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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한파에 폭설, 그리고 코로나까지. 유독 추운 이 겨울, 다들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요. 가까이 마주 앉아 서로에게 온기를 전할 순 없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따스함을 전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이웃, 동네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시민기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편집자말]
'내 몸과 마음도 건사하기 힘든 내가 과연 남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런 생각이 꼬박꼬박 마음속 땅따먹기를 하더니, 점차 자기 영역을 넓혀가 이제는 내 마음의 악덕지주가 되어버렸다. '최소한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목표가 되었고 주어진 일만이라도 욕먹지 않을 만큼 해내는 일이 중요했다.

누구나 그랬을까? 어린 시절에는 내 손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는데. 지금은 아르바이트하는 곳에서 손님들에게 한결 같이 웃어주는 것도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뭐, 따지고 보면 그 믿음을 다 버린 것은 아니다. 스케일이 극도로 작아졌을 뿐.

이제는 이런 소망을 가지고 산다. '이왕이면 세상을 좀 살기 좋게 만들면서 살 수 있다면 좋겠다, 이따금씩, 티끌만큼, 아니 나노 단위씩이라도.' 신성한 먹고사니즘에 충실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이조차 이상적인 생각인가 싶을 때가 있다는 것, 혹시 공감하시는지.

하지만 올 겨울 나는 그 미세한 변화가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일이라 믿는 사람이 되었다. 거창하게 뭐라도 해 낸 거냐 하면 딱히 그런 것은 없다. 달라진 것은 목요일 오전의 일과뿐이다.

올 겨울, '동네원정대'에 합류했다

알람을 듣고 일어나면 우아함 따위에 미련 두지 않고 최대한 따뜻한 옷으로 골라 입는다. 약속 장소로 향해 일행을 만난다. 그리고 삼십 분에서 한 시간 정도 걸으며 동네 쓰레기를 줍는다. 두 손에 작업용 장갑을 끼고, 자투리 그물로 만든 힙한 쓰레기 가방과 쓰레기용 쇠집게를 들면 '동네원정대' 풀세트 장착 완료다(처음이 어색할 뿐, 두 번째부터는 심신 안정 효과를 느낀다).
 
자투리그물을 업사이클링한 가방과 쓰레기집게의 힙한 만남. 요즘 놀러 갈 때 쓰레기가방 하나 정도는 끼고 가잖아요?
▲ 민락수변공원에서 플로깅 자투리그물을 업사이클링한 가방과 쓰레기집게의 힙한 만남. 요즘 놀러 갈 때 쓰레기가방 하나 정도는 끼고 가잖아요?
ⓒ 김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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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두 눈은 우리들의 '쓰앵님', 쓰레기를 찾아 빛난다. 어릴 적 소풍 때 하던 보물찾기와도 비슷하다. 보물 쪽지와 달리 쓰레기를 찾아내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다.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고, 다가가면 그 옆에도 있고, 돌아서는 찰나에도 보인다. 당연한 풍경처럼 뻔뻔하게 누워 있는 쓰레기를 집게로 끌어내 채집한다.

가방에 담기 전에 무슨 쓰레기인지도 살펴보고, 이 쓰레기가 왜 여기로 왔을지도 추측해 본다. 해변에 같은 브랜드의 담배꽁초가 두세 갑이나 흩어져 있는 것을 보면 '실연을 한 건 아닐까?' 상상하고, 백사장에 덩그러니 놓인 업소용 아이스크림통을 보며 무슨 행사가 있었을까 궁금해 한다.
 
가끔 엉뚱하게 느껴지는 쓰레기는 사연이 궁금하다.
▲ 해변의 업소용 아이스크림통 가끔 엉뚱하게 느껴지는 쓰레기는 사연이 궁금하다.
ⓒ 김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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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 허리를 숙였다가 펴고, 손을 뻗었다가 접고, 다시 걸으며 숨은 쓰레기 찾기를 이어간다. 30분만 주워도 큰 책가방만 한 쓰레기 가방이 거의 찬다. 방구석 생활을 하면서 굳은 근육과 관절들이 조금 말랑해져 있다. 무리하지 않고 늘 이 정도면 됐다 싶을 때 쓰레기 가방들을 모아 자동차에 싣는다. 운동 후의 식사 시간은 보물찾기 후에 받는 선물만큼 뿌듯하다.

