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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근씨가 30년 싸움 끝에 되찾은 충남 논산시 벌곡면 일대 문중 땅.
 안동근씨가 30년 싸움 끝에 되찾은 충남 논산시 벌곡면 일대 문중 땅.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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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부가 일본 헌병을 피해 만주로 피신한 지 110여 년 만에 한 문중 종손이 토지소유권을 되찾았다. 공동 지분으로 이름을 올린 충남 논산시 벌곡면 일대 임야만 수십만 평(501,148㎡, 약 15만 여 평)에 이른다.

땅을 되찾기까지 과정을 보면 곡절의 한국 근현대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비극의 근현대사가 겹쳐있는 한 종손의 땅찾기

지난 17일 대전지방법원 논산지원 등기소에서 토지 등기권리증을 받아든 안동근(60)씨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안씨는 순흥안씨 감찰공후 사복시정공 신양종중(아래 사복시정공 신양종중)의 28대 종손이다. 그는 지난 1990년 무렵부터 약 30여 년간 가짜 종중에 빼앗긴 땅을 되찾겠다며 동분서주해왔다.

그의 할아버지인 안병덕(족보명 안인순, 1885년생)은 조선 말기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항일운동 자금으로 지원했다. 1910년 나라를 빼앗기자 안병덕은 일본 헌병의 탄압을 피해 당시 5살이던 아들과 만주로 피신했다. 당시 모든 부동산은 문서와 함께 문중의 재산관리인인 A씨(순흥 안씨 25대손, 1873년생)에게 맡겼다.

이후 조선총독부가 토지조사령에 따라 토지조사를 시작하자 A씨는 안병덕 종중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 이름으로 소유권을 분산(명의신탁, 소유자 명의를 다른 사람 이름으로 해놓는 것)했다. A씨는 자신의 후손들이 임의처분할 것을 염려해 두 아들에게도 일절 상속하지 않았다. A씨는 또 해방 후에도 안병덕이 돌아오지 않자 자녀와 명의 소유자들에게 '종손(안병덕, 안상옥)이나 그 가족들이 고향을 찾아오면 소유권을 환원하라'고 유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안병덕은 만주로 간 지 얼마 안 돼 5살 아들을 남기고 40살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 이후 안병덕의 아들(안상옥, 27대손)과 손자(안동근 등)들도 오랫동안 고향의 존재를 모른 채 경기도 등 타지에서 풍파를 겪었다.

1948년 A씨가 사망하자 명의신탁했던 안병덕 종중의 토지가 하나둘 다른 사람들의 소유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특히 1965년 농지개혁을 겸한 특별조치법 시행 때와 1980년 전후 토지임야령 및 특별조치법 시행 때 A씨의 손자와 증손자, 또는 증손자가 주도해 만든 또 다른 종중과 측근들에게 대부분 땅이 넘어갔다.

타지를 전전하며 살아오다 지난 1989년 뒤늦게 고향을 찾은 안동근(안병덕의 손자) 등 안병덕의 후손들은 경악했다. 선조의 묘소는 제대로 돌보지 않아 허물어져 있었다. 게다가 종중 땅은 다른 종중 또는 다른 사람 명의로 돼 있었다.

토지대장 위조하고 비석까지 고쳐
 
20대 시조인 안여택의 묘지를 찾은 안동근씨
 20대 시조인 안여택의 묘지를 찾은 안동근씨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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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취재진과 만난 안동근씨는 "확인 결과, A씨의 손자와 증손자가 각각 토지가 있는 면사무소에 근무하면서 해당 토지를 직접 매수한 것처럼 토지대장을 위조, 변조하는 방법으로 측근 또는 자신들 땅으로 서류를 바꿔 소유권을 가로챘다"고 말했다.

A씨 손자는 논란의 토지가 있는 해당 면사무소에서 1960년부터 1970년까지 근무했고 면장까지 지냈다. 증손자는 같은 면사무소 또는 면과 읍사무소에서 1980년부터 1993년까지 근무했고 면장과 읍장까지 지냈다.

안씨는 "이 과정에서 진짜 종손을 배제하기 위해 비석의 몸통을 뜯어내 바꿔치기하고 족보까지 변조했다"고 주장했다. 실제 20대 시조인 안여택의 묘지 비문은 일부 보수된 흔적이 확연했고 비문을 세운 이도 A씨로 수정돼 있었다. 

안동근씨는 "A씨는 직계 종손이 아니어서 비석 설립자로 기재될 이유가 전혀 없다"며 "문중 역사에서 종손을 지우기 위해 변조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1998년 무렵 비문을 작업한 석공을 만나 비문을 바꾼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했다"며 "석공은 A씨의 증손자의 요구로 비문 몸통을 떼어내고 글씨를 바꿨다고 했다"고 주장했다.

순흥안씨 판서공 종중의 토지는 20대 시조인 안여택(安汝宅, 1691-1783)에서 비롯됐다. 안여택은 숙종과 영조 때 병조참판과 숭정대부 등 벼슬을 지냈다. 그가 사망한 지 100년 뒤(고종 27년, 1890년)에 고종이 부모에게 효를 다한 공로를 인정, 많은 토지를 하사해 문중의 재산을 크게 늘리는 데 기여했다. 문중에 전해 내려온 재산 관리대장과 세곡기(토지 위치와 지형, 수확량 등을 기록한 글) 등 기록에 의하면 구한 말 당시 소유한 종중 땅은 충남 당진과 논산, 강원 등지에 모두 수백만 평에 달했다.

법원도 안씨 손 들어줘... "남은 땅도 되찾을 것"

안씨 등은 사복시정공 신양종중을 정비해 지난 1993년 A씨의 증손자 등 25명과 이들이 만든 안씨 문중 분파 대표를 상대로 각각 공유지분 이전등기 말소 또는 소유권 이전등기 말소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안병덕의 후손들이 종손으로 있는 종중에 지분만큼 땅을 돌려주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양측은 이후에도 종중 대표자 권한 여부를 놓고 법적 다툼을 벌였다. A씨의 증손자 등은 종손 문중으로 땅을 모두 이전을 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를 뒤집고 종손 계보 문중 대표자의 대표성 여부를 놓고 또 다른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지루한 소송 끝에 이날 일부 땅을 되찾은 안씨는 몇 번씩 등기부등본을 펼쳐보며 말했다.

"조부께서 만주로 피난 간 지 약 110년, 제가 땅 찾기에 나선 때로부터 꼬박 30년이 걸렸네요. 그렇지만 아직 A씨의 증손자 등이 상속한 수만 평은 이전되지 않았어요. 몇 년이 걸리더라도 나머지 땅도 되찾으려 합니다."

그는 감찰공후 신양종중과 함께 논산에 이어 충남 당진과 강원도 문막에 있는 선대의 땅을 되찾기 위해 제2의 법정 다툼을 준비 중이다.

태그:#논산시 벌곡, #문중토지, #토지, #법정다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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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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