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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의 월명산(105m)을 주봉으로 서낭당 고개(형무소 고개), 콩나물 고개(아리랑 고개), 군청고개(둔율동 고개) 등과 어깨동무하듯 어우러지는 '산끊어진 고개'는 일제의 흔적으로 식민지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채만식 소설 <탁류>를 떠오르게 하는 이곳은 군산에서 사춘기를 보낸 중장년층에게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는 문화 공간이다. 늦기 전에 기록으로 남겨본다.[기자말]
 철거 앞두고 있는 선양동 산동네 모습(2011년 7월 촬영)
 철거 앞두고 있는 선양동 산동네 모습(2011년 7월 촬영)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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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시 선양동·흥남동·둔율동·미원동·삼학동·오룡동·장재동·수송동 등은 조선 시대 옥구군 북면 둔율리(屯栗里)에 속하였다. 이 지역에 둔소(屯所·병영)와 둔전(屯田)이 있었단다. 1917년 제작된 지도에 둔율리는 낮은 산지와 논, 갈대밭 등으로 이뤄졌으며 선양·둔율·오룡동은 '둔율 1리' 흥남·삼학·미원동은 '둔율 2리' 수송동 지역은 '둔율 3리'로 표기되어 있다.

그중 선양동은 옥구군 북면에 속했으나 경술국치(1910) 이후 지방 행정구역이 대대적으로 개편되는 1914년 '옥구군 미면'에 편입된다. 이때부터 지도에 '둔율리(둔뱀이)'란 지명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선양동은 안쪽에 위치한 마을이어서 '안둔뱀이(안둔배미)'로 불렸다. 1932년 군산부는 둔율리 일부를 갈라 일본식 지명인 산상정(山上町)으로 개편한다.

1930년대 군산은 공설시장(재래시장)이 한 곳밖에 없어 교통 및 위생상 많은 불편을 겪었다. 당시 군산부는 제2시장 신설을 결의하고 적잖은 편리를 가져다줄 거라고 선전하였다. 시장 위치는 '산상정(선양동) 일대'. 일제는 1936년 4월 총면적 1244평(건평 400평) 규모의 산상정 시장을 완공했으며, 개장 기념으로 호남 각희대회(씨름대회)가 열리기도 하였다.

산상정은 광복 후(1946) '선양동(先陽洞)'으로 개칭된다. 그럼에도 고지대는 노후 된 불량주택 밀집 지역이었다. 금방이라도 도깨비가 튀어나올 것 같은 폐가가 수두룩하였고, 넘어지면 코가 깨질 것 같은 비탈길이 사방팔방으로 뻗어 있었으나 2000년대에 주거환경 개선사업이 추진되고, 2009년 임대주택 건설과 해돋이공원이 조성된다.

조선 시대 둔율리(둔뱀이) 최근 모습 
 
 선양고가교(산끊어진 고개)에서 팔마산(흥남동)을 바라본 모습
 선양고가교(산끊어진 고개)에서 팔마산(흥남동)을 바라본 모습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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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양동 해돋이공원과 창성주공아파트 단지를 잇는 '선양고가교(산끊어진 고개)'에서 팔마산(흥남동)을 바라본 모습이다. 옛 둔율리(둔뱀이)에 속한 지역으로 맨 왼쪽 두 동의 고층아파트 건물은 서래산 자리, 이웃한 아파트 단지는 50~70년대 '만월표 고무신'으로 명성을 떨쳤던 경성고무(주) 자리, 맨 오른쪽 아파트 건물군은 서흥남동(흙구더기) 달동네였다.

사진 아래쪽 주차장 자리에 미룡주조장이 있었고, 붉은색 건물은 옛 신호약국(신호슈퍼), 그 앞 삼거리는 콩나물고개로 이어지는 책방골목이었다. 삼거리에서 4차선 도로 따라 조금 더 올라가면 미원사거리, 그곳에서 좌회전하면 구 군산역, 직진하면 흙구더기에 이른다. 도시 조성 전에는 도로 좌측에 개울이 흘렀으며 미원사거리 주위에 큰 방죽이 있었다.

