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앞에 삼일공원 횃불탑이 있고, 멀리 유관순 열사상이 보인다. 사당동에 삼일공원이 들어선 것은 1990년이지만, 처음 3만평 규모의 삼일공원 부지가 지정된 것은 1967년이었다.
▲ 사당동 삼일공원 앞에 삼일공원 횃불탑이 있고, 멀리 유관순 열사상이 보인다. 사당동에 삼일공원이 들어선 것은 1990년이지만, 처음 3만평 규모의 삼일공원 부지가 지정된 것은 1967년이었다.
ⓒ 김학규

관련사진보기

 
전국에는 충북 청주의 삼일(3.1)공원을 비롯하여 수많은 삼일공원이 있다. 청주의 삼일공원이 민족대표 33인 중 충북출신 5명(손병희, 권동진, 권병덕, 신홍식, 신석구)의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조성되었듯이 대개 해당 지역의 3.1운동을 기억하고 기리기 위해 조성된 공원이 삼일공원이다.

서울남성초등학교(서울 동작구) 바로 옆에 조성되어 있는 삼일공원도 1919년에 있었던 3.1운동의 독립정신을 기리는 취지에서 조성된 공원이다. 인근에는 삼일공원의 이름을 딴 삼일초등학교까지 있다. 그러다 보니 이곳이 일제강점기 3.1운동이 벌어진 장소가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3.1운동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장소이다. 게다가 동작지역이나 사당지역의 3.1운동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공원도 아니다.

그렇다면 왜 이곳에 삼일공원이 있는 것일까. 서울 동작구 사당동 삼일공원의 역사는 19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1년 5.16 군사 정변을 통해 집권한 박정희 정권도 이승만 정권과 마찬가지로 친일청산이나 독립운동의 역사를 기리는 일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박정희는 오히려 한국 민족의 나태와 가난이라는 부정적 측면을 부각시키면서 경제개발을 강조하는 입장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최은희(1904~1984)가 1967년 4월 15일 자 <동아일보>에 "아직도 독립공원이 없는 게 좀 부끄럽지 않는가!"라면서 독립공원을 설립해야 한다는 취지로 기고문을 발표한다.

박정희 정권도 최은희의 문제제기를 그대로 외면하기는 힘들었는지, 기고가 있은 지 불과 한 달 만에 사당동에 3만여 평 규모의 국유지를 삼일공원 부지로 지정했다. 이렇게 해서 사당동 삼일공원 자리는 대한민국 최초의 독립공원 부지가 됐다.

최은희는 누구?
 
최은희는 1967년 독립공원 설립을 제안한 직후에는 3·1여성동지회 결성을 주도하기도 했고, 이후에도 3·1여성국민회의 대표위원(1971)과  3·1운동여성참가자봉사회장(1981)을 맡는 등 1919년의 3·1 운동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 최은희가 1967년 동아일보에 투고한 "독립공원 설립을 제안한다"는 제목의 글 최은희는 1967년 독립공원 설립을 제안한 직후에는 3·1여성동지회 결성을 주도하기도 했고, 이후에도 3·1여성국민회의 대표위원(1971)과 3·1운동여성참가자봉사회장(1981)을 맡는 등 1919년의 3·1 운동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 동아일보

관련사진보기

   
최은희는 1967년 독립공원 설립을 제안한 직후에는 3.1여성동지회 결성을 주도하기도 했고, 1971년에는 3.1여성국민회의 대표위원, 1981년에는 3.1운동여성참가자봉사회장을 맡는 등 1919년 3.1운동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경성여고보 재학 시절 열여섯의 나이로 3.1만세운동에 참여해서 두 번이나 체포되어 6개월간 옥살이를 했을 뿐만 아니라, 대표적인 민족협동전선 신간회의 자매단체 근우회에서 중앙집행위원을 지내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최은희는 최은희여기자상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최은희가 기자 생활을 시작한 것은 3.1운동 이후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1924년 이광수의 부인 허영숙의 소개로 그해 10월부터 <조선일보>의 '부인기자'로 일하면서부터였다.

