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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거리두기가 계속 되고 있습니다. 올해 설에는 5인 이상 집합 금지 조치로 많은 이들을 만날 수도 없습니다. 이럴 때 뭐라도 마음을 의지할 데가 있으면 우리 일상이 조금 위로가 되지 않을까요? '요즘 나의 최애는' 무엇인지, 그로 인해 나의 일상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시민기자들의 이야기를 싣습니다.[기자말]
몸치다. 태어나서 한 번도 박자에 맞춰 몸이 움직이지 못했으니, 춤을 추는 것은 엄두를 내지도 못했고, 몸을 쓰는 것은 겁부터 나기 일쑤였다. 이런 내가 '몸을 쓰는 것'을 좋아한다고 느낀 것은, 고등학교에서 아침 달리기를 시작하면서부터이다.

기숙사의 아침은 기상 방송과 함께 시작했다.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열고, 이름이 박힌 체육복에 몸을 넣고 힘들게 나선 아침의 운동장은, 아직 밝아지지 않은 하늘이었다. 깨지 못한 아침잠의 달콤함은 정신을 아득하게 잡아 당겼고, 체육 선생님의 불호령에도 몸이 쉽게 움직일 리 없는 열여섯의 아이들이었다. 

그때였다. 평소부터 달리기를 즐겼던 것도 아니고 몸이 따라주지도 않았지만, 나는 아침의 어두운 공기를 폐에 가득하게 들이쉬며 운동장을 내달리는 심장의 박동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헉헉' 대며 거칠게 들이쉬는 숨은 몸 안에서 달리게 하는 힘을 만들었고, 이마부터 송골송골 맺히던 땀방울은 어느새 온몸의 땀샘에서 열기를 뿜어 내었다. 나는, 달리는 내가 좋았다.

몸을 쓰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 하지만, 달리기가 가르쳐준 '몸을 쓰는 즐거움'은 하루에도 몇 번씩 수영장에 갔던 대학 시절을 지나, 일하는 틈을 쪼개 찾아가던 러닝머신 달리기로 이어졌다. 운동을 하며 나의 한계가 손에 잡혔고, 그 끝을 넘어설 수 있는 힘도 동시에 느껴졌다. 한번 더 참고, 한번 더 숨을 쉬면, 어제의 나에겐 도달할 수 없던 기록이 나의 것이 되었다. 단순하지만 명징한, 성취의 증명이 나를 살아 있게 했다.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딜 수 있게 하는 운동

문제는 코로나19였다. 제일 먼저 회사의 체육관이 문을 닫았다. 퇴근하고 빼놓지 않고 달렸던 러닝머신이 멈췄고, 도로에도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마스크를 쓴 채 달리기를 시도했으나, 나에게도 길을 걷는 타인에게도 눈치가 보였다. 꽤나 오랫동안 제대로 된 운동을 하지 못했다.

집에서 매트를 깔고 홈트레이닝 프로그램을 몇 달이나 해 보았지만, 크게 만족스럽지 않았다. 숨이 끝까지 차오르고, 견딜 수 없을 때 한번 더 참아보는 느낌을 되찾고 싶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운동을 하지 못하게 되니, 현실의 스트레스를 견디는 것도 점점 어려워졌다.

"샌드백이라도 쳐보실래요? 기도로도 해결되지 않던 스트레스가, 다 풀리던데요."

일터에서의 스트레스로 답답하던 차에,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친구가 한 마디 던진다. 권투를 시작한 지 일 년이 넘어가는데, 현실의 긴장을 풀어내기엔 권투만 한 것도 없다면서 말이다. 유혹적이었다. 예전부터 배워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기회가 왔다는 마음이었다.

더 이상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마침 코로나19가 잠잠해지던 시기이기도 해서, 그 날로 소개받은 도장에 등록을 하고 글러브를 받았다. 검은색 연습용 글러브였다. 아직 손에 붕대를 감는 것을 배우지는 못했지만, 글러브로 샌드백을 칠 때 들리는 소리가 시원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밀리언달러 베이비>의 대사입니다. 권투라는 것이 결국 견디게 하는 것은, 제게도 2020년을 견디게 하는 힘을 전해 주었습니다.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을 때, 몸을 움직여보세요. 땀을 흘려보세요! 견뎌낼 수 있는 힘을, 분명히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 권투가 선물한 것, 현실을 견디는 힘!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밀리언달러 베이비>의 대사입니다. 권투라는 것이 결국 견디게 하는 것은, 제게도 2020년을 견디게 하는 힘을 전해 주었습니다.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을 때, 몸을 움직여보세요. 땀을 흘려보세요! 견뎌낼 수 있는 힘을, 분명히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 이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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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 권투인의 연습 루틴은 단순했다. 줄넘기를 3분씩 3세트를 하고, 주먹을 내지르며 제자리 달리기를 3분씩 3세트를 했다. 세트마다 30초씩 쉬고, 다음 세트를 되풀이 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심장의 박동이 느껴졌고, 거친 숨소리와 함께 땀이 흘렀다. 거의 1년 만에 되찾은 '몸을 쓰는 즐거움'이었다. 

