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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 伯(백)의 숲'에서 온 편지
 
희수, 나는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안수 리에게, 그가 만약 살아 있다면, 한나의 임종을 전하고 싶다.*

조해진 작가의 단편소설 <동쪽 伯의 숲>은 독일 작가들과 아시아 작가들의 교류회에서 만난 발터와 희수가 서신을 주고받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발터는 희수에게 자신의 증조할머니, 한나의 임종을 전하며 생전 그녀가 사랑했던 한국인 유학생 '안수 리'에게 그녀의 임종 사실을 전할 것을 부탁한다.

희수는 처음 답장에서 발터의 부탁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지만, 1960년대 사회적 상황에서 한나와 안수 리가 겪어야 했던 야만적인 조작 사건의 내막과 그것이 둘의 관계에 미친 영향에 관해 세밀히 알게 되면서 이내 그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다. 그렇게 희수와 발터는 조작 사건 이후 자발적으로 모든 관계를 단절했던 안수 리에게 그의 연인, 한나의 임종 소식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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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베를린예술대학교에서 작곡을 공부하던 한나는 어느 한국인 작곡가의 집에서 안수 리를 만났다. "관계의 시작부터 차단해버리는" 메마른 규칙을 갖고 살아가던 그녀는 첫 만남에서 "자신의 삶에 안수 리가 걸어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한나에게 "역사를 안겨 준" 안수 리는 1967년 4월, 베를린에서 감쪽같이 사라진다.

안수 리의 실종은 사적인 해프닝이 아니었는데, 실종 두 달 후부터 십여 명의 서독 내 한국 유학생 및 광부들이 연이어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그를 포함하여 실종된 한인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고국인 한국에서 발견된다. 실종처럼 갑작스러웠던 귀국, 그 기묘한 사건의 이면에는 한국에서 파견된 특수 경찰들이 그들을 유인하여 강제로 한국행 비행기를 태웠다는 사실이 자리한다.
 
그 시간은 한 인간으로서 숨겨두고 싶었던 모든 것을 한줌의 배려도 없이 적나라하게 들춰냈다.

스물 여덟 살의 안수 리는 도착한 한국에서 "발가벗겨진 시간"을 경험한다. 그는 "동베를린의 북한대사관을 출입한 적 있는 한국인들을 밀고한 스파이"가 되었다. 안수 리는 스파이가 되어야만 했다. 그랬기에 그는 "매달려 매를 맞고 물속에 잠기고 전기 충격이 온몸을 관통하는" 시간을 겪어야 했다.

자발적 스파이의 등장으로 그가 필요 없어지자 그를 고문한 이들은 그에게 "알 수 없는 약을 잔뜩 먹인 뒤 어느 대학병원 입원실에 가뒀다." 그해 7월 말이 되어서야 병원에서 풀려난 안수 리는 함께 공부했던 동료들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 독일행을 포기한다. 그렇게 그는 "발가벗겨진 시간"을 "외면하면서 살아남았다."

서독에 거주하던 한국인들의 "비밀스러운 연행"은 어떤 연유로 일어난 것일까? 안수 리는 왜 "발가벗겨진 시간"을 경험해야 했으며, 풀려난 이후에도 "자신이 믿고 의지했던 사람들이 체포되어 공판을 받는 과정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걸까?

1967년, 동백림(東伯林) 사건이 공표되다
 
'동쪽 伯의 숲' 사건.
주로 독일 내 한국 유학생들과 광부들이 한국으로 연행되어 실형을 받았던 그 사건에 누군가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 '伯의 숲'(伯林)은 '베를린'의 일본식 발음에 맞는 한자를 가져와 만들어진 단어인데, 영어로 음차를 표기한다면 'baeklim'정도가 될 것이다.

'백림伯林'은 '베를린'의 한자식 표현이며, '동백림'은 구동독의 수도 '동베를린'을 의미한다. 이제는 미디어나 일상에서 '백림伯林'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1970년대 이전만 해도 '백림'과 '베를린'은 혼용되었다.

'동백림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1967년 7월 8일 중앙정보부는 '동백림을 거점으로 한 북괴대남적화공작단 사건'의 전모를 발표했다.