새로운 풍경이 되어보는 경험

걸어다니며 쓰레기를 줍는 일. 요즘 이 활동을 부르는 말은 참 다양하다. 스웨덴어의 '줍다(plocka upp)'와 'jogging'의 합성어인 '플로깅'(plogging)이 많이 쓰이고, 다른 유행어로 하면 '쓰줍', '줍깅', 순화한 우리말로는 '쓰담달리기(걷기)'가 있다. 그만큼 보편적인 여가 활동이 되어가고 있다는 뜻이겠다.

나는 부산에서 '솔트컴바인(SAlt combine)'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다(해양쓰레기 문제에 대한 인식 개선을 위해 다양한 문화·경험 컨텐츠를 개발하는 단체이다). 작년에는 <다같이 줍자 동네 한 바퀴> 프로젝트로 플로깅 행사를 진행하여 많은 사람들이 함께했는데, 올해는 정부의 코로나19 예방 지침에 따라 한 번에 서너 명씩만 모인다. 대신, 회차를 늘려 매주 꾸준히 다른 동네를 방문하는 <2021 동네원정대>로 활동 중이다(각 동네주민이 한시적으로 참여하며 릴레이로 이어가는 방식. 나는 매회 참여하고 있다).

동네 쓰레기라면 구청에서 치워줄 텐데 왜 나서서 주울까? 해양쓰레기의 70%는 생활쓰레기라고 한다. 바다로 흘러가는 쓰레기를 줄이려면 개인이 자기 주변의 쓰레기부터 치우는 문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동네 담벼락 밑에 담배꽁초를 버리던 사람이라면 바다를 감상하며 피운 담배꽁초를 주머니에 고이 넣을 리도 만무하니까.
 
쓰레기 사진을 모아보면 각종 브랜드 열전. 배달앱은 죄가 없지만 우리가 투기의 민족이 된 것은 아닐까 싶을 때도 있다.
▲ 해변쓰레기 줍기 (비치코밍) 중 만난 비닐봉지 쓰레기 사진을 모아보면 각종 브랜드 열전. 배달앱은 죄가 없지만 우리가 투기의 민족이 된 것은 아닐까 싶을 때도 있다.
ⓒ 김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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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흘러간 쓰레기는 매년 최대 100만여 마리의 해양생물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원인이 되고, 햇빛과 파도에 의해 잘게 부서지면 미세플라스틱이 되어 생선과 조개류 등을 통해 우리 몸속으로 들어온다. 태평양에 우리나라 면적의 16배나 되는 쓰레기섬이 있다는 것도, 세계 바다 소금의 90%에서 미세플라스틱이 발견되었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주워서 치우는 쓰레기의 양은 우주의 티끌처럼 미미하다. 하지만 샛노란 가방을 들고 쓰레기를 줍는 이들의 모습은 길을 지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강하게 남지 않을까. 단순히 동네가 깨끗해 보이도록 환경미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손이 줍는 손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공유하며 새로운 문화를 만들려는 시도다. 이렇게 동네의 한 풍경이 되어보는 경험은 생각보다 뿌듯하다.

지루한 봉사활동으로 여기신다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목소리를 높일 것 같다. "전혀요!" 나는 우리가 하고 있는 동네원정에 이런 부제를 붙이고 싶다. '동네의 재발견'. 자유롭게 여행을 하기 어려운 지금, 우리 주변 지역의 매력을 발견하고 즐기기에 딱 좋은 활동이라고 할까.
 
날이 좋아 청사포 바다의 윤슬이 아름다웠다. 이런 날은 마치 쓰레기 줍기를 핑계로 여행을 온 것처럼 느껴진다.
▲ 청사포 비치코밍 날이 좋아 청사포 바다의 윤슬이 아름다웠다. 이런 날은 마치 쓰레기 줍기를 핑계로 여행을 온 것처럼 느껴진다.
ⓒ 김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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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안다고 생각했던 장소도 다르게 보는 순간 새로운 여행지가 된다는 것. 광안리 해수욕장, 동백섬, 청사포, 민락수변공원 등 유명 관광지에서 쓰레기를 주우면서 느낀 것이다. 여러 번 왔던 곳이지만 쓰레기를 주우면 구석구석 훑어보게 되고, 자세히 보면서 느끼게 되는 장소와의 교감은 낯설다. 강물에 뜬 오리가 귀여워 탄성을 지를 줄이야. 갈매기의 발 색깔이 왜 빨간지, 초등학교 앞 문구점은 왜 늘 옛날 모습 그대로인지가 궁금해질 줄이야.

