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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은 알고있다' 전시회에서는 영풍 석포제련소의 환경 파괴 문제를 고발하는 작품들을 다루었다. 전시회는 지난해 10월, 대구를 시작으로 영주, 안동, 부산을 거쳐 서울에서 전국 순회 일정을 마무리하였다.
▲ 전시회 "낙동강은 알고있다" 포스터 "낙동강은 알고있다" 전시회에서는 영풍 석포제련소의 환경 파괴 문제를 고발하는 작품들을 다루었다. 전시회는 지난해 10월, 대구를 시작으로 영주, 안동, 부산을 거쳐 서울에서 전국 순회 일정을 마무리하였다.
ⓒ 생명평화예술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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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16일부터 22일까지 서울 국회의원회관에서는 '낙동강은 알고 있다'라는 주제로 영풍의 실태를 고발하는 전시회가 열렸다. 10월 19일 대구에서부터 시작한 해당 전시회에서는 다양한 예술가들이 영풍 석포제련소를 둘러싼 환경문제를 저마다의 작품으로 고발하고 있었다. 비록 사람들이 오가는 로비 한쪽 벽에 작은 규모로 펼쳐진 전시회였지만, 내가 그동안 봤던 어떤 작품들보다 강렬했고 작품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무거웠다.

1970년 석포제련소를 설립하여 제련업으로 진출한 영풍은 1978년 고려아연을 완공하면서 국내 아연시장을 독점하기 시작했다. 이후 영풍은 국내를 넘어 세계 아연시장 점유율의 10%를 차지하며 재벌기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하지만 연간 1조 2000억 원이라는 매출 뒤에는 동물과 인간의 생명을 밟고 올라서 지금의 자리까지 성장해 온 부끄러운 과정이 숨어있다. 석포제련소는 주민 건강을 외면해온 지자체와 함께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낙동강 환경파괴 주범'이라는 꼬리표와 함께해왔기 때문이다. 낙동강 본연의 모습을 앗아간 영풍의 행태는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은 것을 가지고자 하는 인간의 이기심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석포 제련소에서 일한 노동자들은 치아가 녹아내리는 피해를 입었다. 의사들은 제련소 내 아연 제련 공정에서 배출된 황산을 직접적인 원인으로 파악하였다. 주변 산의 토사는 무너져 내리고 나무는 말라죽었다. 제련소 근처 석포 초등학교의 운동장에서는 카드뮴이 우려 기준을 초과했고, 화단에서는 대책 기준을 초과한 카드뮴 수치가 측정됐다. 석포제련소 인근 땅에는 토양정화 중임을 알리는 깃발이 무수히 꽂혀 있으며, 석포제련소 주변에 사는 주민들 몸에서는 다량의 중금속이 검출됐다. 그럼에도 여전히 석포제련소는 굴러간다.

전시회 중간에는 사람들로 하여금 '야, 영 풍 너 '라는 이름으로 4행시를 작성하도록 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중에서 보자마자 가슴에 박혔던 문구가 있었다. '야만의 기업, 영풍, 풍선처럼 배부른 욕심에, 너덜거리는 목숨들.' 영풍의 실태를 단적으로 드러낸 말이다. 오염된 산업폐수를 흘려보내고, 중금속 물질을 내뿜으며 영풍은 성장해왔다. 오염된 공기에 주민들의 건강권은 침해당했으며, 땅은 황폐해져 갔다. 폐수에서 물고기들이 죽어갔으며, 이 물고기를 먹은 새들이 죽어갔다. 제 날개를 펼쳐 하늘을 자유로이 돌아다녀야 할 새들의 눈에 비친 하늘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전시회에서는 머리만 남거나 성한 구석 하나 없이 죽어간 물고기들의 떼죽음이 적나라하게 나타난 사진을 볼 수 있었다.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마치 사진 속 물고기들이 말을 건네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자기가 왜 죽어야 하냐고 따져오는 것만 같았다. 생태적으로 지속 불가능한 인간의 활동에 대한 대가를 다른 생명체들이 치르고 있다. 위기를 피해 갈 수 있는 소수의 상위 집단에서부터 사회 전체를 아우르는 피라미드 형식으로 나타난 환경 불평등의 마지막 종착지는 더 이상 착취할 것이 없는 자연 생태계 자체였다.

처음 영풍 제련소의 문제점을 접하며, 그동안 영풍 그룹에 대해 문구 말고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하지만 환경사회학 수업을 들으며, 기업이 저지른 환경 문제에 관하여 단순히 개인의 무지를 탓하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석포제련소가 낙동강을 오염시킬지 모른다는 우려는 1974년 <국제신보>에 기고된 기사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로부터 40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영풍의 문제들은 왜 이슈화되지 못했을까. 왜 영풍은 수차례의 사회적 경고에도 불구하고 해를 거듭할수록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을까.

영풍이 그간 생태계에 보여온 안일한 태도는 영풍만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영풍 그룹에 특혜를 준 지자체가 그에 힘을 실어줬으며, 거대 기업 앞에서 목소리를 낮추었던 언론이 그들을 보호했다. 사람들이 무지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들이 보이고자 하는 것들만 보게 되는 것이다. 경영상 비밀이라는 문구는 진실을 은폐하고 거짓을 포장하기에 충분한 자본가들의 무기가 되었다. 어떤 문제를 이슈화하는지 결정짓는 것 또한 권력이라는 점에서, 자본주의가 가진 근본적인 문제들을 파악하기엔 일반 대중들이 접근 불가능한 그들만의 영역이 너무도 많다.

