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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월 19일부터 3월 1일까지 다녀온 쿠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행 직후 전세계적인 코로나19 확산으로 싣지 못했던 여행기를 1년을 맞아 공유하고자 합니다.[편집자말]
아바나의 아침과 도시농업

아바나의 첫 번째 아침을 깨운 것은 닭이었다. 여기는 분명히 도심 한복판인데 들려오는 닭 울음 소리라니. 창 밖을 내다보니 건너편 건물 옥상에 닭장이 있었고, 조그마한 텃밭이 보였다. 책에서만 보던 바로 그 쿠바의 도시농업이었다.

쿠바는 동구권의 붕괴 이후 심각한 식량 위기에 봉착했었다. 미국의 경제봉쇄가 계속되는 동안 사탕수수를 수출해서 식량의 약 70%를 동유럽으로부터 수입해 왔는데 이 고리가 무너진 것이다. 이에 쿠바가 선택한 것은 도시농업이었다. 주차장을 갈아엎고, 옥상을 개간해 그곳에 채소와 과일을 심었다. 화학비료나 농약도 구할 수 없었던 탓에 부득불 유기농법을 선택하게 되었다.

이후 쿠바의 유기농 도시농업은 역설적으로 세계적인 모델이 되었다. 도시화가 계속되고 기후변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현재의 세계에서, 유통단계를 줄여 환경오염을 감소시키고, 싱싱한 식품을 공급할 수 있는 도시농업이 지속가능한 산업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그리고 쿠바가 도시농업의 메카로 등극한 것이다.
 
아바나의 농산물 시장, 도시농업의 결과물도 같이 판매된다
 아바나의 농산물 시장, 도시농업의 결과물도 같이 판매된다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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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쿠바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북한이 떠올랐다. 90년대 중반 소위 고난의 행군 시기에 수많은 아사자를 배출했던 북한. 이는 배급제가 갑자기 붕괴되어서 생겼던 현상이었는데, 그때 왜 북한은 쿠바와 같이 혁신적으로 정책방향을 변경하지 못했을까?

아마도 그것은 분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북의 신뢰가 없었던 상황에서 북한은 남한의 흡수통일을 끊임없이 경계했을 것이며, 이 때문에 먹고사는 것과 관련된 과감한 정책 전환을 못했을 것이다.

대신 북한은 핵에 더욱 매달렸고, 그 결과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현실이다. 결국 분단이라는 구조적 한계가 현실의 변화를 막아선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창 밖에서 염치없이 울어대는 닭소리가 부럽게만 느껴졌다.

쿠바 독립운동의 아버지, 호세 마르티
 
학교 앞에 줄을 서 있는 아이들
 학교 앞에 줄을 서 있는 아이들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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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레스토랑에 내려가 쿠바에서의 첫 식사를 기다렸다. 그래도 꽤 급이 있는 호텔이었기에 어떤 음식이 나올까 기대를 했건만 막상 음식은 기대 이하였다. 오믈렛, 과일, 음료수가 전부였고 맛도 그저 그랬다. 쿠바 음식에 대해선 기대하지 말라던 책 내용 그대로였다.

혹자들은 이 역시 미국의 경제봉쇄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했는데,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쿠바는 적도에 가까워 식자재가 풍부한 편이 아니었을까? 어쨌든 이후로도 쿠바 음식은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다 비슷했으며 기억에 남는 건 오로지 술뿐이었다.

아침을 먹은 후 일행 몇몇과 아바나 시내를 잠시 돌아다녔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등교하는 학생들이었다. 다양한 인종의 아이들이 똑같은 교복에 각기 다른 색의 스카프를 메고 학교로 들어가고 있었는데 스카프 색은 학년을 의미하는 듯 했다.

낯선 동양인들이 자신을 쳐다보든 말든 전혀 개의치 않은 채 깔깔거리며 일상을 영위하는 아이들. 같은 공산주의국가여서 그런지 왠지 북한의 학생 모습과도 비슷해 보였다. 아마도 스카프 때문이리라. 
 
교실 안에 호세 마르티의 사진.
 교실 안에 호세 마르티의 사진.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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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너머로 교육받는 아이들의 모습은 여느 곳이나 마찬가지였다. 열심히 수업을 듣는 아이가 있는 반면, 이방인과 눈맞춤을 하며 딴짓을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교실 안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한 인물의 사진이었는데 그는 피델 카스트로도, 체 게바라도 아닌 바로 호세 마르티였다. 호세 마르티는 1853년 아바나에서 태어나 스페인으로부터 쿠바의 독립운동을 이끈 혁명가로서 쿠바인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소년 시절부터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그는 1차 독립전쟁 때 실패한 이후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뉴욕에서 쿠바 혁명당을 조직한 뒤 다시 쿠바로 돌아와 일으킨 2차 독립전쟁 때 전사했다. 그러나 이를 바탕으로 쿠바의 독립 열기는 뜨거워졌고 결국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쿠바 공화국의 국부로 추앙받았으며, 쿠바 각지에는 그의 동상들이 서 있다.