채만식 소설 <탁류>(1939년 출간)에 소개되는 내용 중 "'흙구더기'까지 맞닿았던 수만 평의 논은 다 없어지고, 그 자리에 집이 들어앉고 그 한복판으로 이 근처(산상정)의 집 꼬락서니와는 어울리지 않게 넓은 길이 질펀히 뻗어 들어왔다"는 대목으로 미뤄 사진 속 4차선 도로(군산역-미원사거리-명산동)는 1930년대 중반쯤 개통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련한 풍경으로 남은 1950년대 '산끊어진 고개' 
 
 명산동 쪽에서 바라본 1950년대 산끊어진 고개 모습
 명산동 쪽에서 바라본 1950년대 산끊어진 고개 모습
ⓒ 군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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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1950년대 '산끊어진 고개' 모습이다. 도로 오른쪽은 선양동, 왼쪽은 창성동으로 경사가 무척 가파른 좌우측 암벽이 위태롭게 느껴진다. 이곳은 '6·25전쟁 때 인민군의 폭격으로 만들어진 고개다', '일제 때 왜놈들이 굴을 뚫으려다가 실패하고 굴착도로를 만들었다' 등의 그럴듯한 설만 무성할 뿐 언제 개설됐는지 확인할 자료가 없는 상태였다.

다만, 1936년 3월 30일 치 동아일보와 1939년 8월 12일 치 동아일보에 따르면 '산끊어진 고개'는 1936년 초여름 일제가 총공사비 5만6000원으로 공사에 착수, 1939년 8월 개통식을 성대하게 치른 개착도로(開鑿道路)를 일컫는다. 깎아지른 듯한 도로변 암벽 높이는 50척 이상(15~20m)으로 개통 한 달도 안 되어 벼랑 위에서 놀던 여아(8살)가 추락,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광복 후에도 주변에 안전 장치가 설치되지 않아 선양·창성동 산동네 아이들과 노약자들이 발을 헛디뎌 낙상하는 사고가 종종 일어나 주민들이 항상 불안해 하였다. 직장인들의 출퇴근길이자 초중고생들의 등굣길이기도 했던 '산끊어진 고개'는 한때 불량청소년들 집합소로, 강력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 '우범지역'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칭을 얻기도 하였다.

여고시절 아침저녁으로 산끊어진 고갯길을 오갔다는 최재희(50대) 안무가는 "깎아지른 듯한 양쪽 암벽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어찌나 위태위태했던지 지날 때마다 두려움을 느꼈다"며 아련한 추억들을 더듬었다.

"30년도 더 된 이야기다. 그때는 학교에 갈 때마다 '산끊어진 고개'를 넘어야 했다. 거리에는 자전거가 빽빽했고, 삼삼오오 짝지어 깔깔대는 교복 차림의 남녀학생들로 항상 붐볐다. 겨울엔 유달리 추웠으며, 가파른 절벽에 압도되어 재빠르게 지나갔던 기억들이 새롭다. 특히 험한 벼랑길을 힘겹게 걸어가는 할머니, 판자와 골판지로 누덕누덕 지은 하꼬방 가게들, 그리고 다양한 노점상 모습들이 애틋하고 아련한 풍경으로 남아있다."
 

소설 <탁류>와 함께 떠나는 시간여행
 
 명산동 쪽에서 바라본 최근 산끊어진 고개 모습
 명산동 쪽에서 바라본 최근 산끊어진 고개 모습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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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끊어진 고개' 최근 모습이다. 흥남동 산등성이 자리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도로가 4차선으로 확장됐으며, 벼랑 위로 선양고가교가 놓여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고가다리 중간쯤에 <탁류>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 소설 속 정주사 집이 그쯤에 있었던 것. 아래는 소설에서 정주사가 코가 빠지게 걱정하는 대목이다.

"'흙구더기'까지 맞닿았던 수만 평의 논은 다 없어지고, 그 자리에 집이 들어앉고 그 한복판으로 이 근처의 집 꼬락서니와는 얼리지 않게 '넓은 길'이 질펀히 뻗어 들어왔다. 그놈을 등 너머 신흥동으로 뽑으려고 둔뱀이 밑구멍에 굴을 뚫을 계획이라는데, 정주사네 집은 바로 그 위에 가서 올라앉게 되었다."
 

위에서 '넓은 길'은 지금의 미원동 사거리-산끊어진 고개 방향 도로이고, '흙구더기'는 재개발로 사라진 서흥남동(팔마산) 지역으로 비가 조금만 내려도 진흙탕이 되는 동네라서 붙여진 지명이다. '수만 평의 논은 다 없어졌다'고 한탄하는 대목은 지금의 미원동, 장재동, 삼학동, 둔율동, 선양동 평지와 주택가 대부분이 당시 논이었음을 시사한다.

일제강점기 '개착도로'는 광복 후 '선양동 고개', '명산동 고개', '산끊어진 고개' 등으로 불렸으며, 1980년대 후반 4차선으로 확장되고 1996년 11월 '선양고가교' 완공으로 두 지역이 하나로 이어지게 됐다. 한때 '우범지역'으로 전락, 시민들에게 외면당했던 산끊어진 고개 가로변이 작가들의 미술작품으로 새롭게 단장된다고 한다. 만시지탄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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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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