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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당 안철수 서울시장 후보가 17일 서울 목동 한국방송회관에서 한국기자협회, 방송기자협회, 한국PD연합회 주최로 열린 서울시장 후보 초청토론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국민의당 안철수 서울시장 후보가 17일 서울 목동 한국방송회관에서 한국기자협회, 방송기자협회, 한국PD연합회 주최로 열린 서울시장 후보 초청토론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 국회사진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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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후보님.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 마포구에 사는 성소수자 시민입니다. 

이번 4.7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를 앞두고 성소수자 시민으로서 연일 반갑지 않은 소식이 들려와 속이 상해 펜을 들었습니다.

안철수 후보께서는 17일 오후 어느 토론회에서 "'도심에서 퀴어문화축제를 개최해서는 안되고, 성소수자 거부할 권리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발언에 차별과 혐오의 시선이 담겨 있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이에 대해 안 후보께선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어떤 특화된 곳을 만들어서 거기에서 원하는 분들이 가서 (퀴어문화축제를) 즐기는 좋은 문화를 만들면 거기가 명소가 되고 외국에서도 찾아오고, 그것이 서로 좋은 일이 아닐까 제안드린 것."

분리·배제가 "서로 좋은 일"이라고요?

그런데 과연 소위 '퀴어특구'를 만들어 성소수자 시민을 분리하는 것이 "서로 좋은 일"인 걸까요? 안철수 후보께서 '퀴어특구'의 예시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인용하고 있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카스트로 거리'는 정말 퀴어를 도시 외딴 곳으로 내쫓기 위해 만든 것일까요?

'카스트로 거리'는 다양한 성소수자들이 안전하고 평등한 공간을 찾아 모여 자발적으로 만든 거리입니다. 미국 최초의 커밍아웃 게이 정치인 '하비 밀크'의 샌프란시스코 시의원 시절 지역구였습니다. 성소수자 시민이 존엄하게 일상을 꾸려갈 수 있는 공간으로 가꾸고 지켰기 때문에 카스트로 거리는 지금의 아름답고 개성 넘치는 모습을 갖출 수 있었고, 외국인 관광객이 찾아오는 관광 명소가 된 것입니다. 그곳은 샌프란시스코의 모든 성소수자를 몰아 넣는 '분리와 배제의 장'이 결코 아닙니다.

카스트로 거리가 세계적인 관광 명소로 발돋움한 배경에는 성소수자 권리 보장을 위한 시민들의 눈부신 행동과 이에 화답한 지역 정치인의 노력이 있습니다. 때문에 '성소수자'라는 단어를 언급하기조차 꺼려하는 정치인들이 유력 시장 후보로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도시에서 '퀴어특구'는 분리와 배제를 통해 차별과 혐오를 공고히 할 뿐, 그 어떠한 문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낙원동을 아십니까
 
2017년 10월, 정의당성소수자위원회가 '창덕궁 앞 도성한복판 도시재생활성화계획(안)'과 관련해 현수막을 게시했다.
 2017년 10월, 정의당성소수자위원회가 "창덕궁 앞 도성한복판 도시재생활성화계획(안)"과 관련해 현수막을 게시했다.
ⓒ 정의당성소수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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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서울시는 그동안 어떤 모습을 보여왔을까요. 지난 2017년 4월 서울시는 '창덕궁 앞 도성한복판 도시재생활성화계획(안)'을 발표하면서 낙원동과 익선동을 포함한 종로3가 일대에 대대적인 도시재생사업을 추진하겠다고 공언했습니다.

알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낙원동 일대는 오래 전부터 성소수자들이 모이고 어울려온 공간 중 하나입니다. 마치 카스트로 거리처럼 말이지요. 그런데, 서울시가 발표한 도시재생활성화계획에서 성소수자는 단 한 글자도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단 한 글자도 말입니다. 분노한 성소수자 당사자들이 종로3가 일대에 '도시계획에서 성소수자를 지우지 말라!'는 현수막을 붙이며 항의했지만, 그것마저도 훼손되기까지 했습니다. 그래도 서울시는 계속 묵묵부답으로 일관할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퀴어특구'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시정 전반에서 성소수자의 존재가 지워지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선언적 의미의 약속이라도 먼저 하는 것이 옳은 것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이번 재보궐선거는 샌프란시스코 시장을 뽑는 자리가 아니라, 서울시장을 뽑는 자리니 말입니다.

여담입니다만, 샌프란시스코에서 성소수자 인권에 대해 공개석상에서 안 후보님처럼 이야기했다가는 정치적 생명이 끝장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아직 서울이 그렇지 못한 것에 한없이 슬플 뿐입니다. 

조롱과 위협 그리고 차별

'퀴어특구'의 전제 조건은 성소수자 시민이 '보편'의 존재로 일상을 꾸려갈 수 있는 공간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안전하고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일상의 공간 말입니다. 서울 어디서든 자신의 성적지향과 젠더 정체성을 밝혀도 조롱이나 위협 그리고 차별을 받지 않는 구조와 문화가 안정적으로 정착될 때, 그때서야 비로소 성소수자 커뮤니티 밀집 지역이 '퀴어특구'로서 존재하고 기능할 수 있습니다.

안철수 후보 입장에서는 억울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무작정 퀴어문화축제를 반대한다는 막무가내가 아닌 나름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했다고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성소수자를 도심에서 안 볼 권리'를 운운하는 정치인의 입에서 나온 '퀴어특구'를 보고 성소수자 서울시민이 먼저 떠올린 것은 카스트로 거리가 아닌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동성애자에게 분홍색 삼각형 모양의 표식을 붙여 분리 수용하는 것으로 모자라 참혹한 집단 학살까지 자행했다는 바로 그 악명 높은 수용소 말입니다. 2021년 서울에 사는 성소수자 시민이 느끼는 일상의 조롱과 위협, 차별이 전쟁 당시에 비유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라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안철수 후보님. 2021년 서울에서 분리와 배제는 사회적 소수자의 삶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없습니다. 성소수자가 도심 외곽으로 내쫓기는 서울이라면 여성과 장애인, 이주민을 환대할 리 만무할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 드립니다. '퀴어특구'를 만들 생각을 하시기 전에 서울시를 '퀴어보통구'로 만들 생각부터 하십시오. 성소수자는 일상 속 어디에나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성소수자가 존엄하게 살 수 있는 서울을 만드는 것만이 '퀴어'를 둘러싼 지지부진한 '논쟁'을 끝내는 길입니다.

태그:#안철수, #성소수자, #퀴어문화축제, #퀴어퍼레이드, #퀴어특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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