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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한국 골프시장은 활황기를 지나, 어쩌면 난숙기에 돌입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국골프장경영협회(KGBA)가 작년 기준으로 집계한 국내 골프장은 494개, 회원제 골프장이 169개, 대중제가 325개나 된다. 한국 골프 시장의 규모는 연 13조 원을 넘어섰고, 골프 산업도 골프용품, 골프장 운영, 시설관리, 방송 및 중계, 홍보 마케팅, 회원권 분양 및 연단체 전문기업, 골프 예능 등 다변화하고 있다.

한국내 골프인구는 이미 500만 명에 이르고, 골프장 회원권은 사고파는 데 1억 원 이상을 호가하며, 골프 패션산업 시장만도 연 5~6조 원대로 급성장하고 있다. 특히 한국 골프계의 저변확대에 한몫하고 있는 골프 전문잡지의 성장도 괄목할만하다.

현재 출간되고 있는 골프 월간지는 <골프다이제스트> <골프먼스리> <골프매거진코리아> <골프앤이코노미> <골프저널> <골프포위민> <골프헤럴드> <월간골프> <탑골프> <jtbc 골프매거진> 등 10여 종이 넘고, 특히 <월간골프>의 경우에는 잡지 표지에 'since 1970 월간골프'라고 자긍심을 드러내다 보니, 독자들한테 간혹 최초의 골프잡지가 아닌가 오해도 산다.
  
최초의 골프 전문잡지와 개척기 한국 골프계

골프 대중화에 '약방의 감초' 역할을 해온 골프 전문잡지에 눈을 돌리면, 제일 먼저 최초의 골프 전문잡지에 관심이 가게 된다. 네이버의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1968년 3월 23일자 <경향신문>을 검색하면, "골프전문지 <골프 다이제스트>가 지난 20일 창간호를 냈다. 4.6배판 120면. 골프전문지로는 처음 기획된 것으로 값은 470원. 발행은 월간 <코리아 골프 다이제스트사>"라는 기사를 찾아볼 수 있다. 1973년 처음으로 출간된 <한국골프총람>에서도 한국 골프계 미디어의 효시를 1968년 3월에 창간된 월간지 <코리아 골프 다이제스트>라고 기록하고 있다.

1960년대 말 당시 정부에 등록된 월간, 격월간, 계간지는 130여 종에 불과했고, '한국잡지협회' 추산으로 이들 잡지의 총발행 부수는 100만 부를 넘을 정도였다고 한다.(<동아일보>, 1969.4.11) 박정희 정부의 산업구조 확대와 경제성장에 영향을 받은 출판계의 실상은 각종 협회에서 발간하는 업계지 및 여성지의 속출과 전문지 출현이 두드러진 현상으로 나타났다.

또한 군부 쿠데타를 통해 세워진 박정희 정부는 잡지윤리위원회 건의를 수용해 에로잡지들을 폐간조치했고, <코리아 골프 다이제스트> <월간중앙> 등 일부 월간지도 잡지윤리위원회로부터 게재중단, 경고처분을 당했다. <조선일보> 1969년 6월 11일자 기사를 보면, "서울대생 100여 명이 문리대 4.19 기념탑 앞에서 에로잡지, 불량영화, 만화 등 탈선매스콤 화형식을 갖고 불량간행물 60여 권을 불태웠다"고 해서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최초의 골프 전문잡지가 창간될 즈음에 프로골퍼 김성윤, 박명출, 신봉식, 연덕춘, 이일안, 조태운, 한장산 등을 주축으로 프로골프협회의 설립이 추진됐다. 평소 골프계에 큰 관심을 보였던 '골프광'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창립준비위원장직을 도맡았고, 재계 인사들로부터 재정적 동원을 얻어내는 데 앞장섰다.