그런 호세 마르티의 사진을 보고 있으려니 문뜩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북한 통틀어 우리의 독립운동사에서는 모두에게 존경받는 인물이 없기 때문이다. 분단 구조는 각 체제에 필요한 위인들을 만들어냈고, 이 왜곡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히려 국내 갈등의 씨앗이 되고 있다. 만약 우리에게 호세 마르티 같은 인물이 있었다면 나중에 남북이 통일되었을 때 조금 더 쉽게 사회통합을 이루어낼 수 있지 않을까?

아바나의 거리
 
K-POP에 맞춰 춤을 추는 쿠바 학생들
 K-POP에 맞춰 춤을 추는 쿠바 학생들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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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거리를 걷는 중에 마주친 쿠바는 꽤 놀라운 구석이 많았다. 우선 그들에게 한국은 낯선 국가가 아니었다. 우리와 마주친 쿠바인들은 처음에는 "치노(중국)? 자폰(일본)?"이라고 물었지만, "꼬레아"라고 대답하자 그중의 십중팔구는 "싸커, 쏜, 굿"을 이야기했다. 여기서도 손흥민의 활약상은 대단한 듯했다.

어디 그뿐인가. 한국의 자동차도 인기였다. 소위 올드카라고 불리는 1940~1950년대 차들 속에 한국 자동차 엔진이 꽤 있다고 하더니, 어떤 쿠바인은 오래된 티코를 정비하며 한국의 자동차가 최고라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또한 공원에서는 쿠바 아이들이 K-POP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고 있었다. 모두 전혀 상상해 보지 않은 풍경이었다. 쿠바 속 한국이라니.
 
아바나 거리의 대포
 아바나 거리의 대포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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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횡단보도 앞에 섰다. 신호등이 없어서 좌우를 두리번거리는데 웬걸. 지나가던 차들이 모두 서는 것이었다. 운전자들이 우리더러 건너라고 손짓을 했다. 이때만이 아니라 횡단보도를 건널 때마다 모든 차가 마찬가지였다. 행인이 우선이라는 교통시스템인 듯 했다. 놀라웠다. 신호등 대신 약속으로 교통 체계가 움직이다니. 이것이 쿠바 사회가 가지고 있는 신뢰의 힘일까?

밝은 태양 아래 처음 걸어본 올드 아바나의 거리는 마치 오래된 유럽의 도시를 걷는 느낌이었다. 곳곳에 스페인 식민지 때 성당과 광장이 자리하고 있었고 도로에는 스페인 식민지 당시에 썼던 대포들이 차량금지판 용으로 세워져 있었다. 건물들은 대부분 낡았지만 오랜 세월의 두께만큼 그 나름대로의 운치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살고 있는 사람들한테는 비극일 수도 있겠지만 이방인의 눈으로 그것은 켜켜이 쌓인 세월의 흔적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건물의 발코니마다 걸려 있는 원색의 빨래들이 인상적이었다. 원색의 건물에 원색의 빨래들. 발코니는 스페인식 건물의 특징인 듯 했는데 아마도 이곳 사람들은 빨래를 널며 이웃과 소통하고, 내가 살고 있는 공간을 인지할 것이다.
 
아바나 거리의 빨래들
 아바나 거리의 빨래들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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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바나의 모든 곳에 감탄한 것만은 아니다. 거리 곳곳에 쓰레기가 널려져 있었다. 아바나가 소화하기에는 너무 많은 여행객들이 있기 때문일 수도 있었지만, 사회가 점점 자본주의화 되어감에 따라 겪을 수밖에 없는 과정인 듯도 했다. 결국 과생산과 과소비가 자본주의의 본질 아니던가. 결국 쿠바도 늘어가는 쓰레기로 골머리를 앓을 시기가 올 것이다.

다시 호텔로 돌아와 외출 채비를 한 뒤 로비로 나갔다. 오늘의 여행 일정은 아바나에 있는 헤밍웨이와 관련된 장소들. 과연 헤밍웨이는 쿠바에서 어떤 인물로 기억되고 있을까?

태그:#쿠바, #아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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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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