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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동 '봉산옥'은 황해도식 만둣국으로 유명하다. 미슐랭 가이드 빕구르밍 3년 연속이 인정하듯 미식가들 사이에서는 꽤 알려진 노포(老鋪)다. 삼삼하면서도 깔끔한 만둣국과 오징어순대는 이집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별한 메뉴다. 평일 낮 시간에도 줄을 서야한다. '봉산옥'은 6.25전쟁 직후 남으로 넘어온 이북 출신 실향민들에게는 향수를 달래는 각별한 장소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이따금 가게에 들르면 시끌벅적한 대화 사이에서 투박한 이북 사투리를 들을 수 있다. 가게 주인은 윤영숙씨는 "윤석열 대통령도 검찰총장 재직 시 즐겨 찾았고, 문재인 전 대통령 또한 단골이었다"며 은근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북한을 탈출해 남한에 정착한 지성호(40) 국민의힘 국회의원과 이곳에서 만둣국을 안주로 대화를 나누었다. 지 의원은 흔히 말하는 '꽃제비'로 불리는 탈북민 출신 인권 운동가다. 2020년 5월 미래통합당(국민의힘) 비례대표로 국회에 진출했다. 지 의원에게 듣는 탈북 스토리는 상상을 뛰어넘었다.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난 그는 스물다섯 되던 2006년 7월 한국에 왔다. 지 의원은 오른쪽 팔과 다리가 의수(義手)다. 달리는 화물 열차에서 석탄을 훔치다 떨어져 팔과 다리를 잃었다. 그때 열여섯이었다. 지 의원이 살던 마을 주민 대부분도 석탄을 훔쳐 식량과 바꾸는 게 일상이었다. 지 의원은 목발에 의지해 미얀마와 라오스, 태국 정글을 헤치고 1만4000km를 걸어 탈북했다. 비장애인도 쉽지 않은 여정을 감안하면 기적이다. 지 의원 자신도 "살아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
 
황해도식 만둣국과 오징어순재로 유명한 서초동 봉산옥에서 탈북민 출신 지성호 국회의원과 함께 만둣국을 안주 삼아 탈북민 문제를 논의. 왼쪽부터 필자, 이기완 CBS국장, 이용미 전 CBS아나운서
 황해도식 만둣국과 오징어순재로 유명한 서초동 봉산옥에서 탈북민 출신 지성호 국회의원과 함께 만둣국을 안주 삼아 탈북민 문제를 논의. 왼쪽부터 필자, 이기완 CBS국장, 이용미 전 CBS아나운서
ⓒ 임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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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여정을 듣는 내내 당시 상황이 오버랩 되어 안타까웠다. 동시에 탈북민에 대한 우리사회 무관심을 돌아보게 했다. 지 의원은 남한에 도착해 대학을 다니며 '나우(NAUH)'를 설립해 탈북민을 돕는 일에 매달려 왔다. '나우'는 북한 인권 상황을 알리고 어려움에 처한 탈북민을 돕는 단체다. 지금까지 이 단체를 통해 450여 명이 입국했다. 지 의원이 국제사회에 알려지게 된 건 트럼프 정부 때다. 트럼프는 2018년 1월 취임 후 첫 국정연설에서 지 의원을 '세계인의 희망의 상징'으로 소개했다. 이어 한 달 후에는 지 의원과 함께 탈북민 7명을 백악관으로 초청해 대담을 나누었다. 독재국가 북한의 열악한 인권상황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이어 꽃제비 출신 탈북민은 대한민국 국회에까지 입성했다. 외교관 출신 태영호 의원과 함께 한국사회 체제 우월성을 입증하는 인물로 부상했다.

지 의원은 "제대로 된 국가라면 탈북민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며 탈북민이 잘 살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탈북민이 남한 사회에 잘 정착하는 건 북한 체제를 흔들고 통일비용을 줄이는 지름길이라고 덧붙였다. 탈북민들은 목숨을 걸고 남한을 찾은 이들이다. 북에는 남은 가족과 친지들이 있다. 탈북민들은 이들에게 남한 사회 체제 우수성을 알리는 메신저로 역할을 할 수 있다. 북한 주민들에게 자유가 보장되고 경제적으로 앞선 남한 실정이 제대로 전해진다면 폐쇄적인 북한 사회에는 큰 위협이다. 북한 당국이 남한에서 띄우는 애드벌룬을 가장 두려워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북한과 마찰을 우려해 전단 살포를 금지하는 법안을 제정했는데 이런 측면에서 아쉬움이 적지 않다.

