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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기자 그룹 '워킹맘의 부캐'는 일과 육아에서 한 발 떨어져 나를 돌보는 엄마들의 부캐(부캐릭터) 이야기를 다룹니다.[편집자말]
'수채화 고무나무'는 이름처럼 잎사귀에 붓칠하듯 그려진 무늬가 있다. 굵은 붓으로 무심하게 그려진 그 색감과 무늬가 너무 좋아서 집에도, 사무실에도 두었는데 아주 가끔 생각날 때마다 물을 주고 내버려 두어도 묵묵하고 무탈하게 잘 자란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지나치게 웃자라버린 십대 농구선수처럼 키만 삐쭉 커버렸다. 옆으로도 풍성하게 자랐으면 좋으련만, 햇살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위로만 자란 모양이다. 

그대로 두면 영 볼품 없이 클 것만 같아 검색을 해보았다. 이 세상 모든 분야가 그렇듯, 식물의 세계 또한 인터넷 세상 안에는 우주의 먼지 만큼이나 많은 식물고수와 전문가들의 조언이 널려 있다.

든든한 선배님들 덕분에 고무나무에 대한 조언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웃자라기만 하는 고무나무는 가지치기를 하면 새 가지가 옆으로 나오며 풍성한 모양으로 키울 수 있다는 조언을 얻었다.

가지치기 하고 내버려 둔 가지
 
수채화고무나무
 수채화고무나무
ⓒ 이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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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나무의 가지는 굵고 단단한 편이고, 너무나 튼실한 잎이 달려있기 때문에 가지를 자르는 일이 조금 망설여졌다. 괜히 멀쩡한 애의 팔다리를 끊어놓는 건 아닐까, 염려가 되었다.

하지만 인터넷 세상 속 식집사 선배님들께서 시간순으로 찍어 올려놓은 사진 증거들이 있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큰 가위를 들고 단단한 줄기를 잘랐다. 고무나무라는 이름답게 흰 진액이 솟아 나와 흐른다. '아프겠다...' 하는 마음이 절로 들며 미안해진다. 진액은 휴지로 닦아주고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몇 주가 지나니 잘려진 가지 끝 옆으로 새순이 삐쭉 솟아 나왔다. 선배님들의 조언대로 위로만 자라던 고무나무가 옆으로 가지를 뻗기 시작했다. 새잎이 나올 때마다, 옆으로 가지가 길어질 때마다 기특하고 신기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것은 따로 있었다. 가지치기를 할 때 잘라낸 가지를 그냥 버리기가 안타까워 옆 화분 빈자리에 별 생각 없이 툭 꽂아두었는데 이 녀석이 몇 주가 지나도 멀쩡한 것이다. 심지어 새 잎이 나기까지 했다.

그저 잘려진 가지를 흙에 꽂기만 했는데 혼자서 뿌리를 내려 새살림을 차린 것이었다. 고무나무의 생명력이 질기다고 하더니... 흙에 꽂아놓고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혼자 알아서 자라고 있었다.

무난한 성품에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과는 어떤 장소를 가든, 무엇을 함께하든 걱정이나 부담이 적다. 그렇게 주변의 공기에 자연스레 스며들며 편안하고 부드럽게 만드는 사람은 언제나 부러운 대상이다. 적당한 빛만 있으면 근사한 무늬를 가진 튼튼한 잎사귀를 밀어올리는, 그리고 가지를 잘라내도 쑥쑥 잘 자라는 '수채화 고무나무'가 사람으로 치면 그런 매력을 가진 사람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수채화 고무나무' 뿐만 아니라, 화초를 키우다 보면 그런 식으로 놀라게 되는 일들이 벌어진다. 개업식이나 집들이 선물로 유명한 '금전수'는 장소나 계절에 큰 영향을 받지 않고 잘 자라기 때문에 인기가 많은 화초인데, 번식력과 생명력이 어마어마하다.
 
