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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제주살이 4년차에 접어들었다. 그 사이에 거셌던 제주 러시 현상은 다소 진정된 듯하다. 그러나 아직도 제주 이주를 꿈꾸는 사람들이 적지 않고, 제주 1년 살이 혹은 1달 살이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뜨겁다. 이 글은 동아일보 기자와 세종대 초빙교수를 지내고 은퇴한 후 제주로 이주한 한 개인의 일기이자 제주에서의 생활을 소재로 한 수필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제주도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에게 제주의 자연환경,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한국현대사의 축소판이라 할 제주사회를 이해하는 데 유익한 읽을거리가 되길 기대한다.[편집자말]
제주 제2공항 건설을 반대하는 집회가 수년간 계속 진행돼 왔다.
 제주 제2공항 건설을 반대하는 집회가 수년간 계속 진행돼 왔다.
ⓒ 제주환경운동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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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많고 탈도 많은 제주 제2공항 건설을 계속 추진할지 아니면 취소하거나 제3의 방안을 제시할지 정부의 결정이 임박한 분위기다. 환경부가 제2공항에 대한 전략환경영향평가 재보완서를 심의 중이고, 그 결과 '동의' 혹은 '부동의' 의견을 국토부에 보내면 이를 토대로 최종결론을 낼 것이라는 이야기다.

7일 자 <한라일보>를 보니 7월 안에 가부간 결정이 나올 것도 같다. 제주로 이주한 후 격화되기 시작한 지역 최대 이슈가 마침내 결말의 순간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니 그동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

2018년 11월 하순의 어느 날, 아침에 TV에서 제주지역 뉴스를 보고 있는데, 낯익은 얼굴이 비쳤다. 제주 제2공항 사전타당성 재조사 검토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K 교수였다.

제주 출신으로 신문사 재직 시절 한 부서에 근무했던 후배다. 뒤늦게 사표를 내고 유학을 가 박사 학위를 따고 돌아온 친구로, 전공 분야가 갈등 해결학이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갈등해결연구소장을 맡고 있었다. 사회적 갈등이 심한 한국 사회에서 할 일이 많을 것이라고 짐작은 했지만, 제주공항을 둘러싼 문제에 해결사 역할을 하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그러지 않아도 제2공항에 대해 개인적으로도 우려가 컸던 터여서 오랜만에 얼굴도 볼 겸 궁금증도 풀 겸 해서 전화를 걸었다. 내가 제주에 내려와 사는 줄 몰랐다며 깜짝 놀란다. 마침 밤 비행기로 서울에 갈 예정이라고 해서 저녁 식사를 하기로 약속했다.

옛날이야기도 하고 제주 이야기도 나누다가 화제가 자연스럽게 제주공항 문제로 이어졌다. K 교수는 무척 조심스러워했다. 찬반 양측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이슈를 중립적인 위치에서 다루어야 하는 위원회의 운영 책임자인 만큼 사적인 자리라 해도 어느 한쪽에 기울어진 태도를 보여서는 곤란할 터였다.

검토위원회의 내부 분위기나 향후 전망 등에 관해 언론에 발표되지 않는 정보를 듣고 싶었지만 K 교수의 입장을 고려해 자꾸 캐물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공론조사나 주민투표 심층 여론조사 같은 방식으로 주민들의 의사를 파악하는 문제가 앞으로 중요하게 대두될 것 같다고 전망했다.

반대가 근소하게 높아
 
제주도청 앞 도로변에는 각종 플래카드가 내걸려 제2공항에 대한 찬반의사를 밝히고 있다.
▲ 제주도청 앞에 내걸린 플래카드 제주도청 앞 도로변에는 각종 플래카드가 내걸려 제2공항에 대한 찬반의사를 밝히고 있다.
ⓒ 황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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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교수와 만나 제2공항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눈 이후 관심이 더욱 커졌다. 마침 천주교 제주교구에서도 미사 전에 '제주를 살리기 위한 기도'를 바치도록 해 매주 새 공항 건설이 초래할 환경 파괴를 경고하는 기도문을 접하게 됐다. 개인적으로도 가톨릭 신자로서 기도문의 내용에 공감을 했고, 더 이상 개발과 성장의 논리로 제주도라는 천혜의 보물섬을 파괴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됐다.

