 자연 훼손, 인구소멸지역으로 전락, 마을주민의 생존권과 재산가치 하락 등 심각한 문제를 가져올 이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고 다음과 같이 전면 재검토를 요구합니다."

기자회견문은 주민 B씨의 제안처럼 최단거리 해저 케이블 또는 비거주지역으로의 선로 변경을 요구하는 내용으로 이어졌다. 이 모든 과정은 대치리 주민들 대다수가 모인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진행되었다. 기자회견 끝에는 "송전탑 결사 반대" "송전선로 사업 전면 재검토"를 외치는 주민들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이 기자회견에는 <경남도민일보>, <오!하동 신문>, <남해신문>, <경남도민신문> 등이 참여했고, <서경방송>과 <하동신문>에서도 보도를 했다. 

한편, <경남도민일보>는 주민들의 이 같은 주장에 대해 "한전 남부건설본부 관계자와 용역사는 '해저케이블은 오히려 더 많은 공사비가 들 수 있다'고 회의적인 견해를 나타내며 '이번 안은 최종안이 아니라 잠정안일 뿐이고 앞으로 주민 의견을 반영·검토해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이제 한전 남부건설본부 측이나 하동군, 그리고 남해군 당국은 이러한 주민들의 반대 의견이나 대안 제시에 대해 어떤 응답을 할까? 만일 진정으로 "주민주도형" 사업을 한다면, 그리하여 모든 공적인 사업을 투명하고도 민주적으로 진행한다면, 이번 대치리 주민들이 보여준 적극적 태도에 박수를 보내며 민초들 의견을 적극 수용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2050 탄소제로나 기후위기 대응이 절박한 현재 시점에서, 당국이나 마을공동체 모두는 철저하고도 과감한 '절전 운동'과 더불어 자연에너지, 신재생에너지 등 '에너지 전환 운동'에 적극 나서야 한다. 사업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려 한다면, 하동에서도 제2의 밀양 사태가 전개되지 말라는 법이 있겠는가? 생명‧평화의 가치를 중시하는 대치리 주민들은 관련 회사나 당국의 현명한 결단을 기다리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대전충남인권연대 필진 강수돌 고려대 명예교수의 기고글입니다. 대전충남인권연대 뉴스레터에도 실립니다.


태그:#하동 송전탑 , #제 2의 밀양, #강수돌, #대전충남인권연대
댓글

대전충남인권연대는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소중한 권리를 옹호하는 것이 세계평화의 기본임을 천명한 세계인권선언(1948.12.10)의 정신에 따라 대전충남지역의 인권현실을 개선시키기 위해 인권상담과 교육, 권력기관에 의한 인권 피해자 구제활동 등을 펼치는 인권운동단체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