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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은 북한강과 남한강이 두물머리(양수리)에서 합수(合水)하여 팔당댐을 지나 서울을 관통하고 서해로 흘러나간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한강의 물길을 이용하여 한양으로 운송하는 조운업(漕運業)이 성행하였다.

현재의 팔당댐은 하남시의 검단산 끝자락과 남양주시 조안면의 예빈산 사이의 협곡에 1966년에 착공하여 1973년에 완공되었다. 이 댐이 착공되기 전까지 팔당을 통하는 한강에는 황포돛배가 물류의 운송과 여객선으로 운행되었다. 근대적 문명의 출현으로 전근대적 운송수단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팔당댐이 건설된 하남시 검단산의 끝자락이 배알미동이다. 일설에는 '배알미'라는 지명이, '조선시대에 관리가 한양을 떠날 때 임금에게 배알하던 끝이라' 해서 '拜謁尾(배알미)'라고 했다지만 한자의 뜻으로 억지로 맞춘 것 같다. 조선시대에는 현재 양평군 소재 양근(楊根)까지가 광주목(廣州牧)의 관할이었기 때문이다.

배알미는 예나 지금이나 농사를 지을 만한 땅이 많지 않다. 그래서 팔당 강을 생업으로 삼아 살아가는 집이 많았다. 또, 조운업이 성행하였으니 당연히 배를 만들어 호구지책(糊口之策)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 중의 한 분이 현재도 하남에서 생활하시며 망백(望百)의 노후를 보내시고 계신다. 그가 바로 손낙기 옹이시다. 하남문화원에서 발간한 <한강 황포돛배 명장 손낙기>에 따르면, 그는 1930년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배알미리에서 태어났다.

때는 일본제국주의의 강점기로 일제가 자신들의 야욕을 불태우며 식민지 조선의 민족문화를 말살시키려 조선어 사용금지와 창씨개명을 실시하던 때이다. 그래서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식민지 모국어인 일본어로 공부를 했으며 그의 졸업장에는 일본식 이름인 '시게야마(茂山)' '낙기(樂基)'라고 또렷이 적혀 있다.

이 시기에 식민지 모국어로 교육을 받으며 철저히 황국신민으로 길러진 소년은 영문도 모른 채 부평의 병기창에 끌려가 병기를 제조하는 일에 부역을 하였다. 그리고 해방을 맞았지만 가난한 집안의 형편은 해방된 조국에서도 더 나아질 수 없었다. 그래서 배고픔을 모면하기 위해 군에 자원 입대하게 되었고 얼마 있다가 동족상잔의 비극이 벌어지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폐허의 땅에는 천형처럼 가난의 허기를 달래줄 일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황포돛배 건조를 거들며 배워온 기술이 생활의 터전을 일구는 삶의 현장이 되었다.

그의 고향은 지금은 하남시로 승격되고 신도시개발로 세상의 이목이 주목을 받지만 배알미리(동)는 여전히 검단산 자락 끝에 자리한 하남시의 외진 마을이다. 이곳에서 어린 시절부터 자라나서 북한강과 남한강의 물길이 생활이 되고 삶의 터전이 되었다. 그래서 한강의 물줄기를 따라 젊은 시절부터 잔뼈가 굵어 한강 바닥의 돌멩이 생김새까지도 알 수 있다고 할 정도라고 한다.

그가 건조한 황포돛배는 천 여 척이 넘는다. 지금 전국의 강에서 운행되는 모든 황포돛배는 그의 손에 의해 건조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건조한 황포돛배는 1988년 서울올림픽 성공을 기원하는 기념 운항을 했으며, 세계를 놀라게 했던 2002년 월드컵 때는 기념 진수식을 갖기도 했다. 그는 또한 배를 모는 뱃사공으로서도 출중한 실력을 갖추고 있어 TV드라마의 역사극에 출현하기도 했다. 배를 건조하는 장인이니 당연히 배를 부릴 줄도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황포돛배의 건조 장인일 뿐만 아니라 강에서의 고기잡이 방법 중 하나인 견지낚시의 달인이며 견지낚시 제조의 장인(匠人)이기도 하다. 지금은 기계에 의한 대량생산으로 밀려 전통 방식의 견지낚싯대가 사라졌지만 과거에는 대나무나 싸릿대를 이용하여 낚싯대를 만들었다.

이런 전통방식의 낚시 제조 기술을 보유하였지만 기계문명의 값싼 대량생산으로 그의 기술은 시대에 뒤떨어진 개인이 갖고 있는 쓸모없는 기술이 되고 말았다. 예전에는 강물이 어는 겨울에는 얼음을 깨고 얼음낚시를 하던 풍경은 아련한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이제는 강물이 어는 것만으로도 경이로움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의 호가 수룡(水龍)이다. 젊어서 그의 숙부께서 '물의 용이 되라'고 그렇게 지어주었다고 한다. 이제는 물에서 뭍으로 나온 용이 되었지만 그의 일생은 한강과 함께 황포돛배의 건조를 하며 살아왔다.

그는 한강 물길의 산 증인이며 최고의 황포돛배 장인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아무런 명패(名牌)가 없는 것이 안타깝다. 내가 이러한 글을 쓰는 이유다. '무예(無譽:명예 없음)가 지예(至譽:최고 명예)'라는 장자(莊子)의 말이 있지만, 명장(名匠)에 대한 예우의 현실적 조건이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이번 기회에 황포돛배 건조 장인으로 등록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모색해 보아야 할 것이다. 세월이 많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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