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른 아침부터 핸드이 울린다.

"여보세요?"
"나. 나 있잖아."
"아. 아. 안녕하세요? 사모님."(은사님 부인인데 마땅한 호칭이 어려워 그냥 사모님이라 부른다.)
"바쁜데, 내일 괜찮으면 집에서 차 한 잔 줄쳐? 잠깐이면 돼요. 나도 나가 봐야 거든. 몇 시에 갈까?"
"네 물론이죠. 오셔도 돼요. 제가 내일은 조금 늦게 나가니깐 11시쯤 오실래요?"
"알겠어요."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서 쓰시는 전화 주인공은 바로 가까운 거리에 사는 이웃 어르신이다. 이사 오고 얼마 안 돼서 동네를 지나고 있는데 알 듯 모를 듯 어딘가 익숙한 분이 밭을 갈고 계셨다. 자세히 보니 고등학교 은사님이었다.

은사님은 학교를 은퇴하시고 이곳에 집을 짓고 사신 지 13년이 되셨다고 했다. 그 이후로 길을 지날 때면 오이랑 가지와 토마토 등을 따주셨고, 한동네 살면서 간간이 인사하는 사이가 되었다. 지난번 한동안 선생님이 보이지 않아 연락을 드렸더니 아프시다는 말에 음료수를 가지고 갔었다. 그 이후 오랜만이었다.

다음날, 무슨 일 때문에 오는지 궁금해하면서 서둘러 집 안 청소를 했다. 10시쯤 초인종이 울렸다. 11시 약속이었지만 일찍 오리란 걸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일렀다. 서둘러 문을 열어보니 많이 두껍지 않은 잠바에 보라색 두툼한 조끼를 걸치셨고 두꺼운 겨울 바지 차림이었다.

펌과 염색을 한 지 오래되었는지 파마기가 거의 없으셨으며, 몇 개 안 되는 검은색 머리카락 사이에 은빛이 반짝였다. 추운지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고 미소를 머금고 들어오셨다. 손에는 다소 무거워 보이는 검정 비닐봉지가 들려있었다.
  
어르신이 선물을 가득 안고 오셨다.
▲ 어르신의 검정 비닐 꾸러미 어르신이 선물을 가득 안고 오셨다.
ⓒ 고수미

관련사진보기

 
자리에 앉자마자 꾸러미를 풀어놓았다. 그 안에는 빵 몇 개와 진공 포장된 커다란 떡볶이용 떡과 귤 십여 개가 들어 있었다. 그 물건에 대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풀어놓으셨다. 생생정보통에 나온 유명한 빵집에서 한 달을 기다려 받은 빵이며, 남편의 친구가 서울에서 떡 가공회사를 하는데 한 달에 한 번씩 친구들에게 좋은 쌀로 떡을 빼서 보내줘 이웃들과 나눠 먹는다는 이야기, 귤은 농약을 하나도 치지 않고 지인이 보내주셨다며 당장 입에 넣어 맛을 보라고 한다. 급하게 까서 한 입 먹으니 차갑지만 맛이 달았다. 다정한 어르신의 정에 귤에서 사골국보다 더 진한 맛이 우러난 듯했다.
 
너무 맛있으니까 빨리 먹어보라고 하시는 어르신의 다정함이 고마웠다.
▲ 귤 너무 맛있으니까 빨리 먹어보라고 하시는 어르신의 다정함이 고마웠다.
ⓒ 고수미

관련사진보기

   
그 이후에 어르신은 은사님 험담을 조금 했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들은 얘기는 못 들은 걸로 아름답게 마무리했다. 이후에 봉사 단체에서의 일들도 들었다. 시장상과 도지사상 등을 휩쓸 정도로 한때 열심히 살았고, 지금도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많이 돕고 사신다고 했다. 하지만 어르신을 챙겨주는 이웃은 없다는 얘기를 하고 또 하는데, 왠지 모를 쓸쓸함이 묻어 있었다.

"이제는 삶의 낙이 없어. 봉사하려고 해도 코로나 때문에 못하고, 늙은이를 반겨주는 곳도 별로 없어서 갈 데도 없어. 이것 봐 파마도 염색도 안 했잖아. 이제는 관심도 없네. 아들이 자꾸 오라고 해서 아들 집 옆으로 이사 가려고. 집을 내놓았는데 혹시 주변에 집 사겠다는 사람 좀 알아봐 줘요."

얼마간 아무 말씀을 못하시다가 이러신다.

"진짜 이사 가기 싫어. 여기서 그냥 살고 싶은데 낙이 없고 외로워. 선생님도 가기 싫어하는데 아들 말을 잘 들어. 바쁜데 내 얘기가 길었네."

사모님은 한 시간 남짓 이야기를 하시고 일어섰다.

문밖에 함께 나가 배웅을 해드렸다.

어르신의 말들이, 살아온 인생의 수많은 이야기들이 마치 골목 공간에 가득한 것처럼 처연하고 슬프게 느껴졌다. 부디 후회와 절망 가운데 미래를 맞이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살아온 세월들이 정말 아름다웠다는 것을, 또한 다가올 미래도 더 아름다울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시길 기도해본다. 그건 아마도 같은 길을 밟을 나에게 하는 말일지 모를 일이다.
 
어르신이 가신 골목길에 쓸쓸함이 가득하다.
▲ 골목길 어르신이 가신 골목길에 쓸쓸함이 가득하다.
ⓒ 고수미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브런치나 개인 블로그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태그:#어르신, #동네, #쓸쓸함, #노년, #이읏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아주 작은 꽃부터 사랑스런 아이들,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배우려고 합니다. 부족하지만 매일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