"이런 데가 있었어?" 하며 새로운 동네를 발견한 일도 있다. 수영구 망미동의 망미단길을 둘러볼 때였다. 번화가에서 조금 걷자 갑자기 전혀 다른 분위기의 고즈넉하고 예스러운 골목길에 들어선 것. 부산 토박이인 분도 모르던 곳이라니, 역시 등잔 밑이 어둡다. 이런 게 동네여행의 매력이지!

지치거나 집에 돌아갈 걱정 없이 마음 편해서 더 즐겁고, 익숙함 속에 신선함이 더 빛나는 여행이니 말이다. 거기다 플로깅과 함께하는 '쓰줍 투어'라면, 코로나 시대의 대안여행이 될 만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쓰레기를 잘 버리고 잘 치우기에 앞서, 쓰레기의 발생을 최대한 줄이는 '레스 웨이스트' 여행 방식이 있어야겠다).
 
망미단길은 독립서점이 많고 전국 3대 비건 빵집 중 한 곳이 있다. 부산에서 드문 '평지'길의 안락함을 느낄 수 있어 동네여행지로도 플로깅 장소로도 좋은 곳.
▲ 망미동 망미단길 플로깅 망미단길은 독립서점이 많고 전국 3대 비건 빵집 중 한 곳이 있다. 부산에서 드문 "평지"길의 안락함을 느낄 수 있어 동네여행지로도 플로깅 장소로도 좋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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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하고 사사로운 발견의 연속. 청사포와 동백섬에서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해변을 만났을 때는 한적하게 앉아 '우리만 알고 싶은' 절경을 감상했다. 동네마다 품고 있는 소소한 역사에 대해 아는 대로 이야기도 나눈다.

길에 설치된 조각에 대해, 근처에 올 때 자주 가던 식당에 대해, 어떤 가게에 들락거리는 길냥이의 이름이나 이제는 쓰이지 않는 기차역에 대해. 그러면서 동네를 행정적, 경제적 단위로 보던 시선을 바꾸어, 동네에 숨겨진 생태와 삶의 이야기를 공유하는 방법들도 상상해 보게 되었다.

세상과 함께 나노미터만큼씩 한 걸음

반복은 마음을 안정되게 한다. 걷고, 허리를 굽히고, 손을 뻗는 단순한 동작을 일주일에 한 시간쯤 할 뿐인데, 6주 차가 된 지금 세상과 내가 정말 나노미터만큼씩은 나아간다는 느낌을 갖고 하루를 산다. 쓰레기를 줍다 보니 내가 만들어내는 쓰레기에도 민감해졌다. 제로웨이스트 생활용품을 구비해 가방에 넣어 다니며 포장 쓰레기를 줄이게 되었고 쓰레기가 많이 나오는 물건은 웬만하면 사지 않게 되었다.

부산의 동네를 '도장 깨기' 하다 보니, 마음속에서 지주가 되어 자존감을 갉아먹던 생각은 영토를 많이 잃었다. '내 몸과 마음만 잘 챙겨도 다행인 나인데, 과연 남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심 말이다. 내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는 동시에 세상에 미세하게 도움이 되는 방법을 최소 한 가지는 확실히 익혔으니까.

여전히 내가 가진 힘이 달려서 주변에 나누어주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다. 손님들에게 활력을 주고 싶은데 어느새 초심을 잃고 기계적인 말투로 응대하고 있을 때, 없는 힘을 쥐어짜 억지 친절을 만드는 대신에 잠시 마음 깊은 곳에 있는 힘을 느껴본다. 개미만큼 작은 움직임으로도 여행처럼 즐겁게 새 길을 일굴 줄 아는 힘이다.

덧붙이는 글 | - 솔트컴바인의 동네원정대에 참여를 원하시는 분은 인스타그램 계정(@beachcombing.project) 또는 네이버 블로그(blog.naver.com/saltcombine)를 방문하시면 됩니다.
- 본 글은 글쓴이의 브런치 페이지에도 게시될 수 있습니다.


태그:#쓰줍, #플로깅, #줍깅, #솔트컴바인, #동네원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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