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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김없이 8월이 돌아왔다. 8월의 숨막히는 무더위 속에서, 일본 사회는 다시금 과거의 전쟁체험을 곱씹는다. 지난날의 지도자들이 무모하게 시작한 전쟁은 310만의 국민들을 희생시키고 폐허만을 남긴 채 끝이 났다.

끝이 났다는 표현에 어폐가 있는지도 모른다. 패전국 일본은 승전국 미국에게 정치군사적으로 여전히 종속되어 있다. 소련군이 일본의 포츠담 선언 수락 발표를 무시하고 무력으로 점령하여 병합한 '북방영토'의 수복은 요원해보인다. 전쟁의 그림자는 정치외교적 문제, 제도적 문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전쟁으로 뒤틀린 개인들의 삶은 그 무엇으로도 위로될 수 없다.
 
일본은 전쟁말기의 본토공습에 이어 역사상 최초로 핵공격을 받고 폐허가 되었다.
▲ 히로시마시의 폐허 위를 걷는 일본군 패잔병(1945년 9월) 일본은 전쟁말기의 본토공습에 이어 역사상 최초로 핵공격을 받고 폐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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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파멸적 결과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은, 국가와 국민의 명운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은 채 그저 자기 자신과 소속 조직의 안위만을 추구했던 당시의 지도자들에게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관련기사: 일본이 풀어야 할 괴로운 '근본 질문').

현지군의 독단으로 시작된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의 중일전쟁은 제국 일본을 국제적 고립으로 몰아넣었다(관련기사: 한국 역사의 그림자... 겉과 속 달랐던 '만주국군'의 비극). 열강들의 지탄과 제재가 이어지는 가운데, 일본 국내에서도 출구를 모색하고자 하는 합리적인 제언들이 나왔지만 이러한 목소리들은 각 조직들의 이해관계 아래서 철저하게 묻혀버렸다.

전선이 확대되고 중국으로 병력들이 증파될 수록 육군의 정치적 영향력과 장군들의 보직자리는 늘어났다. 판매부수에 눈이 먼 언론사들은 애국주의적 선동문구를 마구 찍어내며 전쟁을 지지했고, 이렇게 만들어진 대중의 열광은 무기력한 정객들을 압박했다(관련기사: 전시 일본 언론, 어떻게 나라를 파멸로 이끌었나).

국제적 고립 탈피를 위한 외교관들의 노력은, 육군이 나치독일에 밀착하고 언론에 의해 반미반영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물거품이 되었다. 1940년, 일본은 나치독일, 이탈리아 등과 삼국군사동맹을 체결하면서 외교적 해결의 실마리를 완전히 놓아버리게 되었다.

자신감에 찬 육군은 만주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을 벌이며 소련을 도발하고자 했다. 소련을 상대로 새로운 전선이 열릴 경우 전쟁 수행에서 완전히 소외될 것을 우려했던 해군은 남방으로의 '진출'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무리한 전선 확대를 우려한 민간 정치인들도 해군의 남진론에 힘을 실어주면서 결과적으로 소련에 대한 도발은 무산되었지만, 침략으로 침략을 막은 정책은 또다른 재앙을 야기하고 말했다.
 
이미 나치 독일에게 패전했던 프랑스는 식민지 인도차이나에 일본군이 진주하는 상황에도 무력할 수 밖에 없었다. 인도차이나의 프랑스 총독부는 실권을 잃고도 명목상 존속하였으나 1945년 3월 프랑스 식민군의 반란을 우려한 일본군에 의해 완전히 축출되었다.
▲ 인도차이나로 진주한 일본군 지휘관들과 협의하는 프랑스 총독 장 데쿠 이미 나치 독일에게 패전했던 프랑스는 식민지 인도차이나에 일본군이 진주하는 상황에도 무력할 수 밖에 없었다. 인도차이나의 프랑스 총독부는 실권을 잃고도 명목상 존속하였으나 1945년 3월 프랑스 식민군의 반란을 우려한 일본군에 의해 완전히 축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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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반도 진주가, 아시아에서 식민지를 경영하던 열강들에게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위협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중일전쟁으로 중국에서의 소비시장과 각종 이권들이 흔들리는 데 이어, 일본과 나치독일의 동맹 성사로 이미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던 열강들은 일본군의 인도차이나 반도 점령을 계기로 폭발하였다.

1941년 8월 곧바로 일본에 대한 금수조치가 단행되었다. 전쟁수행에 필요한 석유와 철강 등을 미국으로부터 수입할 수 없게 된 것은 제국 일본의 지도자들에게 치명적인 위기감을 안겨주었다. 이대로라면 일본이 말라죽고 만다는 절박감이 대두되었지만 출구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미국은 강경하게 '인도차이나 반도와 중국 전선에서의 철군'을 협상 조건으로 내세웠다.

미국의 이 같은 요구는 육군의 주류를 이루던 과격파들의 분노를 샀다. 순식간에 미국과의 전쟁을 부르짖는 극단론에 불이 붙었다. 육군의 입장을 대변했던 육군대신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대장은, 중일전쟁 종결이 의제로 떠오르자 육군에 의한 정변의 가능성까지 내비치며 중신들을 위협했다.
 