제2공항을 둘러싼 찬성 측과 반대 측의 대립과 갈등은 날이 갈수록 고조돼갔고, 결국은 우여곡절 끝에 K 교수의 예상대로 도민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를 하기에 이르렀다. 여론조사를 앞두고 치열한 찬반 여론전이 벌어졌다. 제주 지역 신문에 게재된 찬반 양측의 광고를 살펴보니, 관광 관련 업계와 건설업계 등 경기에 민감한 업계가 찬성 광고에, 각종 시민단체와 환경단체 등은 반대 광고에 명단을 올렸다.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된 지난 2월 18일 저녁 8시. 마음 졸이며 TV 발표를 지켜봤다. 일단 전체 도민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반대가 근소하게 높은 것으로 나왔다. 다만, 공항이 들어설 성산읍 주민만 따로 조사한 결과는 찬성이 높았다. 지역적으로는 제2공항 예정지와 가까운 제주도 동쪽 지역에서 찬성 여론이, 거리가 먼 서쪽 지역이나 제주 시내 지역에선 반대 여론이 높은 것으로 나왔다.

이런 여론조사 결과를 보니 이 문제를 깔끔하게 매듭짓기가 참 쉽지 않겠구나, 갈등이 해소되기는커녕 잘못하면 더 심해질 수도 있겠구나,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어느 한쪽으로 확 쏠렸어야 결론을 내리기가 수월할 텐데, 찬반 양측이 서로 유리한 주장을 내세울 명분이 생겼으니 말이다. 아쉬움이 크게 남는 결과였다. 한편으론 그래도 다행스런 결과가 나왔다는 생각도 들었다.

비록 격차는 작았지만 그리고 제2공항 예정지인 성산읍 주민은 찬성이 높았지만, 어쨌든 전체 제주도민의 의사는 반대가 우세한 것으로 나타났으니 새로운 공항 건설은 취소 쪽으로 가닥이 잡힐 것이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원희룡 제주도지사다. 도지사는 여론조사를 하기로 한 후에도 공공연히 그 결과에 구애받지 않을 생각임을 밝혀왔다. 이렇게 되면 제주 사회가 또다시 격렬한 대립의 소용돌이에 말려 들어가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섰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한 사람이 떠오른다. 박찬식 제주 제2공항 강행저지비상도민회의 상임대표. 그러니까 제2공항 반대 측의 선봉장인 셈이다. 그런데 이 분의 경력이 매우 흥미롭다. 특히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원희룡 도지사와는 대조적인 길을 걸어온, 친구이자 라이벌이라는 점이었다.

원희룡 vs. 박찬식
 
원희룡 제주도지사(왼쪽)와 박찬식 제주 제2공항 강행저지비상도민회의 상임대표(오른쪽)
 원희룡 제주도지사(왼쪽)와 박찬식 제주 제2공항 강행저지비상도민회의 상임대표(오른쪽)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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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희룡 하면 수석 인생의 주인공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제주 제일고 출신의 원희룡이 학력고사 전국 수석을 기록하며 1982년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고, 사법고시에서도 수석 합격한 것은 유명하다. 박찬식은 제주 오현고 출신으로 역시 같은 해 서울대 법대에 합격한 수재다. 고향도 두 사람 모두 서귀포 중문 출신이다. 한 고향 출신으로, 제주도에서 성적 1, 2등을 다투었던 라이벌이었다는 것이다.

대학에 입학한 이후의 진로는 서로 어긋난다. 원희룡은 사법시험에 합격해 검사와 변호사로 활약하다가 한나라당에 영입돼 국회의원이 됐다. 그리고 3선 국회의원에 이어 제주도지사에 두 차례 당선되었으니 한마디로 출세 가도를 달려온 전형적인 사례다.

반면 박찬식은 서울대 입학 후 운동권 학생이 되어 출세와는 먼 길을 걸었다. 서울대 총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해 김민석 현 민주당 국회의원에게 패했을 정도로 학생운동에 깊숙이 뛰어들었다. 박찬식은 그 후 노동운동에 투신해 두 차례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제주 4·3 진실규명과 명예 회복 운동을 이끌기도 했던 그는, 제2공항 문제가 제주 사회의 최대 쟁점이 되자 아예 서울 생활을 접고 제주로 돌아와 반대 투쟁의 선봉장이 됐다.