최은희가 일간신문 최초의 여성 기자가 되지 못한 것은 1920년 7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매일신보> 기자로 최은희보다 먼저 일한 이각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최은희가 <조선일보>에 입사한 다음 해에는 허정숙이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해 일했다. 최은희는 민간신문 최초의 여성 기자였던 셈이다.

최은희는 1924년 입사 직후 행랑어멈으로 변장해 취재에 뛰어들었는가 하면, 비행기를 타고 경성상공을 날면서 취재하는 등 열성 기자로 맹위를 떨친 인물이었다. 최은희의 유언에 따라 제정되어 <조선일보>가 1984년부터 해마다 시상하는 최은희여기자상은 여성 기자들에게는 가장 명예로운 상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최은희는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부터 해방을 맞은 1945년까지 40년 기간 속에서 한국 여성의 독립운동 활동 비사를 원고지 6000매 분량으로 집필해 <조국을 찾기까지>(1973)라는 제목으로 발간하기도 했다.

박정희의 꼼수

그런데 당시 박정희 정권은 '독립공원' 조성 같은 데는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 정권은 갓 서울에 편입돼 비교적 땅값이 싼 사당동에 부지만 지정해놓고 실제 공원 조성은 예산을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는 꼼수를 부린다.

이는 비슷한 시기 3.1빌딩이나, 3.1시민아파트, 3.1고가도로의 신속한 건설과도 대비된다. 관철동에 있는 3.1빌딩은 63빌딩이 건설되기 전까지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빌딩이었고, 청계천변 황학동에 있었던 3.1시민아파트는 1969년부터 서울시가 대대적으로 건립한 시민아파트였다. 84년부터 청계고가도로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청계천 복원' 과정에서 철거된 3.1고가도로 역시 경제 개발의 상징이었다.

이러한 사업은 독립공원 조성사업과 달리 본래 목표인 경제개발에 충실하면서도 단지 이름만 붙임으로써 3.1만세운동 같은 독립운동의 역사도 신경 쓰는 듯이 생색낼 수 있는 일석이조 효과가 있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최은희를 비롯한 3.1여성동지회의 '헌수 운동'으로 민족대표 33인 중 유일한 생존자였던 이갑성까지 나서고, 중앙대생 1200여 명도 참여하여 무궁화를 비롯하여 상록수, 정원수 등 7만여 그루를 심으면서 애지중지 가꿨음에도 실질적인 진척이 이루어질 리 없었다.
  
최은희를 비롯한 3·1여성동지회는 삼일공원 부지에 나무를 심고자 ‘헌수 운동’을 벌여 민족대표 33인 중 유일한 생존자였던 이갑성까지 나서고 중앙대생 1,200여명도 참여하여 무궁화를 비롯하여 상록수, 정원수 등 7만여 그루를 심으면서 애지중지 가꿨다.
▲ 삼일공원 부지에 나무를 심고 있는 최은희 최은희를 비롯한 3·1여성동지회는 삼일공원 부지에 나무를 심고자 ‘헌수 운동’을 벌여 민족대표 33인 중 유일한 생존자였던 이갑성까지 나서고 중앙대생 1,200여명도 참여하여 무궁화를 비롯하여 상록수, 정원수 등 7만여 그루를 심으면서 애지중지 가꿨다.
ⓒ 서울시

관련사진보기

 
심지어 부지로 지정된 지 1년여 만인 1968년부터는 이촌동·청계천에서 강제 철거당하면서 갈 곳 없는 사람들이 무허가 건물을 2000여 동이나 지어 이주해오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들이 처음 삼일공원 부지에 들어온 것은 광주대단지로 이주하기 전 잠시 거주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1970년 봄까지도 광주대단지 부지 조성이 되지 않아 기약 없이 사당동에 머무르게 됐던 것이다.

이들은 서울시에 다른 적지를 물색해서라도 정착지를 마련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었지만, 서울시는 그마저도 외면했다. 이에 따라 사당동 삼일공원 조성은 더 어려움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결국 최은희는 1972년에 이르러 박정희의 처조카사위이자 이 지역 국회의원(영등포구갑)이던 장덕진이, 방배동에 5000평 규모의 대체 부지를 삼일공원 용지로 기증받을 수 있도록 알선해줬다면서 나머지 5000평을 더 확보해 1만평 규모의 삼일공원을 조성하기 위한 추진위원회 설립과 함께 6월 상순에 기공할 예정이라고 언론에 새롭게 밝히기에 이른다.