나치당의 대중선동과 사회통합에 영감을 받은 그는 스스로도 일본의 전권을 잡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정작 삼국동맹과 대미개전 등의 주요 국면에서 스스로의 소신을 펴지 못하고 군부에 끌려다니다 끝내 사임하기에 이르렀다.
▲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 나치당의 대중선동과 사회통합에 영감을 받은 그는 스스로도 일본의 전권을 잡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정작 삼국동맹과 대미개전 등의 주요 국면에서 스스로의 소신을 펴지 못하고 군부에 끌려다니다 끝내 사임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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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의 타협을 원했던 고노에 후미마로(近衞文麿)총리는 "그렇게 전쟁을 하고 싶으면 육군 혼자서 하라"며 소극적으로 불만을 드러냈지만 그것 뿐이었다. 고노에 총리는 총리로서의 권위로 육군의 위협을 단호하게 통제하지 못했다. 해군이 '외교적 해결이 가능하면 그것으로도 좋다'는 정도로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가운데, 결국 9월의 어전회의에서 처음으로 미국과의 전쟁 방침이 정해지기에 이른다. 그것은, 10월까지 미국과의 협상이 타결되지 않으면 전쟁을 시작한다는 결정이었다.

고노에 총리의 우유부단함과 나약함을 감지한 미국 측은 고노에 총리와 협상에 나서는 것 자체를 부정하기에 이른다. 전쟁이냐 평화냐 하는 그 중대한 국면에서, 결국 그는 10월 18일에 '지쳤다'는 이유로 무책임하게 총리대신직을 사임하였다.

강경파가 득세하는 분위기를 등에 업고 새로운 총리대신에 오른 도조 히데키 대장은 돌연 미국과의 전쟁 방침 전면 재검토를 추진하였다. 도조 총리의 태도변화에, 그동안 그를 지지했던 육군 강경파가 분노했음은 물론이다. 그는 본인이 줄기차게 주장하던 대미전쟁을 벌일 수 있는 총리에 올랐음에도 어째서 태도를 바꾸었던 것일까.

육군의 입장만을 대변하면 되었던 육군대신을 넘어 총리대신직까지 맡게 된 도조 대장은 이제 일본 전체의 상황을 살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실상 모든 지표가 미국과의 전쟁에서 일본이 이길 수 없다는 비관적인 결과를 가리키고 있었다. 국력 차이가 80배에 달하는 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것은 말 그대로 자살행위였다. 도조 히데키 총리 본인도, 군인들도, 관료들도, 일본이 미국에 비해 객관적 전력이 한참 열세라는 것은 모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도조 히데키 총리(가운데)를 주축으로 육해군 통수부와 각 정부부처 수장들이 모여 전쟁에 관한 방침을 정했다.
▲ 대미개전을 결정한 대본영 정부연락회의의 참가자들 도조 히데키 총리(가운데)를 주축으로 육해군 통수부와 각 정부부처 수장들이 모여 전쟁에 관한 방침을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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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그 누구도 '전쟁은 안된다'고 단언하지 않았다. 이미 중국과의 전선에서 수십만의 전사자가 발생했던 상황에서, 중국 전선에서의 철군은 '영령들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되었다. 거기에, 당시 일본의 국력으로는 감당이 안되는 정도의 예산을 타 먹어왔던 군부가 이제 와서 전쟁을 피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것과도 같았다. 군부의 폭주에 학을 떼던 민간 정치인들과 관료들조차도, 언론에 선동된 대중들의 분노가 자신들에게 쏟아질 것을 두려워했으므로, 결국 그 누구도 전쟁 반대에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지 않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애매한 태도를 견지해왔던 해군마저도 결국은 '해군 측에 배당되는 물자와 예산을 늘려줄 것'을 조건으로 대미개전에 찬성하였다. 그동안 미국을 가상적국으로 삼고서 성장해왔던 해군의 입장에서도 미국과의 전쟁에 반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도고 시게노리(東郷茂徳) 외무대신이 사임을 시사한 것이 최후의 유의미한 저항이었다. 그는 '육군이 멋대로 전쟁을 벌여 놓고는 어째서 외교에 모든 것을 떠넘기느냐'고 분노를 토로하며 미국이 받아들일 수 없는 무리한 조건을 가지고 협상을 시도할 수는 없다고 강변했다. 결국, '중국에서는 사태가 수습될 시 25년 이내 철군, 미국의 금수조치 해제 시 인도차이나 반도 남부에서의 즉각 철군, 동남아시아로의 무력진출 단념 확약'을 골자로 일본 입장이 측이 새로 정리되었지만, 외교적 해결의 희망은 이미 찾아보기 어려웠다.

위의 조건으로 미국과의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12월 8일을 기해 전쟁을 시작한다는 기가 막힌 결론은 그렇게 확정되었다. 개전을 확정지은 지도자들 중 그 누구도, 전쟁이 일본을 어떤 결말로 끌고 갈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보신에 급급했던 그들은 끝내 일본이라는 나라가 파멸의 폭주 열차 위로 올라타는 것을 방관하고 말았다.

일신의 출세, 조직의 안위가 국가와 국민보다 우선되었을 때 어떠한 재앙이 벌어지게 되는지를, 8월의 무더위 속에서 일본의 역사는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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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전쟁체험에 관한 연구에 정진하고 있는 오사카 거주 유학생입니다. 한일친선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편견과 혐오 너머로 새로운 지면을 여는 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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