중앙정보부 발표에 따르면 이 사건은 과거 유럽(주로 서독과 프랑스)에서 유학한 바 있는 현역 교수나 현재 유학 중인 학생들을 중심으로 194명이 관련된 역대 최대 규모의 '간첩'사건이었다. 관련자 중 15명은 1958년 9월부터 1967년 5월 사이에 동베를린에 있는 동독주재 북한대사관을 왕래하면서 북한과 접선, 간첩활동을 해왔으며, 7명은 소련과 중국 등을 경유하여 직접 평양까지 방문, 밀봉교육1)을 받고 귀국하여 간첩활동을 해왔다고 공표되었다.2)

이후 중앙정보부는 7차례에 걸쳐 중계방송을 하듯 연일 이 사건의 중간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그리고 7월 말까지 총 315명을 조사해서 66명을 검찰에 송치했다. 검찰은 이 중 34명을 '간첩죄'와 '잠입죄'등을 적용하여 재판에 넘겼다. 또 동백림 사건에서 파생된 민비연(민족주의비교연구회) 사건 관련자 7명을 '반국가단체'구성혐의로 역시 구속기소 했다.3)

1심과 항소심에서는 관련자들의 혐의가 대부분 인정되었으나, 1968년 7월 상고심에서 대법원이 '간첩죄'와 '잠입죄' 적용에 문제가 있다며 중형자 대부분의 원심을 파기하고 이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이후 재항소심을 거쳐 1969년 4월 재상고심에서 관련자 2명에게 사형, 1명에게 무기징역 등이 확정되면서 무려 5차례에 걸친 재판이 모두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동백림 사건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관련자 전원은 1970년 말까지 모두 감형과 특사의 방식으로 감옥에서 나왔다. 해외에서 귀국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다시 출국하였다.4)

역대 최대 규모의 간첩사건과 '강제귀국'

1967년 당시 동백림 사건은 "북한을 배후로 갖는 대표적 불온사건"5)이었다. 동백림 사건은 송치 및 구속된 인원의 규모만으로도 충분히 이슈가 될 만큼 거물급 사건이었고, 그간 발생한 공안사건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다.6) 담당 수사기관인 중앙정보부는 단기간에 7차례나 수사결과를 발표하였고, 언론은 연일 사안에 관한 상세내용을 대서특필했다.
 
그래도 지금 가시는 게 여러모로 좋을 겁니다. 남자들 중 누군가 비웃듯 말했을 때, 안수 리는 그제야 연회니 맥주니 하는 게 그들의 진짜 의도가 아니란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때가 첫번째 기회였소. 안수 리는 말했다. 하지만 도망갈 수 있는 그 최초의 기회를 나는 놓쳤지.

<동쪽 伯의 숲>에서 안수 리가 증언했듯 간첩혐의를 받던 한국 유학생의 귀국은 그것이 자발적이냐, 강제적이냐를 둘러싼 쟁점에 관하여 국내외에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사건 당시 한국 정부는 해외 관련자들이 자신들의 간첩혐의를 해명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귀국했다고 주장했다.7) 그러나 중앙정보부가 공작과 폭력적 수단을 통해 해외 관련자들을 강제귀국시켰다는 의혹도 일찍부터 제기되었다.8) 강제귀국은 관련자 거주국 입장에서는 주권침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이는 곧바로 서독과 외교적 마찰로 이어졌다.9)

동백림 사건 발표 초기에 외교적 긴장을 초래한 핵심쟁점은 '주권문제'였다. 서독언론들은 동백림 사건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남한 중앙정보부에 의한 서독 주권침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았으며 한국 정부가 관련자를 귀국시키는 과정에서 서독정부에 제대로 알리지 않은 점을 지적하였다.10)

또한 서독언론들은 관련자의 귀국에 대하여 그들이 귀국하지 않을 경우 자신들과 가족에게 제재가 들어올 것이라 두려워하여 귀국한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11) 서독은 비록 남한과 서독이 반공투쟁이라는 같은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권과 진실이 중요하다는 입장12)이었고 이는 한국 정부에 대한 매우 강경한 외교적 입장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한국 정부는 한‧독 외교관계의 악화를 막기 위해 관련자의 귀국이 '자발적'이었음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국정원과거사위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중앙정보부는 해외 혐의자를 체포‧연행하기 위해 작성한 'GK-공작계획'에 따라 수사관들을 해외에 파견했다. 애초 계획에는 마취제로 혐의자를 제압하는 강압적 방안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 연행 과정을 살펴보면 기록상 서독에서의 연행자 전원이 자진 귀국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당시 중앙정보부 관계자들도 마취제 등을 사용한 강제 연행을 부인했다.13)

