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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슈티메르트의 그림책 <우당탕당, 할머니 귀가 커졌어요>(비룡소)는 우리에게는 '층간 소음'이라는 문제로 너무도 익숙한 이야기이다. 우리집만 해도 12시가 넘으면 위층에서 청소기를 돌린다. 처음에는 한번만 그러는 줄 알았는데, 지내다 보니 매일 그 시간에 일정하게 청소기 소리가 난다. 모두가 잠든 시간, 그 조용한 시간 위층에서 들리는 청소기 소리에 나도 그림책 속 할머니처럼 뛰어올라가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우당탕탕, 할머니 귀가 커졌어요
 우당탕탕, 할머니 귀가 커졌어요
ⓒ 비룡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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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좁은 집에서 살던 가족이 넓고 환한 새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새 집으로 이사 온 가족들은 온 방안을 돌아다니며 즐거워했어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인 것 같아 큰 소리로 웃고 고함도 질렀죠. 
식구들은 너무 기뻐서 손을 잡고 둥그렇게 원을 그리며 춤도 추었답니다.'


얼마나 좋았으면 춤까지 췄을까, 그런데 기쁨도 잠시 아래층 할머니가 등장한다. '왜 이렇게 시끄러운 거예요? 천장이 다 무너지겠어요!'라고 소리를 꽥 지르고 문을 꽝 닫고 층계를 쿵쾅쿵쾅 내려가 버린다. 
 
 우당탕탕, 할머니 귀가 커졌어요
 우당탕탕, 할머니 귀가 커졌어요
ⓒ 비룡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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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층 가족들은 '자구지책'을 모색한다. 카펫도 깔고 쿠션으로 입도 틀어막고, 하지만 소용이 없다. 아래층 할머니는 날마다 올라와 잔소리를 해대고, 빗자루로 천장을 쿡쿡 찌르거나 난방기를 두드리곤 하며 시끄럽다고 난리다. 결국 위축된 위층 아이들은 생쥐처럼 네 발로 기어 다니고 말도 속삭이며 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문제가 해결되었을까? 우리 사회에서라면 위층 가족이 조용해진 걸로 사태가 일단락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당탕탕, 할머니 귀가 커졌어요>는 다르게 이야기를 펼쳐낸다.

층간소음에 귀가 커져버린 할머니

위층 가족의 동정에 온통 신경을 쏟던 할머니, 위층에서 소리가 들리지 않자 어떻게든 위층의 소리를 들으려 애를 쓰다 귀가 커지기 시작한 것이다. 너울너울 커져버린 할머니 귀는 이제 모자로 가려지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심지어 동네 사람들이 할머니를 보고 손가락질을 하며 수군거려 집 밖을 나가지도 못할 상황이 되었다. 

위층에서 나는 소리 때문에 귀가 커진 할머니라니 '층간 소음'이라는 사회적 문제에 대한 기발한 상상력이다. 한껏 위축된 위층 사람들, 기세등등한 할머니 그림으로 전달되는 '풍자'가 그 상황으로 독자를 빨아들인다. 
 우당탕탕, 할머니 귀가 커졌어요
 우당탕탕, 할머니 귀가 커졌어요
ⓒ 비룡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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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간 소음'이라는 위층과 아래층의 갈등은 위층 가족들에게는 '생쥐'가 되어버린 듯 위축된 상황을 야기했고, 아래층 할머니에게는 귀가 커지는 병이 생기게 되었다. 외적으로는 '층간 소음'이라는 '사건'이지만 그 아래 잠재되어 있는 건 오늘날 우리가 어디서든 부딪치고 있는 '관계'의 문제이다.