아예 '사당동 삼일공원' 조성 자체가 공식적으로 취소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방배동 삼일공원 조성 계획 역시 구체적인 사정까지 다 알 수는 없으나, 최은희의 바람과 달리 결국엔 성사되지 않았다.

삼일공원, 정작 최은희는 없다

사당동 독립공원 부지에 삼일공원이 실제로 조성되는 것은 한참 세월이 흐른 후인 1990년 일이다(최은희는 1984년 사망). 이때는 이미 유관순 열사가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천안의 아우내장터 근처에 1987년 독립기념관이 조성된 뒤였기 때문에 최초의 독립공원 지위는 부여받을 수 없었다. 공원조성 주체도 중앙정부가 아니라 동작구라는 지방자치단체였다. 그 시작은 창대했으나, 그 끝은 너무나 초라했던 것이다.

그동안 사당동 삼일공원에는 '3.1 라이온스 클럽'의 이름으로 세운 횃불탑 하나만이 이곳이 삼일공원임을 알리고 있었을 뿐 변변한 기념시설 하나 없었다. 다행히 2018년 한국여기자협회가 역상조각 형식의 유관순 열사상을 서울대 미대 이용덕 교수(서울대 미대)에 의뢰하여 건립했고, 독립선언서 새김돌도 세워졌다. 최근에는 안중근 의사와 유관순 열사를 소개하는 시설도 추가됐고, 공원 입구에는 독립운동 관련 벽화도 조성됐다. 이 과정에서 사당3동의 주민자치위원회, 주민자치회를 비롯한 지역주민들이 주민참여예산제를 활용한 예산확보에 앞장서는 등 큰 역할을 했다. 이로써 삼일공원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삼일공원에는 1919년 3.1 운동 당시 손병희를 비롯한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발표된 '기미독립선언서' 새김돌도 세워져 있다.
▲ 기미독립선언서 새김돌 삼일공원에는 1919년 3.1 운동 당시 손병희를 비롯한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발표된 "기미독립선언서" 새김돌도 세워져 있다.
ⓒ 김학규

관련사진보기

 
그럼에도 삼일공원에 들어서면 여전히 뭔가 허전함이 느껴지곤 한다. 현 삼일공원이 들어서는 계기를 마련한 독립운동가 최은희는 이곳 삼일공원에서 숨결조차 느끼기 힘들고, '3.23 노량진 만세운동'과 같은 동작지역의 독립운동의 역사는 물론 3.1운동에 참여한 심훈을 비롯한 독립운동에 참여한 동작 사람들 이야기를 전혀 찾을 수 없기 때문이리라.

한국여기자협회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추진 당시의 사정을 밝힌 바 있다.

삼일공원은 한국 최초의 여기자 최은희가 1967년 4월15일 '독립공원을 설립해야 한다'는 취지의 글을 신문에 기고한 것이 계기가 돼 조성된 공원으로 알려져 있다. 이같은 이유로 애초 공원 내 여성언론인 기념동상 건립이 추진됐다. …… 한국여기자협회는 56년의 전통을 지닌 국내 유일의 현직 여기자 모임으로서 여성언론인 기념동상 사업을 맡기로 했다. 그러나 추진과정에서 서울시 동작구청이 삼일공원 안에 세워지는 만큼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뜻에서 유관순 열사 동상을 특정하면서 변경이 불가피해졌다. (한국여기자협회, '여기자 협회, 유관순 열사 동상 건립 추진', 2017. 6. 9)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이 있었음에도 2021년 현재 남성 독립운동가는 안중근, 여성 독립운동가는 유관순으로만 일색화·단순화되는 현실이 안타까운 이유다.

태그:#사당동, #삼일공원, #최은희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동작구 근현대 역사산책>(2022) <현충원 역사산책>(2022), <낭만과 전설의 동작구>(2015) 등이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