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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추 10년쯤 된 듯하다. 그땐 아이들과 함께 답사를 왔었다. 이곳은 전라도 아니, 전국에서도 내로라는 답사지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의 명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통해 고유 명사가 된, '남도 답사 1번지' 강진. 그중에서도 첫손에 꼽히는 백련사 이야기다.

볼거리, 즐길 거리가 많다고 꼭 좋은 답사지는 아니다. 가장 중요한 답사지의 조건은 그곳에서 끌어올릴 수 있는 풍성한 이야깃거리가 있느냐 여부다. 수준 높은 답사객일수록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폐사지에 머물기를 좋아하는 법이다.

백련사는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그렇다고 눈에 띄는 문화재도 없다. 고작 임진왜란 때 불탄 이후 중수한 기록을 담은 사적비 하나가 보물로 지정돼 있을 뿐이다. 높진 않지만 제법 가파른 산 중턱이라 애초 큰 절이 들어설 만한 곳이 아니다.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자 옛사랑 추억하듯 다시 찾아왔다. 지난해 하반기 때부터 수면 장애를 겪으며 병원을 들락거렸지만 별 차도가 없었다. 밥 먹듯 약을 먹고, 도움이 된다는 건 다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더 나빠지진 않았지만, 딱히 좋아지지도 않았다.

밤잠을 설치고 이른 새벽에 깨고 마는 수면 리듬을 스님들의 일과에 맞춰볼 요량이었다. 알다시피, 절에서 생활하자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한다. 늦어도 밤 9시면 모든 전각에 불이 꺼지고, 새벽 4시 반이면 스님들의 목탁 소리가 기상 알람이 되어 아침을 깨운다.

불자는 아니지만, 새벽 예불은 꼬박꼬박 참례할 생각이다. 늦잠 때문에 놓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수면 장애가 찾아온 후부턴 스마트폰에 알람을 맞춰놓을 필요가 없어졌다. 아침잠을 푹 자보는 게 소원이 됐을 정도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새벽 3시다.

수면 리듬을 스님들의 일과에 맞추다

당분간 지낼 요사채에 짐을 부리고 난 뒤, 전입 신고하듯 경내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새로 지은 건물과 화사한 단청을 입혀 새뜻해진 법당이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다. 비질조차 단정한 안마당과 큼지막한 돌로 각지게 쌓은 성벽 같은 옹벽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만경루 현판 백련사 안마당으로 들어가는 누마루인 만경루의 현판으로, 역시 이광사의 작품이다.
▲ 만경루 현판 백련사 안마당으로 들어가는 누마루인 만경루의 현판으로, 역시 이광사의 작품이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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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 속 10년 전 그대로인 건, 전각마다 걸려있는 현판 글씨뿐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감동을 주는 백련사의 숨은 보물이다. 추사 김정희가 그랬던가. '문자향(文字香)'이라 하여, 책을 많이 읽고 교양을 쌓은 이가 쓴 글씨에는 향기가 나는 법이라고.

백련사에는 원교 이광사의 글씨가 여럿 남아있다. 이광사는 이른바 '동국진체'의 완성자로 평가받는 조선 후기 서화가다. 그는 1755년 '나주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20년 넘게 유배지를 떠돌다 죽었다. 그의 마지막 유배지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섬, 신지도다.

당쟁이 극단으로 치닫던 시절, 장희빈의 아들 경종을 지키려던 소론 계열이었던 탓이다. 아버지가 예조판서까지 오른 명문가였지만, 경종의 급서와 영조의 등극으로 하루아침에 권력을 잃었고 숱한 역모 사건에 연루됐다. 글씨와 그림으로 소일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고나 할까.

그래선지 그의 글씨에선 울분이 느껴진다. 여느 서체처럼 반듯하지 않다. 어떤 이는 반역의 기운이 서려 있다고도 하고, 가슴 속 응어리를 스스로 주체하지 못한 붓질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낮술에 취해 불콰해진 상태에서 휘갈긴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올 정도다.

그의 사후 10년 뒤에 태어난 추사 김정희와 얽힌 재미있는 사연이 하나 있다. 제주도로 유배길을 가던 김정희가 해남 대흥사 법당에 걸린 이광사의 글씨를 폄훼하며 떼어냈다가, 해배 후 서울로 돌아가는 길 과거 자신의 행태를 뉘우치며 다시 찾아 걸었다는 그 이야기.

이는 일가를 이룬 김정희의 '추사체'를 상찬하기 위해 윤색된 것일 테지만, 그가 인정할 만큼 이광사의 '동국진체'가 위대한 서체임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호사가들은 둘을 비교하며, 유학파와 순수 국내파 글씨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나아가 '추사체'는 글씨일 뿐이지만, '동국진체'는 역사라고 치켜세우기도 한다.