수사기관인 중앙정보부만 '자발적 귀국'을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간첩혐의를 받던 관련자 중 한 명인 이수길 의학박사는 한국에서의 조사 이후 서독으로 돌아오자마자 기자회견을 통해 자진해서 한국으로 갔다고 공표하며 한국 정부를 두둔하는 발언을 했다.14) 일찍 혐의를 벗고 서독으로 돌아간 동백림 사건 관련자 대부분은 이수길처럼 자신의 '자진'귀국을 강조했다.15)

중앙정보부의 주장과 몇몇 관련자들의 증언대로 동백림 사건의 귀국 과정은 정말'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걸까? 하지만 이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진귀국 주장 속에 담긴 맥락과 숨겨진 의미에 더 주목해야 한다. 앞서 언급한 이수길의 사례에서 중요한 점은 그가 간호사 파독과 관련하여 동백림 사건 이전부터 한국 정부, 특히 중앙정보부와 일정한 관계를 계속 유지해오던 상황이었다는 것이다.16)

따라서 이수길은 비록 동백림 사건으로 중앙정보부에 의해 큰 곤욕을 당했지만, 향후 간호사 파독을 계속 추진하기 위해서는 진실 폭로로 그 관계를 끊을 수 없었을 것이다.17) 더 나아가 그가 중앙정보부로부터 사태수습을 위한 적극적인 역할을 요청받았을 수도 있다. 이처럼 관련자들은 "실질적으로 '강제'귀국이었음에도 스스로 '자진'귀국을 주장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에 처해있었다.

결국, 동백림 사건 관련자들의 귀국은 "형식적으로는 자발적이라도 실제로는 강제적"이었다. 국내 초청이나 식사 초대 등 거짓말에 의해 대사관으로 유인된 후 폭력 등 강압적 분위기 속에서 불가피하게 한국행을 동의했다는 일부 관련자의 진술18)에서 알 수 있듯 사건 관련자들의 귀국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압박이 존재했고 그러한 압박은 그들이 언론 등 공론장에서 진실을 폭로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단순히 귀국 과정에서 물리적 폭력이 있었는지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실대로 말하기 어려운 분위기 속에서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생각해서, 또 앞으로 한국 정부와의 향후 관계를 고려하여 사건 관련자가 귀국의 강제성을 최대한 부인하고 자발성을 강조했을 수 있다.19) 따라서 동백림 사건 해외 관련자들의 강제귀국 여부는 이러한 맥락과 의미를 충분히 고려하면서 분석‧해석돼야 한다.

부풀려진 '역대 최대 규모'의 간첩사건

동백림 사건의 가장 큰 쟁점은 사건의 실체가 있는가, 기획‧조작되었다면 그것은 어느 정도인가 하는 점이다. 중앙정보부는 여러 차례의 발표를 통해 동백림 사건의 심각성과 위험성을 부각하였고 동백림 사건은 그 명칭과 관계없이 간첩사건으로 널리 인식되었다.20)

검찰 기소와 이후 재판 과정에서 이 사건은 계속 간첩사건으로 다루어졌다. 법원 역시 1심과 항소심에서 검찰의 공소 내용을 대부분 받아들여 간첩혐의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상고심에서 대법원은 12명의 피고인에 대해 "원심이 간첩죄와 잠입죄를 적용한 것은 법 적용의 잘못이 있다"고 판시, 원심판결 중 이에 대한 유죄 부분을 깨고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환송했다. 상고심의 파기 환송 이후 재상고심을 거쳐 동백림 사건의 최종판결이 확정되었는데, 결국 간첩죄가 인정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한마디로 동백림 사건은 법적으로 명백히 간첩사건이 아니다.21)

국정원과거사위도 이를 다시 확인하였다.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동백림 사건에서 관련자들의 북한 방문, 북한으로부터의 금품수수, 북한을 위한 특수교육 이수, 북한의 요청사항 이행 등 실정법 위반 사례를 인정할 수 있지만, 중앙정보부가 여기에 간첩죄를 무리하게 적용함으로써 사건 관련자들의 대북 접촉 및 동조 행위까지도 간첩행위로 일반 국민들에게 확대 오인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한다.