중앙정보부는 당시 한국 공작정치의 산실이었다. 어찌 보면, 지금에 대검찰청처럼 말이다. 1968년 5월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창립총회가 개최되어 이사장 허정구, 부이사장 박용학, 전무이사 김흥조, 상무이사 연덕춘 등을 초대 임원진으로 구성하고 김형욱은 협회 고문에 추대됐다.(<골프저널>, 2021.7)

한편, 개척기 국내 골프장 현황은 수도권에 서울cc, 한양cc, 뉴코리아cc, 태릉cc, 관악cc, 안양cc 그리고 부산과 제주도에 각각 1곳씩 문을 연 형편이었다. 전국에 다해봐야 골프장 8개가 전부였다. 당시 골프장 개수가 적다 보니 골프장별로 모이는 골퍼들의 직업상 신분도 구별될 지경이었다. 예를 들자면, 서울cc는 정계와 재계 중진들, 한양cc는 신흥기업인, 뉴코리아cc는 교수 또는 해외 유학파 등으로 차이가 났다고 한다.

아직 골프는 귀족적 스포츠의 범주를 못벗어나고 있었지만, 골퍼들의 숫자는 소위 특권층을 중심으로 점진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당시 골프장 등록회원이 4천여 명이었고, 비회원 골퍼들까지 합치면 약 7~8천여 명에 이르렀다.(<조선일보>, 1967.10.17)

개척기 골프 전문잡지들, <코리아 골프 다이제스트>
 
<코리아골프다이제스트> 창간호 표지
 <코리아골프다이제스트> 창간호 표지
ⓒ 강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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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의 <코리아 골프 다이제스트>는 '한국프로골프협회' 초대 전무이사 김흥조에 의해 1968년 3월에 창간됐다. 그는 일제 때 '경성골프구락부' 회원으로 시작해서 1940년 약관 23세에 서울시(당시 경성부) 대표선수로 '전조선아마추어선수권대회'에 출전해 결승에서 전년도 챔피언 서정식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골프 실력이 대단했다.(<한국골프 100년>, 2001) 김흥조는 해방 직후부터 오랫동안 경영해오던 무역회사 '삼우해운'까지도 청산하고, 골프잡지에 올인한 구력 30년을 자랑하는 골프 마니아였다. 그가 잡지사의 발행겸 편집인을 맡았고, 안승근이 편집장이었다.

최초의 골프 전문잡지 <코리아 골프 다이제스트> 창간호의 편집후기에 보면, '그야말로 한국사상 처음으로 기획되고 간행되는 것이고 보니 여러 면에 걸친 검토가 필요했고, 또 간행에 앞서 숙려가 따라야 했다. 김흥조 사장 이하 사원 전체가 혼연일체가 되어 그야말로 한국 유일의 한국 최고의 내용과 인쇄기술을 지닌 전문지 제작에 심혈을 기울였음은 수식없는 솔직한 고백이다'라고 했다. 당시 녹록지 않은 한국골프 개척기에 골프 전문잡지의 발자취와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김흥조 사장은 초기 골프계의 발전과 골프 전문잡지 창간을 주도했으며, 골프 전문잡지를 통한 국내 골프 저변확대와 대중화 그리고 프로골퍼 양성에도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월간지 <코리아 골프 다이제스트>는 창간 당시에 돈 많고 권력있는 특권층의 전유물이라고 해서 다소 멀리하고 달갑지 않게 여겨졌다. 일반 독자들의 배타적이고 반발의식 풍조가 팽배한 가운데 매월 적자를 면치 못하다가 아쉽게도 1971년 6월호를 끝으로 문을 닫고 말았다.
  
<월간골프>에서 <국제골프>로

골프계의 노력은 계속되어 <월간골프>가 1969년 12월에 '한국프로골프협회' 기관지로 창간되었고, 프로골퍼 박명출이 발행겸 편집인을 맡았다. 당시 국내 골프계는 특권층 인사들만의 전용 스포츠라는 인식이 아직 강해 골프의 대중화를 위한 메신저를 필요로 했고, 발전하는 국내외 골프 기술과 경기현황 등 각종 정보들을 신속하게 전달해주는 더 많은 전문 미디어를 요구했다. '한국프로골프협회' 허정구 초대 이사장은 권위있는 골프 종합잡지를 기대하며 <월간골프>의 창간에 부쳐 다음과 같은 축사를 했다.