탈북민 3만6000여 명 시대다. 주변에서 탈북민을 만나는 게 어렵지 않은 시대가 됐다. 그럼에도 탈북민에 대한 지원과 처우는 열악하다. 생활비 성격을 지닌 정착지원금 제도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2001년~2020년 '탈북민 정착지원금 현황'에 따르면 탈북민 1인 세대가 받는 정착금은 지난 20년 동안 130만 원 증가하는 데 그쳤다. 반면 같은 기간 소비자 물가는 52.2% 올랐다. 탈북민 1인 세대가 지원받는 정착 기본금은 800만 원 정도다. 이마저도 탈북할 때 빌린 돈과 브로커 비용을 갚고 나면 사실상 마이너스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기 일쑤다. 지 의원 또한 2006년 하나원에서 나올 때 브로커 비용을 주고 남은 5만 원으로 생활하며 2006년 첫 달을 버텨야 했다.

초기 정착을 위해 지원하는 기초생활수급비(최대 1년)도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탈북민을 기초생활수급자로 간주해 1인 당 월 55만 원을 지급하는데 교통비와 휴대폰 요금, 공과금, 관리비 납부도 버겁다. 지 의원은 "남한이라는 전혀 다른 사회에 정착하는 탈북민에게 지원하는 돈이 동일한 사회에서 성장한 청년 농업인 창업 지원금만도 못하다"면서 "생계급여 기간을 6개월에서 1년으로 늘리는 등 정착 시스템을 전면 손질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사실 탈북민 가운데 상당수는 정착 지원금이 바듯해 외부 활동을 기피하고 집안에서만 생활하는 바람에 우울증을 앓는 경우가 많다. 2019년 7월에도 서울 관악구 임대아파트에 살던 40대 탈북 여성과 6세 아들이 숨진 지 두 달 만에 발견되기도 했다. 지 의원은 탈북민을 비용이 아닌 통일에 대비한 투자이자 자원으로 봐야 한다며 몇 가지를 제안했다.

첫째, 탈북민 전담 법률보호관 제도. 탈북민들이 겪는 법률 장벽 해소를 위해 법류 서비스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 탈북민들은 다양한 법률 문제에 직면함에도 조력 받지 못해 적지 않은 피해를 입고 있는 현실이다. 둘째, 탈북민 자산을 유족에게 지원. 현재 탈북민이 사망할 경우 소유 자산은 국가에 귀속된다. 이 때문에 탈북민들은 정착 지원금을 사용하지 않은 채 현금화하고 있다. 사후 통일이 되면 북에 남은 가족에게 지급하는 신탁 제도가 있다면 근로 의욕 고취는 물론 소비 촉진을 기대할 수 있다. 셋째, 탈북민 공공기관 의무 채용. 상당수 공공기관은 장애인 의무 고용을 지키지 못해 과태료로 대신하고 있다. 장애인과 탈북민을 함께 의무 고용 대상으로 인정할 경우 제도 실효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대화를 끝내면서 지 의원은 "탈북민들은 남한 사람들을 '한국 분' '남한 분'으로 부른다. 같은 국민임에도 존칭하는 건 잠재된 열등감에서 비롯된 언어 습관이다"면서 "남한 국민과 탈북민이 서로 존중하고 차별을 극복하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될 때 비로소 통일 논의도 가능하다"며 탈북민에 대한 배려와 이해를 당부했다. '남한 분'들이 진정 통일을 생각하고 고민하는지 문득 묻고 싶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서울시립대학교 초빙교수(전 국회 부대변인)입니다. 이 글과 비슷한 내용으로 한스경제에도 게재될 예정입니다.


태그:#탈북민, #꽃제비, #봉산옥, #정착지원금, #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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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문, 여행, 한일 근대사, 중남미, 중동문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중남미를 여러차례 다녀왔고 관련 서적도 꾸준히 읽고 있습니다. 미국과 이스라엘 중심의 편향된 중동 문제에는 하고 싶은 말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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