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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신기한 일입니다. 온라인에서는 '젠더전쟁'이 일상인데, 오프라인에서 젠더 대화는 거의 전멸 상태입니다. 여학생과 남학생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여학생끼리도 젠더 이슈에 대한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경우가 흔치 않다는 것을 거듭 확인하게 됩니다.

여학생과 남학생 사이는 그렇다 쳐도, 여학생끼리는 왜 그럴까요? 우선 젠더의식이 높다고 생각하는 학생은 그 학생대로, 낮다고 생각하는 학생은 그 학생대로 조심스러워합니다. 예를 들어 본인의 젠더의식이 좀 낮은 수준이라고 여기는 학생은 본인이 '개념 없는 사람'으로 여겨질까 걱정입니다. 다른 동료들은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자신만 모르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에 질문하는 것도 꺼립니다. 그래서 젠더의식이 높은 학생이 어떤 주장을 할 때 잘 모르면서도, 또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갖고 있어도 대충 얼버무리며 지나가곤 합니다.

페미니스트 여학생들은 그들대로 종종 그들이 페미니스트라는 것이 밝혀지는(?) 것을 부담스러워합니다(안타깝지만 현실입니다). 불편하게 여기는 이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말을 주저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서로서로 알아서 '말조심'을 하다 보니 자연스러운 젠더 대화는 자주 실종됩니다.

여학생과 남학생 사이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서로의 생각 차이가 짐작되는 상황에서 갑자기 분위기 싸해지는 리스크를 피해 가는 최선의 방법은 침묵으로 보입니다. 그러다 보니 젊은이들이 젠더 정보를 얻고, 관련 소통(?)을 하는 것은 거의 온라인에 한정되지 않나 의심할 정도입니다.

사회 공론장에서의 젠더 논의와 온라인에서 유통되는 젠더 이야기, 그리고 일상적 젠더 경험 사이에 관찰되는 괴리도 커 보이는데, 이 또한 그저 서로 다른 평행세계처럼 병렬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서로 아무 상관없다는 듯.

학생들과 젠더 수업을 함께 하며 그들의 '소통 부재'로 인해 우리 사회가 치러야 하는 대가에 대해 문득 겁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을 살게 할 수도 죽게 할 수도 있는 것이 말이고, 말을 섞을 수 없는 사람들과 함께 산다는 것은 생지옥, 비슷한 것이 될테니까요.

어떻게든 그들을 서로 만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든 일단 모여서 '햇볕 아래서' 자유롭게 젠더 이슈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많은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생각은 시간이 지나며 확신이 되었지만, 1주일 3시간 수업시간만으로는 너무 부족했습니다.

'프리 토크 젠더'. 그래서 고안한 소규모 젠더 대화 프로그램입니다. 수업이 중반을 향하면서 학생들이 어느 정도 서로에 대해 마음을 열기 시작할 때쯤 이 프로그램을 운영합니다.

방법은 단순합니다. 우리 수업 구성원 세 명(무작위 배정, 부분적으로 성별, 과, 연령, 기존 친분관계 등 고려), 그리고 그 친구들이 데리고 온 세 명(가능한 한 남학생, 일종의 '성우대정책'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남학생을 불러다 앉히는 일이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최대 6명이 최소 2시간 동안 젠더를 주제로 자유로운 대화 나누기. 대화 원칙은 가능한 한 솔직하게, 정확하게 그리고 정중하게.