물꽂이로 잘 자라는 식물들
 물꽂이로 잘 자라는 식물들
ⓒ 이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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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를 잘라 물에 꽂아도, 흙화분에 꽂아도 금세 알맹이가 달린 뿌리를 만들어 쑥쑥 자란다. 어찌나 번식력이 좋은지 여기저기 꽂아두고 키우다보면 화분의 개수가 쑥쑥 늘어간다.

스킨답서스나 워터코인, 아이비 같은 아이들은 잎이 무성해지면 가위로 툭툭 잘라 물에 꽂아놓으면 싱싱하게 잘 자란다. 이렇게 수경재배가 가능한 식물들은 실내에서 깔끔하게 키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물이 담긴 투명한 유리컵에 반쯤 몸을 담그고 초록색 잎을 피워내는 모습을 보면 청량한 느낌이 든다.

햇빛의 양과 기온에 따라 민감하게 반응하고 물주기를 아주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해야만 잘 자라는 까다로운 식물도 그 나름의 매력이 있지만, 이렇게 생명력이 있고 어디에서나 쑥쑥 잘 자라는 화초는 편한 친구처럼 가깝게 느껴진다.

담담하고 건강하게, 어른스럽게

어릴 적, 우리 집이 이사를 자주 다닌 덕에 나는 전학을 많이 다녔다. 낯선 학교의 어느 교실에 들어가 선생님 옆에 서서 "오늘 우리 반에 새로 온 학생을 소개할게요"라는 소개의 말을 듣던 순간이 내게는 여러 장면 남아있다. 어릴 땐 그 순간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다.

내성적이고 말이 없던 내가 새 학교에 적응하기까지 매번 어떤 마음이었을까. 크게 힘들었다거나 상처로 남은 기억까지는 없는 것을 보면 무탈하게 적응은 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1년이나 2년을 다니고 또 다른 학교로 전학 가는 상황이 생기는 일이 반복되면서 마음을 나누는 친한 친구도 별로 없었고, 학교에 마음을 깊이 붙이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런 내가 4학년 때 전학을 간 학교에서 제일 오래, 졸업할 때까지 다녔는데 그 시기에 성격이 많이 달라졌다. 친구들을 많이 사귀고 내 의견이나 감정도 드러내놓고 표현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내 모습은, 가지가 잘려진 식물이 새로운 흙과 환경에서 뿌리를 내리는 것과 닮아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떤 이유에서인지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친절하고 다정한 선생님과 친구들이 나에게 맞는 햇빛과 양분이 되어 비로소 마음을 풀어놓고 편안한 상태로 나를 개방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다행히 지금은 새롭고 낯선 환경에 놓여져도 큰 불만 없이 무던하게 적응하는 어른이 되려고 노력하곤 한다. 물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 앞에서 머뭇대고 긴장하는 부분이 하나도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일단은 새로운 도전이나 시도를 즐기는 편이 내 삶을 더 다채롭고 커다랗게 만들어준다고 믿고 있다.

흙에서 자란 스킨답서스가 물이 담긴 컵 속에도 뿌리를 내리는 일도, 가지가 부러진 금전수를 흙에 꽂아놓으면 언제 아팠었냐는 듯 반질반질한 잎사귀를 내어놓으며 길게 자라는 것도 식물 각자에게는 나름 힘든 일일지도 모르고 적응하고 노력하는 시간이 필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 아이들은 무던하고 조용히, 씩씩하게 뿌리를 내리고 새생명을 피워낸다. 새로운 일이나 어려운 도전 앞에서 너무 오래 고민하지 않고, 너무 오래 긴장하지 않고 담담하고 건강하게, 어른스럽게 해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기자의 개인 브런치에도 게재됩니다.
https://brunch.co.kr/@writeurmind


시민기자 그룹 '워킹맘의 부캐'는 일과 육아에서 한 발 떨어져 나를 돌보는 엄마들의 부캐(부캐릭터) 이야기를 다룹니다.
태그:#식집사, #화초, #수경재배, #가지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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