조사보고서는 그 밖에도 중앙정보부가 혐의가 미미하고 범의도 없던 자에 대해 범죄혐의를 확대하고, 귀국 후 대북 접촉 활동을 과장하는 등 사건의 본질을 왜곡시켰다고 지적했다. 동백림 사건은 실체가 없지는 않지만, 결코 간첩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22)

냉전의 지형학과 '유학생'으로서 한국인

그렇다면 동백림 사건 관련자들의 평양이나 북한 대사관을 방문한 경험, 북한과의 접촉과 관계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관련자들과 북한의 교류가 왜 발생했는지를 알기 위해선 유학생에 대한 당시 한국 정부의 태도와 그들이 처한 환경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백림 사건의 최초 제보자였던 임석진은 이 시기에 '한국 유학생들'은 "거의 무방비상태에 방치돼 있다시피"했다고 기술한 바 있다. 실제로 1950‧1960년대에 유럽으로 유학을 간 한국인 학생이나 지식인 가운데에는 '형편이 곤란한 고학력자'들이 많았다.

북한 측 공작원들은 생활 형편이 어려운 유학생이나 예술가들에게 개인적인 연락관계를 형성한 후 생활보조금 명목으로 경제적 지원을 해왔고, 여건이 여의치 않은 일부의 사람들은 지원금을 받아썼던 것이다. 차후 동백림 사건이 발생함에 따라 이들이 받은 돈은 특정한 정치적 목적 하에 수수된 '공작금'으로 변모하게 된다.23)

당시 해외한국공관은 체계적인 관리시스템이나 전문 인력을 갖추고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유학생과 교포에 '무관심'하거나 '권위주의적 태도'를 보이기도 했는데, 이러한 문제들은 북한의 개입을 쉽게 만드는 허점으로 작용했다.24) 또한 독일연방공화국은 베를린의 존재 때문에 한인들이 신분증에 확인도장이나 특별한 기재를 할 필요 없이 사회주의 구역을 드나들 수 있는 세계 유일의 장소였다.25)

다시 말해, 그들이 활동했던 독일(서독)이라는 장소는 남북의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영토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과 한국 유학생이 서로 교류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같은 시기, 북한은 체제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유럽사회에 지속적인 선전공세를 함으로써 일정한 인프라를 구축하게 되었고, 많은 한국인들이 선전 대상자 리스트에 올랐다.26)

하지만 북한은 선전공세를 통해 한국인들의 '조직자적 역할'을 기대했다기보다는 관련자 대부분이 유학생, 학자, 예술가 등 지식인인 만큼 '말이나 글로써' 북한체제에 일정한 기여를 해주길 바랐다. 해외교포나 남한 주민들에게 북한의 통일정책을 홍보하는 지식전파자이자 북한체제에 대한 우호적 입장을 견지한 담론생산자로서의 역할을 기대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27)

결론적으로, 사건 당시 한국 정부가 한국인 유학생을 대하는 태도, '독일'이라는 공간의 특수성, 유학생들의 경제 상황 및 지적 호기심 등을 고려했을 때, 동백림 사건은 "유럽에 거주하는 유학생들의 '경제적인 궁핍'과 '유학생들의 생활실태'에 대한 정부의 무관심을 반영하고 있는 상징적 사건"28)이다. '배후에 숨겨진 간첩활동' 같은 것은 애초에 계획조차 세워지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과 수많은 '간첩사건'
 
단순히 동베를린의 북한 대사관을 방문한 적이 있다는 이유로 외국에서 살고 있던 학생들과 노동자들을 한국으로 끌고 가 고문한 뒤 실형을 내린 것은 일본과의 어리석은 전후 협정과 집권당의 부정선거에 분노한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조작된, 그 시절에는 너무도 흔했던 정치적 폭력 중 하나였다.

희수가 발터에게 보낸 답장에서 그녀는 안수 리가 겪은 일에 대하여 위와 같이 말한다. 희수의 말처럼 동백림 사건은 박정희 정권 당시 한일국교정상화29)와 6.8부정선거로 인해 여론이 악화하던 시기에 발생했다. 또한 이 시기를 기점으로 동백림 사건과 같은 '공안사건'의 출현 빈도가 지속적으로 높아지기 시작했다.30) 동백림 사건은 당시 정치사회적 맥락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걸까? 쏟아져 나오던 간첩사건들의 실체는 무엇이었으며 그 배후엔 무엇이 자리하고 있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박정희 정권은 전쟁 이후 '반공이데올로기'를 강력한 국시(國是)로 삼았고 이를 바탕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를 조장함으로써 정부 정책에 대한 부정적 여론과 저항세력의 결집 및 확대를 저지하려 했다. 실체가 불분명하며 과장‧조작된 여러 간첩사건은 박정희 정권이 사회통제를 위해 사용한 대표적 전략이었다.

