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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후, 주민들과 찍은 단체사진
 공연후, 주민들과 찍은 단체사진
ⓒ 김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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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으로 돌아온 우리는 마을이 됐다

햇수로 4년이 됐다. 매년 1회씩 벌써 4회 공연을 치렀다. 지난 5일, 7시반 무렵 해남종합사회복지관에서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국악공연이었다. 박준호 해남국악전수관 대표의 고향이자 북 치는 고수 인생의 시작점이 됐던 전라남도 해남군 해리 마을에서 공연이 개최됐다.

4년여 동안 총연출을 맡은 박 대표뿐만 아니라, 함께 공연을 진행한 필자 역시 삶의 많은 부분에서 변화를 맞았다. 박 대표는 어느새 세 아이의 아빠가 됐고, 필자 역시 연년생의 두 아들의 아빠가 됐다.

박 대표가 먼저 고향에서 자리를 잡았다. 그 뒤로 필자도 같은 마을에 들어가 보금자리를 꾸렸으며, 우리 팀의 막내인 명예찬도 형들 따라 마을에 안착했다.

공연에 담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다. 여기, 해남 청년들이 있다는 것이다. 출산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꿈을 먹고 자라는 해남 청년들이 여기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귀촌하여 처음 듣는 말이 으레 '농사 지을 거냐', '바닷 일 할 거냐'는 거였다.

혹은 서울 등을 비롯한 다른 도시에서 귀촌한 청년들을 보는 지역의 눈빛에는 안타까움이 묻어 있었다. 성공하지 못한 아이들, 사회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아이들이라는 걱정, 두려움 등이 깔린 시선이었다.

고향에 꿈을 걸고 인생의 출사표를 던지고 왔던 청년들 서넛은 다시 상경했고, 또 서넛은 타 지역으로 전출했다. 그렇게 남은 우리는 지역에서 사고사로 목숨을 잃은 청년을 목격했고, 꿈을 접고 아등바등 살아가는 청년들을 바라봐야만 했다.

박 대표와 필자는 지역주간 신문인 해남우리신문 '청년 논단' 필진으로 각각 1년씩 원고를 썼다. 이 주제와 저 주제를 놓고 갑론을박을 하기도 하고, 문장의 매무새를 다듬으며 몇 번이고 썼던 원고를 퇴근 후 달빛 풍경 삼아 함께 읽으며 고쳤다. 그러면서 사비를 털어 처음으로 해남군 현산면에 있는 새하늘지역아동센터에서 아이들 대상으로 공연을 열었다. 그것이 '해남 청년이 간다'의 시작이었다.

다양한 청년문화예술자원이 해남에 살고 있다는 메시지는 1회부터 3회까지 쭉 담고 있었으며, 이번 4회 때는 그것을 좀 더 명확히 표면에 내세웠다. 지금까지의 공연이 단지 젊은 친구들이 지역의 아이들, 어르신 등 지역주민에게 재능을 선보이는 자리였다면, 이번 공연은 마을 주민을 상석에 앉히고 '함께 놀아봅시다. 놀면서 우리 서로 이해하고, 보듬는 시간을 가집시다'라고 말하는 자리였다. 
 
아리랑 연곡을 함께하는 해남청년이간다4 공연 팀
 아리랑 연곡을 함께하는 해남청년이간다4 공연 팀
ⓒ 김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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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공간 그리고 해남종합사회복지관

북 치는 고수 인생의 시작점이 됐던 해리 마을 위로는 해남군민의 젖줄인 금강저수지가 있다. 지금은 식수환경 조성을 위해 방둑 공사를 했고, 저수지의 물이 깊어 수영을 할 수 없다. 하지만 1990년대 필자의 유년기에는 그곳에서 낚시도 하고 멱을 감는 아이들도 곧잘 있었다. 그 저수지 길 따라 해남 천이 흐르고, 해남종합사회복지관이있다.

컴퓨터 보급이 대중화 되고, 지자체별로 정보화 교육이 실시되던 때, 필자를 비롯한 해남지역 1984년 생들 중에 거기서 컴퓨터를 처음 배운 친구들이 꽤 있었다. 박 대표도 그 중 한 명이었다.