하지만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내가 가지게 된 굳건한 하나의 믿음은 사필귀정이다. 더디더라도, 때로는 조금 돌아가더라도 결국엔 사회는 정의로 나아갈 것이라고 믿는다. 지난해 영풍 석포제련소가 마주한 현실은 내 믿음이 헛된 것은 아니라는 희망을 가지게 해주었다.

지난 11월 8일부터 17일까지 영풍제련소는 물환경보전법 위반에 따른 경북도의 행정처분으로 열흘간 조업을 정지했다. 또한 환경부 특별사법경찰은 중금속 오염 지하수를 공장 외부로 유출했다는 이유로 이강인 영풍제련소 대표 등을 대상으로 구속 영장을 신청하기도 했다. 비록 영장은 기각됐지만 이를 통해 그만큼 영풍제련소를 대하는 환경 당국의 시선이 조금은 강경해졌다는 데에 희망을 가져 본다. 이번 영풍에 대한 환경부의 과징금 281억 원 부과는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볼 수 있다.

이처럼 기업의 환경 파괴의 죗값은 그를 통해 얻은 이익만큼 엄중하게 물어야 한다. 생태계의 순환 고리를 단절시킨 이기적인 기업 활동과 자본의 혜택에서 소외된 자들 앞에서 보인 무책임한 태도의 대가를 더욱 엄중한 법적 잣대로 물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환경부의 적극적인 시정 조치는 석포 제련소 가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지만, 이러한 과징금이 영풍에 면죄부를 주는 양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이 자본의 논리로 해석되는 경제 시장에서, 죗값마저 돈으로 해결하면 그만인 물질만능주의를 허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환경을 파괴하고 주민과 노동자의 건강을 해친 죄의 대가는 자본의 가치로 계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영풍이 수년간 낙동강 최상류에서 카드뮴 오염수를 배출함으로써 피해 받은 모든 것들을 고려해볼 때, 281억 원은 터무니없이 가벼운 처분에 불과하다. 그들이 일궈낸 경제적 가치라는 명분이, 그가 일으킨 모든 피해를 정당화할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물론 영풍의 사례에서 대안 없는 공장 철폐를 외치기 전에, 우리는 그 안의 노동자들의 생존권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환경을 위한다며 벼랑 끝에 내몰린 노동자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이는 지속될 수 없는 환경 운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영풍 석포 제련소와 관련하여 석포면 주민분이 "영풍 기업은 마을의 생존권과 직결된 문제"라고 언급하셨던 인터뷰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지역 주민대표와 몇몇 지자체 관련자들이 보인 영풍에 너그러운 태도는 단순히 개인의 안일함을 탓할 문제가 아니다. 2000명 남짓한 주민 중 80%가 석포 제련소와 관계 맺으며 살아가는 석포면의 입장에서는 영풍이 사라지는 것은 생계 수단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환경 문제가 노동자의 일자리 문제와 부딪히듯 영풍의 사례도 예외는 없다. 정의로운 전환에 대한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의로운 전환을 위해 우리는 노동 친화적인 환경 운동으로 나아가야 한다. 생태계의 순환을 끊지 않는 산업을 모색하기 위해서 먼저 환경운동에 노동자들로부터의 공감대 형성이 필요하다. 구조적인 측면에서는 재생 에너지 생산에 주력을 다하여 국가 책임 일자리를 확대하는 것이 중요하다. 국가가 중심이 되어 재생 에너지에 집중적인 투자를 지속하고 여기에 민간 기업을 동원해 일자리를 만들어낸다면 우리는 정의로운 전환을 현실에 적용해볼 수 있다.

새로운 대안이 등장할 때 그것의 실현 불가능성을 합리화하기 위한 현실 안주적인 핑계가 아닌, 그러한 한계를 극복해 지금의 불평등한 산업 구조를 개편해나갈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생태 친화적이고 노동 친화적인 정의로운 전환을 통해 노동자들과 환경운동가 사이에 연대를 형성한다면, 우리는 지속 가능한 환경 운동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

바꿀 수 없는 제도는 없고 영원히 지속되는 권력 또한 없다. 개개인의 촛불이 모여 만들어낸 대통령 탄핵이라는 역사적인 결실을 통해, 우리는 사람들이 같은 목소리를 낼 때 얼마나 큰 힘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 두 눈으로 목격하였다. 정의로운 전환을 통해 우리는 인간이 생태계의 한 조각이 되어 다른 모든 것들과 연결되어 살아가는 세상을 꿈꿀 수 있다.

이러한 생태적 지속가능성과 실질적 평등을 실현한 정의로운 사회는 개개인의 연대를 통해 이뤄나가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현실 비판에서 나아가 실질적인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같은 곳을 보며 목소리를 내야 한다. 한계에 다다른 지구를 되돌려 놓기 위한 움직임에 기꺼이 함께 목소리 내는 사람들이 늘어나길 바라본다.

태그:#석포제련소, #영풍, #기후위기 , #환경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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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배우고 있는 대학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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