듣자마자 기대하는 학생들도 있지만, 적잖은 학생들은 이 과제 아닌 듯한 과제에 처음엔 살짝 긴장하고 부담스러워합니다. "과연 대화가 될까?" 경험해본 일이 아닐뿐더러, 아무리 수업에서 만난 사람들이라지만 낯선 사람들과 젠더라는 주제로만 2시간이나 이야기를 하라니.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할 이야기는 있을지, 서먹하진 않을지,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지, 싸우게 되지는 않을지... 젠더의식이 높은 학생이나 젠더에 대한 관심이 크지 않거나 잘 모르면서도 살짝 부정적인 마음이 있는 학생이나 모두 지레 걱정이 많습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이 수상한 과제, 일종의 실험(?)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은 상당히 긍정적입니다. 매주 받는 쪽글, 생각키우기나 프리 토크 젠더에 대한 짧은 보고서에 적힌 소감을 보아도,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눠 보아도 그렇습니다. 재미있었다, 2시간을 훌쩍 넘겼다, 과제가 아니더라도 더 하고 싶다고까지 하는 것을 보면 집단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물론 초반에는 낯설었다, 살짝 불편했다, 다른 생각을 가진 누군가를 이해하고 설득시키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등의 반응도 있지만, 그럼에도 의미 있었다는 반응이 압도적입니다.

학생들이 보여주는 긍정적 반응의 가장 첫 번째 이유는 '신선하다'는 것입니다. 오프라인에서의 젠더 대화 경험 자체는 거의 전무한 채로 온라인에서 서로에게 절망하던 젊은이들. 상당수가 이런 오프라인 젠더 대화 경험 자체가 처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일상이 젠더와 결코 무관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또래들과 젠더를 주제로 자유롭게 그러나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본 경험이 거의 없었다는 겁니다. 스스로 자발적으로 하기는 아마도 어려웠을 일. 물꼬를 터준 보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선생이 해줄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 대화의 장을 마련해주는 것에서 끝납니다. 자리만 만들어지면, 학생들은 알아서 서로에게서 배우며 성장합니다. 우선 서로가 생각보다도 많이 다르다는 것을, 와중에 어떤 점에서는 비슷한 생각을 하기도 한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 자체가 귀중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때로는 생각보다 더 많은 지지와 공감, 연대의식을 느끼며 뿌듯함을 느끼기도 하고, 다른 생각과 주장을 접하며 자신의 입장을 더 정교하게 벼리기도 하고, 자신의 생각이 더 넓어지고 깊어지는 변화를 경험하기도 하지요.

물론 공감하기 어려운 주장들이 오가며 긴장이 형성되기도 하지만, 그 또한 '햇볕 아래서' 하면 건강한 긴장이 됩니다.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주장을 하는 사람에게도 나름의 이유는 있다는 것, 그리고 적어도 그들이 나름 선하게 열심히 살려 노력하는 젊은이라는 것, '괴물'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일은 서로에게 너무 중요합니다. 2시간의 대화를 통해 그들이 대동단결하게 되어서가 아니라, 그 대화가 가능했다는 것 자체가 무한 긍정의 희망을 낳습니다.

희망을 전하는 한 학생의 글 일부를 전합니다.

"이 강의는 비난하는 이 없는 대나무숲이었습니다. 후련하게 내 생각을 마음껏 말할 수 있는 곳, 그러나 비난받지 않는 곳. 수업을 함께 하는 남학우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수이기는 했지만, 그들에게 제가 그토록 하고 싶었던 말을 하며 어떤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제 이야기를 듣는 학우들이 저를 비난하려 하지 않고 제 말을 적어도 들어주려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겠지요.

사실 저는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며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 거라 조금은 단언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가 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믿습니다. 마지막 강의가 끝난 후 두 명의 남학우에게 받았던 메시지는 제 마음에 아주 오랫동안 남아 그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지렛대가 될 것입니다."


일단 만나야 합니다! 직접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들이 어떤 구체적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한 인간으로, 또래의 성인으로 만나 얼굴을 맞대고 편안하게 솔직하게 진지하게 젠더 이야기를 나누는 행위가 가질 수 있는 잠재적 힘을 나는 경험적으로 확신합니다. 그 경험이, 그 기억이 이 친구들을 한뼘 성장시켜 줄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내가 선생으로서 고안해낸 이런저런 과제 중 자칭 TOP 3 안에 들어갑니다). '프리 토크 젠더'를 범시민운동으로 전개해야지 않을까 진지하게 고민 중입니다.

태그:#젠더, #젠더수업, #사회학, #젠더의식,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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