동백림 사건이 발표된 1967년 7월은 한 달 전인 6월 8일에 있었던 제7대 국회의원 선거의 부정 문제로 사회가 매우 시끄러웠던 때였다. 박정희 정권은 대통령의 연임을 1차 중임으로 제한하고 있던 헌법을 개정하여 4년 뒤에 있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의 세 번째 출마를 가능케 하기 위해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광범위한 부정행위가 발생하자 학생들을 중심으로 즉각 규탄시위가 전개되었다.31)

박정희 정부는 강경 진압은 물론 휴교령과 조기방학 실시 등의 조치를 통해 학생 시위를 탄압했다. 동백림 사건은 그 와중에 발표되었다. 무려 7차례에 걸쳐 7월 내내 지속적으로 발표된 동백림 사건은 사람들의 관심을 부정선거 문제에서 간첩 문제로 돌려놨다. 실제로 동백림 사건 발표 이후 6‧8부정선거에 대한 저항은 사실상 종결되었다.32)

동백림 사건의 최초 제보자였던 임석진에 의하면, 자신이 박정희 대통령을 직접 만나 동백림 사건 관련자들의 관대한 처분을 간청했고 이에 대통령은 진상 파악 후 관련자들의 자유로운 사회활동 보장을 약속했다고 한다.33) 그러나 일주일 뒤 박정희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과 이용택 수사과장에게 "지식인이라는 사람이 북과 접촉 후 학원까지 침투했다니 문제가 있다. 확실히 조사하여 뿌리를 없애라"라고 엄벌을 지시하였다.34)

박정희는 왜 입장을 바꾸었을까? 혹시 6.8부정선거 후를 대비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중앙정보부가 외교적 마찰을 일으키면서까지 해외 관련자들을 사실상 강제귀국시키는 무리수를 뒀던 것은 아닐까?35) 부정선거로 인해 저항 여론이 확산하던 시기 자행된 중앙정보부의 7차례에 걸친 이례적 발표와 대통령의 다소 갑작스러운 '엄벌 지시'는 동백림 사건이 정부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동백림 사건이 6.8부정선거에 대한 저항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기획‧조작되었다는 의혹을 가장 강하게 뒷받침해주는 것은 동백림 사건에서 파생된 민비연 사건이다. 중앙정보부는 동백림 사건 2차 발표를 통해 서울대 문리대의 학생서클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연)의 관련 혐의 사실을 공개했다. 즉, 민비연의 지도교수인 황성모 교수가 서독 유학 시 동베를린을 방문하여 간첩으로 활약했고,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 학생들을 모아 민비연을 발족시켜 북한이 지령하는 공작사명을 수행했다는 것이다.36)

그러나 민비연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무리하게 기획‧조작한 실체가 없는 사건이었다. 애초 동백림 사건의 일부로 발표되었던 민비연 사건은 동백림 사건처럼 간첩죄가 적용되지 않았고 '반국가단체'구성혐의가 중심이 되었다. 이처럼 민비연 사건은 동백림 사건과 별개로 다루어졌으며 재판 판결을 통해 반국가단체 구성혐의마저 인정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당시 중앙정보부는 민비연에 계속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37) 중앙정보부는 왜 민비연 사건과 동백림 사건을 무리하게 연결하려 한 것일까?

당시 중앙정보부가 민비연 사건과 동백림 사건을 억지로 연결하려 했던 결정적 이유는 이른바 "북한 → 지식인 → 학생(운동)"38)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연결고리를 만들어 반정부적 성격을 띠는 학생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기 위함이었다.