"힘들면 쉬면서 하세요. 무리하다 내일부터 못 나온다고 하면 안돼요."

코치 선생님은 무리하지 말라고 걱정하셨지만, 그동안 잊고 있던 '몸을 쓰는 즐거움'은 나를 점점 고취시켰다. 오랜만에 느끼는 성취감이었다. 숨은 턱까지 차올랐지만, 힘들다며 멈추는 것보다는 정해진 시간의 훈련을 마무리하고 싶었고, 그걸 해낸 내 자신이 대견했다.

코로나19로 몸도 마음도 꼼짝없이 갇혀 있던 1년 만에 '살아있음'을 느꼈다. 행복했다. 코치님이 지시하신 30분의 루틴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서 '더 할 수 있습니다!'를 외쳤지만, 무리하지 말라며 샌드백이나 쳐보고 가라고 하신다. 요령없이 달려든 덕분에 주먹에 상처가 남았지만, 마냥 신이 났다.

하지만, 다시 코로나19가 발목을 잡았다. 제대로 샌드백을 치는 법도 배우지 못했는데, 수도권을 중심으로 코로나19 대응이 2.5단계로 상향되더니 곧바로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포항도 2.5단계가 되었고, 권투 도장의 운영에도 제한이 미쳤다.

아무리 운동을 할 때 마스크를 쓰고 있기는 하지만, 실내에서 여럿이 모이게 되니 가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아직 원-투 펀치도 배우지 못했고 샌드백도 제대로 치지 못해서 손목까지 아픈데, 말이다. 게다가, 이제 막 재밌어지기 시작했는데, 아쉬웠다. 어쩌지?

"재밌을 때 멈추면 안 되는데, 일주일에 한두 번 운동할래요?"

권투를 추천해준 친구의 제안이다. 추천해서 도장까지 갔는데, 재미를 붙일 만 할 때 도장이 문을 닫아버려서 미안했다고 덧붙인다. 제안을 무르기 전에, 잽싸게 잡았다.

"앗! 미안할 것은 없는데, 가르쳐 줄래요? 집에서 혼자 하고는 있는데, 같은 동작만 하려니 쉽지 안 되더라고. 줄넘기는 혼자서 할 수 있으니, 30분 쯤 동작들 좀 가르쳐줘요."

우울감에서 빠져나오고, 에너지도 얻고

어느덧 두 달째 도장에 가지는 못하지만, 나는 일주일에 한두 번씩 친구의 '임시 도장'에서 권투를 이어가는 중이다. 벌써 기본 스텝 위에 잽과 원투 스트레이트가 얹혔고, 조금 있으면 '가장 강력한 공격'이라는 훅을 배울 예정이다.

친구가 빌려준 글러브로 샌드백 대신 벽을 치면서, 일상의 긴장감도 조금씩 덜어낼 수 있었다. 코로나19는 일상의 많은 것을 멈추게 했지만, 몸을 움직이는 즐거움을 되찾아준 권투는 멈추지 못했다. 그야말로 '권며들었다'(개그맨 최준의 유튜브 동영상 'B대면데이트'에 빠져들었다는 의미로 생겨난 신조어 '준며들었다'에서 차용).

열여섯 살의 아침 구보가 가르쳐준 '몸을 쓰는 즐거움'은 3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내게 많은 것들을 선물한다. 끝까지 차오른 숨을 넘어서고 나면,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만 같은 상황도 견딜 수 있었고, 무너질 것만 같은 우울감에서 빠져나올 에너지도 얻었다.

그리고, 전대미문의 2020년은 내게 '권투'라는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며, 코로나19의 불안을 견디게 했다. 앞으로도 달라질 것은 없다. '움직이는 나'는 조금씩 강해질 테고,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현실로부터 나를 지켜낼 힘을 전해줄 것이다.

조만간 코로나19 대응 단계가 완화되어 도장에 갈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지금은 오늘 배운 스텝을 복기해야겠다. 슉-슉슉-슉! 아, 이것은 절대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다. 

태그:#일상비틀기, #초보 권투인, #몸을 쓰는 즐거움, #권투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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