두 사람이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2019년 9월 KBS 제주방송에서 제2공항을 이슈로 맞장 토론을 한 것이 결정적 계기였다. 나 역시 흥미롭게 두 라이벌의 TV토론을 지켜보았다. 도지사의 공항 건설 추진 의지에 맞서 조목조목 반론을 펴는 80분간의 대격돌이었다. 그 후에도 박찬식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제주도민의 뜻에 따라 공항 건설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요구하며 단식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제주도민을 상대로 공항 건설에 대한 찬반을 묻는 여론조사가 진행된 것은 어떻게 보면 박찬식 상임대표가 요구한 '도민의 뜻'을 물어본 셈이다. 주민투표나 공론조사 같은 보다 확실한 의견수렴 방식에는 못 미치지만 여론조사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여겨진다. 제주 사회에서 제2공항 문제가 오랜 시간 격렬한 찬반 논란을 거쳐 왔기 때문에 도민 대부분이 찬성 혹은 반대에 대한 나름대로의 근거와 논리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제주도 내 9개 언론사가 공동으로, 그것도 두 군데 업체에 의뢰해 중립적인 설문으로 진행한 여론조사 결과는 거의 정확하게 제주도민들의 의사를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찬반의 격차가 크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제주도민의 뜻은 공항 건설 반대에 더 무게가 실려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박찬식 상임대표는 결과 발표 당일 인터넷신문 <제주의 소리> 긴급토론에 나와 제주도민의 의사를 받아들여 정부가 공항 건설을 중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만약 도민 다수의 의사에도 불구하고 공항 건설이 계속 추진된다면 강정해군기지 건설을 둘러싼 갈등보다도 더 심각한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제주도가 더 많은 관광객을 과연 수용할 수 있겠느냐는 문제의식이 제기되는 시점에서 제2공항 문제에 대해 다수가 반대 의사를 표출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었다.

5조 원 거부한 제주도민의 뜻
 
현 제주공항의 여행객 처리능력 확충 문제에 대해서도 찬반 양측은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
▲ 도두봉에서 내려다본 제주공항 현 제주공항의 여행객 처리능력 확충 문제에 대해서도 찬반 양측은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
ⓒ 황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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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긴급토론에서 참석자들은 제주 역사상 최초로 제주도민들이 자기 결정권을 행사했다는 점을 의미 있게 평가했다. 제주도는 항상 중앙권력에 의해 지배당하고 때로는 탄압을 받기도 했으며 이로 인해 피해의식을 갖고 살아왔으나, 이번 제2공항 문제를 두고 내부적으로 치열하게 격론을 주고받았고 마침내 도민 여론조사로 주체적인 의사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앞으로의 제주발전에 원동력이 될 것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특히 제주도 1년 예산에 맞먹는 5조 원 이상을 투입해 제2공항을 건설해주겠다는 정부안을 거부한 도민들의 뜻을 잘 살펴야 한다는 지적이 인상적이었다. 제주도민이 무엇을 진정한 제주발전의 가치로 생각하고 있는지를 새겨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동감이 가는 이야기다. 천문학적인 돈으로 공항을 새로 짓고, 길을 넓히고, 그래서 더 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일 수 있도록 하자는 '발전의 청사진'에 대해 다수의 제주도민들이 "NO"라고 한 깊은 뜻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지적은 단순히 제2공항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닐 게다. 더 이상 성장 일변도로 치달아 환경이 파괴되고, 기후가 왜곡되고, 그 결과 신종 바이러스가 온 인류를 위협하는 악순환을 방치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제 공은 정부에 넘어갔다. 문 대통령도 제주도민의 의사를 존중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반드시 약속을 지켜야 한다. 지나치게 눈치를 보며 시간을 끌어온 국토부와 환경부 관료들에게 책임을 떠넘길 게 아니라 대통령의 결단으로 갈등을 종식시키고 후유증을 최소화하는 조치를 강구해야만 한다.

관광객이 무한정으로 늘어나는 것이 제주 발전이라는 왜곡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제주가 보유한 천혜의 환경을 보존함으로써 제주가 제주다움을 지켜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2021.7)

(편집자 주) '제주살이를 꿈꾸는 당신에게'는 날짜순으로 연재하고 있으나 시사적인 이슈나 계절 요인 등을 고려해 게재 순서를 일부 조정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태그:#제주 제2공항, #제주도민여론조사, #원희룡, #박찬식, #전략환경영향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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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봄 제주로 이주했다.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과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 그리고 제주현대사의 아픔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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