사실 민비연은 한일협정 반대투쟁이 들끓던 시기 일부 민비연 관련 학생들이 투쟁을 주동했다는 혐의로 이미 두 차례에 걸쳐 재판을 받은 전력이 있었다. 결국, '역대 최대 규모의 간첩사건'인 동백림 사건을 민비연 사건과 연결하는 것은 대학생들의 배후에 불온세력을 위치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는 학생시위를 '북한의 사주에 의한 불법난동'으로 규정하려는 박정희 정부의 의도를 여실히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39)

학생운동과 민주화운동을 "북한 → 지식인 → 학생"의 배후와 연결고리를 만들어 탄압하려 한 적은 동백림 사건 이전부터 있었으며,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 1969년 유럽 및 일본을 통한 대규모 간첩사건, 수차례 발표된 재일교포간첩단 사건 등은 모두 구체적인 내용이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북한 → 지식인 혹은 지식인 조직 (인혁당, 통혁당, 재일교포) → 학생"의 배후와 연결고리 도식을 따르고 있다.40) 박정희 정부가 이 도식과 구조를 온전하게 완성하기 위해 현상을 과장하고 조작하는 과정에서 폭력적인 고문과 낙인이 있었다. 수많은 이들이 신체적‧정신적으로 회복될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국가폭력에 대하여 : 개인은 세계에 앞선다
 
안수 리는 독일행을 포기했다. 한나를, 작곡가를, 그리고 수년 간 외지에서 함께 공부했던 동료들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용기가 아니라 용서의 차원이었는지도 모른다. 용서할 수 없었던 그 무력한 시절은 어느날엔 단 하나의 진실처럼, 또다른 날엔 악의적인 거짓말처럼 끊임없이 그에게 되돌아왔을 것이다. 그 과정은 회귀하는 동일성을 넘어 날마다 새로워졌을까. 그래서 그는 조금이나마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그를 건너다봤다. 내가 묻기도 전에 그가 말했다. 부끄러웠지. 견딜 수 없이 부끄러웠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이 날 견디게 해주더군요.
 
푸른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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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 伯의 숲>에서 희수는 갖은 노력 끝에 '안수 리'를 직접 만난다. 그녀는 안수 리의 입을 통해 동백림 사건의 진실에 대해, 국가폭력이 그에게 남긴 영구적 상처에 대해 듣는다. 안수 리는 몇십 년이 지난 끝에 자신의 입으로 뱉은 증언 말미에 "부끄러움"을 말한다. 국가폭력의 피해자인데도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안수 리를 "견디게 해주"던 "그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은 무엇을 의미할까.

국가폭력은 개인에게 운명을 덧씌우고 그것은 그의 삶을 결정하기 시작한다. 그 운명의 고통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어떤 이들은 "자신의 삶으로부터 자신을 추방하는 것"을 선택한다. "살아있는 죽음"을 택한 자, 자기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으로부터 추방된 자가 바로 고문 피해자, 국가폭력 희생자들이다. 국가로부터, 이웃과 동네 공동체로부터, 아들딸과 부인으로부터 추방당한 자들이다. 심지어는 자기 삶을 사회로부터 스스로 고립시키고 쫓아낸 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존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41)

간첩이 되었다는 치욕으로부터, 가족을 망쳤다는 죄악감으로부터, 아들딸의 장래를 망쳐버린 죄책감으로부터, 고문에 굴복해 허위로 진술한 수치심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비상구는 자신을 공동체로부터 감금하는 것이다.42) 안수 리가 고문에서 풀려난 후 독일로 돌아가지 않은 채 "그 시간을 외면하면서 살아남은, 아니 죽어갔던" 것처럼,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으로 견뎠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역사가 보여주듯 국가폭력은 많은 사람의 헌신과 분투 속에서 극복되어왔다. 그것은 국가와 권력은 자신을 정당화하며 폭력을 행사하지만, 본질적으로 "개인은 세계에 앞서"기 때문이다. 세계가 행사하는 폭력을 목격한 개인은 결코 침묵하는 목격자로만 남지 않을 것이다.