백련사와 이광사

이광사의 현판 글씨는 전라도 해안가 절을 중심으로 드물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이곳 말고도, 고창 선운사와 해남 대흥사의 여러 법당에 걸려있다. 그런데도 유독 백련사에서 만나는 이광사가 각별한 이유가 있다. 세상을 향한 그의 분노가 백련사의 기운과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만덕산 백련사 현판 건물 외벽에 내건 것 같진 않고, 모임 때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 대웅전 내벽에 세워져 있다.
▲ 만덕산 백련사 현판 건물 외벽에 내건 것 같진 않고, 모임 때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 대웅전 내벽에 세워져 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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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사의 원래 이름은 만덕사였다고 한다. 대개 절이 자리한 산의 이름을 따기 마련이고 보면, 만덕사가 더 자연스럽다. 백련사를 품고 있는 산의 이름은 해발 409m의 만덕산이다. 백련산 백련사도 아니고, 만덕산 만덕사도 아닌, 만덕사 백련사로 명명된 이유가 있다.

지금은 '백련사(白蓮寺)'지만, 과거엔 '백련사(白蓮社)'였다. 연꽃이야 불교를 상징하는 영물이니 특별하달 것 없지만, 절을 뜻하는 '사(寺)'가 아니라 모임을 의미하는 '사(社)'인 점이 눈길을 끈다. 인터넷 한자 자전에 백련사를 입력하면, 두 한자가 모두 검색된다.

'백련사(白蓮社)'의 현판을 지금도 볼 수 있다. 주 법당인 대웅보전 안쪽 벽에 모셔져 있다. 건물 외벽에 사용된 것이라기보다, 이곳에서 모임을 할 때 마치 배경 현수막처럼 쓰였을 것으로 보인다. 대체 이곳에선 언제 누가 무슨 이유로 모였을까.

이곳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때는 고려 말이다. 불교 국가였던 고려 시대에 발에 치이는 게 절이었지만, 백련사는 여느 절과는 다른 무게가 있었다. 몽골 간섭기였던 고려 말 부패한 불교의 개혁을 부르짖으며 전개한 '결사 운동'의 태 자리가 바로 이곳이다.

당시 무신정권과 결탁해 권력을 탐하며 온갖 부정을 일삼은 불교의 타락상은 민심의 이반을 가져왔다. 이때 보조국사 지눌이 수선사, 곧 지금의 순천 송광사에서 '정혜 결사'를 이끌었고, 이후 그 대의에 공감한 천태종의 요세가 이곳에서 '백련 결사'를 조직했다.

기득권 세력으로 전락한 불교계를 비판하고 성찰하려는 취지는 같았지만, 둘은 수행 방식과 현실에 참여하는 태도 등이 사뭇 달랐다. 다분히 귀족적인 지눌의 '정혜 결사'와는 달리, 요세의 '백련 결사'는 농민과 천민까지 아우르는 민중 지향적 신앙 결사를 주창하였다. 이는 고려 말 불교가 온갖 부정부패에 휘말리면서도 백성들 속에서 명맥을 이어간 이유로 평가받는다.

끝내 '결사 운동'은 실패하고 고려는 멸망한다. 조선 건국의 밑돌을 놓은 사대부들은 불교의 타락을 고려 멸망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든다. 여말선초 왜구의 노략질까지 더해져 백련사 역시 가혹한 시련을 겪지만, 민중을 보듬는 '결사 운동'의 정신만은 면면히 계승된다.
 
대웅보전 현판 동국진체의 대표작으로, 무시로 떨리는 필획에 울분이 느껴진다.
▲ 대웅보전 현판 동국진체의 대표작으로, 무시로 떨리는 필획에 울분이 느껴진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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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 숭유억불 정책으로 전국의 절들이 퇴락을 거듭할 때도, 이곳만은 굳건히 살아남았다. 왕위를 동생인 충녕대군(세종)에 양보한 효령대군이 무려 8년간 머물렀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권력을 위해 친형제까지 도륙하는 현실을 지켜본 그에게 백련사는 어떤 위로를 건넸을까.

이광사도 유배길에 이곳을 들르면서 효령대군의 자취를 더듬었을 것이다. 그도 효령대군의 아버지인 이방원(태종)의 형인 이방과(정종)의 직계 후손으로, 엄연히 왕족 집안이다. 효령대군에 빙의되어 권력의 비정함을 이심전심 느끼며, 울분을 글씨로 드러낸 것은 아닐는지.

김정희가 제주도에서 9년간의 혹독한 유배 생활을 거친 뒤에야 이광사의 서체를 인정했듯이, 그도 권력에서 밀려난 뒤에 비로소 민중의 삶이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의 후손들이 하나같이 백성의 곤궁한 삶을 보듬기 위한 학문에 매진한 것도 그래서다. <연려실기술>을 쓴 실학자 이긍익이 그의 아들이고, 강화학파의 거두 이건창이 5대손이다.

고백하자면, 그의 흔들리는 글씨 앞에 서면 내 마음이 담긴 것 같아 오히려 위로를 받게 된다. 김정희의 '추사체'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완결적 내공이 느껴져 그 앞에서 말을 걸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이광사의 글씨는 호들갑스럽게 맞장구치며 내 편이 돼줄 것만 같다.

'문자향(文字香)'이란 이런 걸까. 혹자는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낀다지만, 사람마다 경험이 다를 테니, 각자의 느낌이 곧 정답이다. 백련사에 오거들랑 우선 이광사의 현판 글씨 앞에 우두커니 서서 자신의 감상을 마음에 담아보라. 그게 백련사 여행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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