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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돈을 써야만 행복할 수 있을까요? 소비하지 않고도 재밌고 다채롭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분명 있을 겁니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의 '무소비 OO'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편집자말]
코로나로 인해 마스크를 끼는 날이 지속되면서, 화장에 회의감을 느끼는 이들이 많아졌다.
 코로나로 인해 마스크를 끼는 날이 지속되면서, 화장에 회의감을 느끼는 이들이 많아졌다.
ⓒ elements.enva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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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가 지속되면서 화장을 포기했다. 아무리 정성껏 칠해도 마스크를 끼면 뚝딱 가려지니, 보람을 느낄 수가 없다. 덕분에 파우치가 가벼워졌다. 선크림 하나만 달랑 들고 다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어째 이것저것 공들여 발랐을 때보다 얼굴이 더욱 생기 있어진 것 같다. 주변 사람들 반응도 비슷하다. 실컷 두 시간 동안 정성 들여 화장을 하고 나갔을 땐 딱히 반응이 없었는데, 지금은 얼굴이 좋아졌다고 한다.

코로나는 뜬금없이 내가 외면하고 살았던 현실을 직시하게 했다. 그렇다. 나는 딱히 화장이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간 쓴 돈이 아까워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인정해야 했다, 아무것도 안 한 게 더 낫다
 
화장품에 돈을 쓸수록 예뻐진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화장품에 돈을 쓸수록 예뻐진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 정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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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성인이 되었을 때였다. 그땐 무슨 바람인지 꼭 화장을 해보고 싶었다. 왠지 아침에 일어나 쿠션 팩트를 톡톡 치는 모습은 진정한 어른 같았고, 나도 컴퓨터로만 하는 화장 게임이 아니라 실제로 아이라인이나 마스카라를 해보고 싶었다. 유독 학생 같아 보이는 얼굴 탓에 아이 티를 벗어나겠다는 막연한 오기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돈을 쓸수록 예뻐진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착각은 몇 달 뒤 홀로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가면서 깨졌다. 이탈리아 두오모의 463개 계단을 오르고, 그리스 메테오라 산 꼭대기 투어를 다니다 보니 또다시 화장은 뒷전이 되었다. 통풍 잘 되는 티셔츠, 질끈 묶은 머리끈, 선크림 하나면 충분했다. 험난한 일정에 치여 추노 같은 차림새로 사진을 찍었지만, 주변 사람들은 화장을 했을 때보다 이 모습이 더 자연스럽고 귀엽다고 해주었다.

그렇게 돈을 썼는데 아무것도 안 한 게 더 낫다니! 누군가는 배부른 소리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화장품을 샀다. 그땐 왠지 모르게 맨얼굴은 아이 같아 부끄러웠고, 정성 들여 꾸며야 진정 나를 위해 부지런히 노력한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코로나는 돈을 써도 보람을 느낄 수 없게 했다. 나는 이 기회에 소비하지 않고 스스로 가꾸는 방법을 찾기로 했다. 먼저 고이 모셔놓고 포장지도 벗기지 않았던 화장품들을 처분했다. 그렇게 크던 파우치가 한 손에 쏙 들어왔다. 최소한의 선크림, 아이브로우, 틴트만 남겼다.

외출을 앞두고 아이브로우로 평소처럼 눈썹이라도 그렸는데, 유독 라인이 지저분해 보인다. 그 전에는 온갖 화장품을 바른다고 눈썹 정도야 대충 넘어갔었는데, 마스크를 끼니까 더 눈에 띄는 듯하다. 집에 굴러다니던 면봉으로 눈썹 라인의 지저분한 칠을 지워주었다.

왠지 사람이 훨씬 깔끔해 보인다. 립스틱이나 눈썹은 칠하는 것보다 지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던 한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말이 생각났다. 선크림 하나 바르고 눈썹 칠하고 나니 준비가 끝났다. 1시간 걸리던 화장이 15분 만에 끝났다.

한달 화장품 값 만원 이하가 불러온 변화   
 
화장품 구입 지출이 줄면서 간소해진 파우치.
 화장품 구입 지출이 줄면서 간소해진 파우치.
ⓒ 정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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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시간이 붕 떴다. 원래 같으면 벌써부터 기를 다 쏟아부어 정작 외출하기 전에 기진맥진일텐데, 오늘은 쌩쌩하다. 괜시리 거울 앞에 서서 자세를 고쳐보았다. 인상이 깔끔해진 것 같으니 허리를 괜히 한번 더 펴보고, 머리도 누가 위에서 잡아당긴 듯이 길게 뺀다. 화장품을 정리해 파우치가 든 가방이 가벼워지니 한쪽 어깨도 구부정하지 않다. 실컷 자세를 신경 써보고 거울을 들여다보는데도 시간이 여유롭다.

평소처럼 허둥대지 않고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약속 장소에 갔더니 친구들이 좋은 일 있냐고 물어본다. 마스크를 꼈는데도 기분이 느껴지다니! 놀라운 발견이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타인의 얼굴만 집중해서 보지 않고, 신체의 모든 것에서 감정을 느끼는 듯했다. 사소한 요소만 바꿨을 뿐, 돈과 시간은 훨씬 적게 들었는데 주변에서 나를 자신감 있는 사람으로 봐주기 시작했다. 얼굴에만 신경 썼던 그간의 시간들이 약간 아까워졌다. 

놀랍게도 이후로 한 달에 화장품 값으로 나가는 돈이 만 원 이하로 줄었다. 대신 자세를 고쳐 잡고, 최소한의 화장을 더욱 깔끔하게 하고, 어투 하나까지도 신경 써보면서 내 자신을 가꾸었다. 이쯤 되면 가장 효율적인 미용도구는 '나 자신'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전에는 칠하는 것만이 꾸미는 과정이라 여겼다면, 이제는 덜어내고 효율적으로 살아가는 것 또한 꾸미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미니멀리즘이 꼭 인테리어에만 적용되는 것일까. 코로나로 인해 마스크를 끼는 날이 지속되면서, 화장에 회의감을 느끼는 이들이 많아졌다. 그렇다면 들여다보자. 칠에 덮여 있던 내 안에 가꿀 수 있는 무언가를. 때로는 덜어내는 것이 칠하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것, 코로나가 뜻밖에 전해다 준 '가성비 미용법' 아닐까.

태그:#코로나, #화장품, #파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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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정누리입니다. snflsnfl83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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