목격한 국가폭력에 대하여 그것은 명백한 폭력이고 가해였다고, '국가'의 이름으로 개인의 파멸을 정당화할 순 없다고, 세계는 개인의 운명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다고, 그러니 책임을 지라고 끊임없이 말할 것이다. 결코 잊지 않고 또 잊히지 않도록 몇 번이고 소리칠 것이다. <동쪽 伯의 숲>에서 발터가 말했듯, "개인은 세계에 앞서고, 세계는 우리의 상상을 억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각주]
1)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비밀리에 행하여지는 교육. 특히 북한에서 대남간첩 양성에 사용되는 교육방법으로, 세뇌공작(洗腦工作)을 겸한다. 첩자 등 특수 목적을 수행할 사람을 양성하기 위하여 일정한 기간, 일정한 곳에 수용하여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하고, 비밀로 교육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밀봉교육 [密封敎育] (두산백과)
2) 오제연, 「동백림 사건의 쟁점과 역사적 위치」, 『역사비평』, 역사비평사, 2017.05. 116쪽.
3) 오제연, 위의 글, 117쪽.
4) 오제연, 위의 글, 117쪽.
5) 임유경, 「냉전의 지형학과 동백림 사건의 문화정치」, 『역사문제연구』32권, 역사문제연구소, 2014.10. 148쪽.
6) 임유경, 위의 글, 148쪽.
7) 오제연, 위의 글, 121쪽.
8) 오제연, 위의 글, 121쪽.
9) 오제연, 위의 글, 121쪽.
10) 이정민, 「언론보도를 통해 본 남한과 서독의 동백림 사건 인식」, 『사림(성대사림)』69권, 수선사학회, 2019.07. 280쪽.
11) 이정민, 위의 글, 281쪽.
12) 이정민, 위의 글, 281쪽.
13) 오제연, 위의 글, 121쪽.
14) 오제연, 위의 글, 125쪽.
15) 오제연, 위의 글, 126쪽.
16) 오제연, 위의 글, 126쪽.
17) 오제연, 위의 글, 126쪽.
18) 오제연, 위의 글, 121쪽.
19) 오제연, 위의 글, 127쪽.
20) 오제연, 위의 글, 127쪽.
21) 오제연, 위의 글, 128쪽.
22) 오제연, 위의 글, 129쪽.
23) 임유경, 위의 글, 153-154쪽.
24) 임유경, 위의 글, 154쪽.
25) 이유재, 박주연, 「초국가적 관점에서 본 독일 한인 디아스포라」, 『역사비평』, 역사비평사, 2015.02. 331쪽.
26) 임유경, 위의 글, 155쪽.
27) 임유경, 위의 글, 156쪽.
28) 임유경, 위의 글, 153쪽.
29) 한편, 이 해 여름 한일국교정상화 추진이 대대적인 반대에 부딪쳐 답보상태에 빠지게 되자 박정희 정권은 계엄을 선포하는 일방, 각종 공식담화를 통해 사회적 정상성의 붕괴를 획책하는 불온분자에 관한 담론을 생산한다. 이 담론들은 한일협정반대투쟁의 문제성을 '불온분자'에 의한 "선량한 국민감정"의 오염에서 찾았다. 임유경, 위의 글, 166쪽.
30) 임유경, 위의 글, 162쪽.
31) 오제연, 위의 글, 135-136쪽.
32) 오제연, 위의 글, 135쪽.
33) 오제연, 위의 글, 137쪽.
34) 오제연, 위의 글, 137쪽.
35) 오제연, 위의 글, 137쪽.
36) 오제연, 위의 글, 138쪽.
37) 오제연, 위의 글, 139-140쪽.
38) 오제연, 위의 글, 142쪽.
39) 임유경, 위의 글, 173쪽.
40) 오제연, 위의 글, 143-151쪽.
41) 한성훈, 「중대한 인권침해와 국가폭력 – 고문조작간첩 피해자의 사회적 고통」, 『한국사회학회 사회학대회 논문집』, 한국사회학회, 2013.12. 581-582쪽.
42) 한성훈, 위의 글, 581쪽.

* 인용단락의 구절은 모두 소설 「동쪽 伯의 숲」을 직접 인용한 것입니다.

[참고문헌]
1. 조해진, 『빛의 호위』, 창비, 2017.02.
2. 오제연, 「동백림 사건의 쟁점과 역사적 위치」, 『역사비평』, 역사비평사, 2017.05.
3. 임유경, 「냉전의 지형학과 동백림 사건의 문화정치」, 『역사문제연구』32권, 역사문제연구소, 2014.10.
4. 이유재, 박주연, 「초국가적 관점에서 본 독일 한인 디아스포라」, 『역사비평』, 역사비평사, 2015.02.
5. 이정민, 「언론보도를 통해 본 남한과 서독의 동백림 사건 인식」, 『사림(성대사림)』69권, 수선사학회, 20179.07.
6. 한성훈, 「중대한 인권침해와 국가폭력 – 고문조작간첩 피해자의 사회적 고통」, 『한국사회학회 사회학대회 논문집』, 한국사회학회, 2013.12.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노수빈씨는 지속가능바람 저널리스트입니다. 이 기사는 지속가능바람(www.baram.news)에도 실립니다.


태그:#동백림사건, #간첩사건, #박정희, #조해진, #빛의 호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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