해리 마을 부근에 있는 해남동초등학교에서 수업이 끝나면, 쪼르르 해남천에 달려가 놀다가, 컴퓨터 교육시간이 되면 곧장 복지관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그 3층의 풍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고 박 대표는 회상했다.

박 대표가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해남종합사회복지관과 다른 방식으로 인연을 맺었다. 그곳에 평생교육사 실습 장소를 마련한 것이다. 코로나 시국에 공연 장소를 선뜻 빌려준다는 게 기관의 입장에서 쉬운 건 아니었을 것이다. 이 때 맺은 인연의 영향, 고향, 그리고 마을이라는 삼박자가 합이 돼 공연 성료의 힘이 됐다.
 
청년다운 패기, 손인형 자롱과 함께한 국악공연
 청년다운 패기, 손인형 자롱과 함께한 국악공연
ⓒ 김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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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컬, 청년 브랜드의 탄생

이날 공연에선 해리마을 출신이자 박 대표의 동창인 김희씨가 코로나 시국에 힘든 주민들을 응원하는 메시지와 노래를 영상으로 보내줬다. 그는 서울에서 트롯 가수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 이어, 지역에서 살고 있거나 지역과 인연을 맺은 청년들이 앉은반 설장구, 판소리, 김남주 시낭송, 하모니카 연주, 해금산조병주, 아리랑 연곡을 선보였다.

4년째 행사를 개최하다 보니, 어느새, '해남 청년이 간다'는 하나의 브랜드가 돼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는 공연이 됐다. 처음 우리가 지역주간신문인 해남우리신문 박영자 발행인에게 부탁하여 광고 시안을 만들 때와는 완전 딴판이었다. 더 이상 페이스북, 네이버 밴드에 '우리 공연합니다'라고 올리지 않아도, 한번이라도 이 공연을 접했던 주민들은 공연 장소가 달라도 다시 찾아주셨다.

그중 한 분은 지난해 코로나 때문에 비대면 공연을 한 것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사실 이번 네 번째 공연도 코로나가 종식되지 않은 시점이어서 비대면으로 공연을 치르려고 했으나, 주변 지인들이 그래도 지역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보자는 권유에 따라 급하게 대면 공연으로 바꿨다.
 
행사의 주인공, 마을 주민
 행사의 주인공, 마을 주민
ⓒ 김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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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우리가 하고 싶은 것들
 

공연을 함께 기획하고 진행한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바로 명예찬씨다. 이번에 앉은반 설장구를 주민들 앞에서 선보였다. 그에게는 꿈이 있다. 지역 청년들을 모아 마을마다 풍물 놀이패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꿈을 꿈꾸는 것에만 두지 않을 것이기에, 우리는 첫 장부터 준비를 하기로 했다. 먼저 우리가 지역 청년으로 살아가는 동안 겪으며 해왔던 일들을 책으로 정리하는 일이다. 해남청년기획 네 번째 공연까지 내용을 담아 책으로 집필하고 오는 9월쯤에는 해남에 새롭게 지어지는 해남청년 두드림 센터에서 북콘서트를 해보겠다는 계획이다.

그보다 앞서 8월쯤에는 지역의 다른 청년들과 결합하여 '해남 청년 여기 있어요'라는 컨셉의 난장터 퍼포먼스를 해볼 계획이다. 그것들을 준비하느라, 비록 해남 청년이 간다 공연은 끝났어도, 당분간 우리는 쉬지 않기로 했다.
 
해남청년이간다를 함께 진행한 해남청년 3인
왼쪽부터, 명예찬, 김성훈(필자), 박준호
 해남청년이간다를 함께 진행한 해남청년 3인 왼쪽부터, 명예찬, 김성훈(필자), 박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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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해남국악전수관, #해남청년이간다, #해남군, #해남종합사회복지관, #김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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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생. 전남대학교 일반대학원 문화재협동학 박사과정 목포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학석사. 명지대 문예창작학과졸업. 융합예술교육강사 로컬문화콘텐츠기획기업, 문화마실<이야기>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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