관계로부터 시작된 갈등이 '내재화'되어 위층 가족과 아래층 할머니 모두에게 스스로 견디기 힘든 '상황'을 초래한 것이다. 이런 관계의 문제에서 우선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역지사지'이다. 아래층 할머니가 대뜸 위층에 뛰어올라가 소리를 지르기 전에 오늘 이사를 왔느냐고, 그래도 아래층에 사는 내가 시끄러우니 조금 조용히 해달라며 접근했다면 아마도 위층 사람들은 '생쥐'가 될 만큼 위축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늘 조용히 살던 할머니지만 위층에 아이들이 있으니 어느 정도는 '시끄러움'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어땠을까? 정작 위층에 올라가 소리를 꽥 지르고 쿵쾅쿵쾅 내려왔던 자신의 모습을 되새겨 보았다면? 게다가 할머니는 제법 우렁차게 짖을 것 같은 '개'도 한 마리 키우시던데 그 개한테도 위층 아이들한테 하듯이 그랬을까? 물론 위층 사람들도 이사 온 기쁨에 들뜨기 전에 자신들의 아래층에 누군가 살고 있을 거라는 '배려'가 우선했다면 어땠을까? 

'역지사지'라는 건 결국 '관계'의 방점이다. 우리는 '사회'에 머물러 살면서 '관계'를 맺고 살지만 늘 '관계'에서 우선시되는 건 '나'이다. '나'를 위주로 관계를 맺다 보니, '관계'로 인한 문제들이 '나'를 중심으로 풀어지지 않으면 못 견디는 상황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중심으로 풀면서 그 '원인'을 전적으로 바깥에서 찾는다. 내가 중심이라 하면서 문제의 중심은 바깥에 둔다. 당신들이 해결해주라는 식이다.

문제 해결의 원인을 나에게 찾기

그림책에서 할머니 귀는 어떻게 되었을까? 의사는 처방을 내린다.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으려고 너무 애쓰다가 병이 나셨군요. 못 들어서 생긴 병이 나신 거예요' 위층 가족 소리에만 신경을 쓰던 할머니에게 병이 났다. 결국 '나'가 탈이 난 것이다. 위층이라고 다를까? 할머니의 잔소리에 위축되다 '생쥐'가 되어버렸다. 결자해지, 의사의 처방전에 따라 할머니는 '소리'를 청할 수밖에 없었다. 

처방전이 말하고자 하는 건 무엇이었을까? 위층 소리 때문에 시끄러워 못 살겠다던 할머니는 이제 '소리'를 들어야만 하는 처지에 놓였다.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 걸까? 마음 아닐까? 못 견디겠던 소음이 이제는 '불감청 고소원(먼저 나서서 행동하지는 못하지만 진심으로 원하는 일)'이 되었다.

할머니의 '커진 귀' 해프닝은 사실 우리에게도 빈번하게 벌어지는 일이다. 내 문제의 중심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림책은 '할머니의 커진 귀'를 통해 '병든 마음'을 드러내 보인다. 층간 소음이라는 상황이 그저 사회적 문제를 넘어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본 것이다.

그렇게도 못 견디던 그 무엇인가가 내 마음이 바뀌니 여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 상황들을 누구나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해골에 담긴 물을 밤새 맛나게 마시던 원효의 상황을 뭐 굳이 멀리 찾을까.

가족 관계 이론을 펼친 심리학자 보웬은 '관계'를 이끌어 가는 생명력을 '개별성'과 연합성'에서 찾는다. 내가 속한 집단과 내가 따로 또 같이 건강하게 함께 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관계의 문제로 인해 늘 골머리를 앓지만 여전히 그 해법에 미숙하다. 할머니처럼 전적으로 내 문제를 남 탓으로 돌리거나, 위층 가족처럼 한없이 자신들의 동굴 속으로 숨어들어가 버리곤 한다. 나와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의 처방전이 필요하다. 

즉문즉설을 통한 법륜 스님의 이런 처방전은 어떨까? 상대방의 오해를 사지 않게 우선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것이 우선이라 하셨다. 때로는 자신의 생각을 밝히지 않는 것이 상대방으로부터 오해를 사거나 문제를 더 어렵게 할 수도 있다고. 그리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자신의 생각을 가지되, 그 생각을 고집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신다. 나도 살고, 나와 함께 하는 이도 살고, 여러분이라면 어떤 처방전을 쓸까?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블로그 https://blog.naver.com/cucumberjh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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