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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6월 11일 <매일신보>에 실린 '효창원에서 거행한 골프 대회' 사진 기사(지면 오른쪽).
 1923년 6월 11일 <매일신보>에 실린 "효창원에서 거행한 골프 대회" 사진 기사(지면 오른쪽).
ⓒ 매일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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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하지 않는 100주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 100년 전 골프장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시민들은 그리 많지 않다. 주변 시민들한테도 김구, 백정기, 윤봉길, 이봉창 등 애국지사들의 유해를 모신 사적지 또는 백범기념관이 있어 주변 산책로가 더욱 친숙한 도심 공원으로 알려져 있다. 그 자취가 사라져서인지는 몰라도 골프 전문미디어들의 기억 속에도 100주년은 흐릿하다.

도심 공원의 과거 속으로 한걸음 들어가 보면, 먼저 효창원이 어렴풋이 보인다. 원래 효창원은 조선왕조 22대 임금 정조의 어린 장자 문효세자의 묘가 자리했던 곳으로 100여 년 전에는 일제 조선총독부 통치하에 행정구역상으로 경기도 고양군에 속해 있었다. 일제는 이곳 효창원 왕릉 주변을 골프코스로 만들었다.

식민지 조선에 가장 먼저 골프장을 만들겠다고 나선 것은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이사로 있던 안도(安藤又三郞). 1918년 5월께 안도는 당시 외국인 여행객들이 주로 투숙하던 조선호텔의 부대시설로써 골프코스를 계획했다. 골프장 건설사업은 경성철도관리국에서 주관했다. 행정계통상 경성철도관리국장 구보(久保要藏)를 책임자로 해서 조선호텔 지배인이던 이하라(猪原貞雄)의 협조를 받아 호텔 부대시설 확장사업으로 진행해나갔다. 골퍼들의 스포츠 용도가 아닌 관광객 유치용이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경성철도관리국은 조선총독부의 관할이 아니고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서 직영을 했고, 조선호텔은 경성철도관리국의 부설호텔이었다.

하지만 전세계를 강타한 '스페인독감'의 대유행으로 골프장 건설은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도 1918년 말부터 당시 병명으로 '악성 감기'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 다음해 1월에서 4월까지 무려 14만여 명이 사망하는 대재앙을 피할 수 없었다(조선총독부 통계연감 참고). 이같은 팬데믹 상황에서 효창원 골프장 건설계획은 계속 추진돼 골프장 부지 5만8000여 평 임대, 코스 규모 9홀, 소요 예산 6000엔 등이 구체화됐다. 효창원 골프코스의 설계자인 던트(H.E.Dannt)는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1919년 5월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초청으로 처음 경성을 찾을 기회가 있었다. 조선호텔 지배인 이하라는 골퍼는 아니었지만 내가 경성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골프코스에 필요한 모든 토지를 마련한 뒤였고 9홀의 설계만 하면 되는 구체적인 안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단지 티잉그라운드와 벙커, 그리고 그린 위치만 정해주면 족할 정도로 설계가 되어 있었다. 송림이 울창하고 잡초가 무성한 효창원에 손을 댄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효창원은 묘가 산재해 있어 묘를 치워버리면 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었지만 조선인들이 절대로 달갑게 여기지를 않았다. - <한국골프총람>, 1973
 
1919년 3.1운동의 충격파로 식민지 조선에 대한 일본의 통치정책은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변모했다. 3.1운동의 여파가 채 가시지도 않은 상황에서 골프코스 건설은 철저히 관변주도로 계속돼 한국골프의 요람기라 할 수 있는 효창원 골프장 시대를 열었다.

1921년 6월 21일 지금은 기념하지도 않는 한국 최초의 효창원 골프장이 개장했다. 효창원 골프코스의 설계자인 던트도 이미 1923년 출간된 자신의 회고록(< Inaka or Reminiscences of Rokksan and other Roks >)을 통해서 효창원 골프장이 한국골프의 효시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잘못 끼워진 첫 단추

우리에게 <조선골프소사(朝鮮のゴルフ小史)>의 필자로 잘 알려진 다카하다(高畠種夫)는 효창원 골프장의 전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코스는 연붉은색의 황량한 밭 안에 빽빽이 무성한 숲, 확실히 이왕가의 능이 있던 곳으로서 소위 나라에서 나무 베는 것을 금지한 산이었다고 생각한다. ... 한여름이 되면 요란한 매미소리를 들으면서 녹음을 더듬고 물은 적더라도 작은 개천은 있었다. 물이 빠져 바닥의 돌이 드러나는 모습이더라도 그 사이를 왕래했다. 당시로서는 단연 사치스러웠다. 

1921년 효창원 골프장 개장의 의미가 퇴색된 데는 '원산세관 골프코스 기원설'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대한골프협회는 그동안 편찬해 온 <한국 골프사>에서 소위 '다카하다의 구전(口傳)'에 근거한다면서, 영국인에 의해 원산세관 구내에 골프코스가 창설됐다는 그 '기원설'을 추정·주장한다.

1985년 대한골프협회는 한국골프 80년의 발자취를 찾기 위해 한국골프의 초기를 '영국인 전용의 원산골프 코오스' 건축으로 장식했고, 2001년에는 <한국골프 100년>의 출간을 통해서 또다시 "한국 최초의 골프코스는 영국인에 의하여 1900년 원산세관 구내에서 시작되었다고 1940년 11월 일본에서 발행된 <조선골프소사>에서 다카하다는 진술하고 있다"는 이전 주장을 되풀이했다.

하지만 대한골프협회 주장의 근거라고 할 수 있는 <조선골프소사>의 실제 내용은 협회의 주장과는 차이가 커 보인다. 대한골프협회에 의해 주장된 '원산세관 골프코스 기원설'은 사실상 <조선골프소사> 필자의 논지로부터 크게 벗어나 있다. 1940년에 기고된 <조선골프소사>는 그동안 베일에 싸여 있다가 다행스럽게 올해 초 중앙대 손환 교수에 의해 <한국 골프의 탄생>의 부록으로 완역되어 빛을 보게 됐다.

이른바 '원산세관 골프코스 기원설'과 관련된 <조선골프소사> 주요 내용을 요약하면, 20년 전에 필자인 다카하다가 원산에 거주하던 노인으로부터 전해 듣기를 1900년 즈음에 원산세관 구내에 6홀 골프 코스가 외국인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또한 다카하다에 의해 진술된 노인의 구전은 기록을 근거한 역사라기보다는 '촌로(村老)'로부터 전해 들은 옛날 '추억 이야기' 정도로 이해해줄 것을 다음과 같이 애써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그렇고 20년 전의 조선골프를 이야기하는 이상 잊을 수 없는 역사는 아니지만 조선골프의 업적으로서 그 존재만큼은 분명하게 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정말로 옛날이야기에 지나지 않고 기록이나 문헌도 없는 단순한 노인의 이야기로 전해지기 때문에 역사라고는 못하고 업적으로 해두고 싶다. - <한국 골프의 탄생>, 2021

결국, 대한골프협회의 '기원설' 주장은 '다카하다의 구전'을 와전시켜 확대 과장한 측면이 강해 보인다. 구전(口傳)을 곧바로 역사로 끌어들일 때는 그만큼 왜곡될 위험성을 감수해야만 한다. 한국골프의 시작을 주장하는 근거치고는 매우 궁색해 보이고, 그 뿌리 찾기는 첫 단추를 잘못 끼워 섣부른 결론부터 내린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강인구씨는 프리랜서로 역사학 박사입니다.


태그:#효창원골프장, #골프, #원산세관, #대한골프협회, #용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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