"프로골퍼들의 권익 옹호와 그 자질 향상은 물론 우수선수의 양성문제 등을 평소에 생각해 왔었는데 이런 생각을 이루자면 우수 골퍼들을 양성할 수 있는 전문적인 기관도 마련되어야 할 뿐 아니라 일익 향상되는 골프의 이론과 그 기술을 일깨워 주는 명실상부한 전문지의 출현이 있어야겠다...

출범하는 <월간골프>에 대하여 진심으로 부탁하고 싶은 의견은 권위있는 골프 종합잡지로써 품격을 지녀 국내 골프계 발전을 위해 선도적인 역할을 담당해줄 것과 더 나아가서는 우수한 골퍼들의 양성은 물론 골퍼들의 자질향상에 이어 골프의 대중화를 다방면에 이르기까지 기여해줄 것을 당부..."(<한국골프총람>, 1973)


하지만 <월간골프>는 통권 4호까지 간행되다가 독자들의 만족스럽지 못한 반응과 과다한 경비지출로 더이상 지속되지 못했다. 1970년 5월에 <월간골프>는 잡지명을 <국제골프>로 변경해서 등록하고, 발행겸 편집인을 김성윤 프로로 해서 재창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국제골프> 1호의 편집후기에서도 밝혔듯이, 재창간을 통한 새로운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잡지의 내용도 보다 충실을 기하고 체제도 참신하게 갖추어 명실상부한 골프 전문지로써 면모를 갖추려고 했다. 이것 역시 1년 뒤 다음 해 5월호를 끝으로 일단 폐간됐다. 현재 월간지 <국제골프>는 창간호부터 서울 서초동 소재 '국립중앙도서관'에 보존되어 있다.

<시사골프> : 언론기관이 발간한 골프 전문잡지
 
<시사골프> 창간호 표지
 <시사골프> 창간호 표지
ⓒ 강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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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기 1970년 7월경 발간된 <시사골프>는 '시사통신사'에 의해 창간됐다. <시사골프>는 언론기관에서 발행한 최초의 골프 전문잡지라는데 의의가 있다. 6.25전쟁 중 부산에서 창간된 '시사통신사'는 1964년부터 김희종이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종합 언론기관의 면모를 갖췄고, <시사골프> <안전보장> 등 전문잡지를 발행했다.

새로운 골프 전문잡지가 발간될 당시에 김성곤이 한국골프협회(KGA, 현 대한골프협회) 3대 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그 역시 <시사골프> 창간사를 통해, '골프가 일부 부유층과 특수층의 스포츠로 생각하는 것을 개탄하면서, 새로운 골프 전문지의 발간을 통해 오해를 바로잡고, 골프의 대중화를 성취함으로써 일반 국민의 건강 및 복지 향상에 기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골프총람>, 1973) 성곡 김성곤은 당대 정계와 재계의 거두로서 세간에 알려지기로 집권당의 '금고지기'로 유명했고, 지금에 국민대의 초대 이사장까지 지냈다.

새 월간지 <시사골프> 창간의 의미는 '시사통신사' 김희종 사장의 생각처럼, '골프계를 위한 골프계에 의한 골프계의 잡지'로써 한국골프의 대중화를 위한 또 하나의 메신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골프 전문잡지 <시사골프>는 1979년 6월호로 통권 100호를 기록했는데, 그 이후부터 잡지명을 <월간골프>로 바꿔 현재 'since 1970 월간골프'로 지금도 이어오고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골프 전문잡지라 할만하다. '시사통신사'는 전두환 독재정부 때 언론기관 통폐합조치에 따라 해체되어 새로 설립된 '연합통신사'(현 연합뉴스)에 흡수됐다.

태그:#골프, #골프다이제스트, #월간골프, #한국프로골프협회, #대한골프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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