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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가 위세를 떨치기 시작한 뒤로 일상이라는 것은 영 자취를 감췄다. 발 디딜 틈 없던 출근길 버스도, 오후 즈음이면 모두의 체온으로 덥혀졌던 사무실 공기같은 것도 먼 옛날의 기억 같다. 이리 된 것도 어느새 반년이 되어가다니. 새로 자리잡은 지금의 모습을 일상이라 불러주는 것이 마땅한 일일지 모르겠으나 영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 

내가 살고 있는 스페인은 코로나19로 인한 봉쇄 조치가 전세계에서 가장 강한 수준이었다. 산책도 할 수 없이 오롯이 집에 갇혀 발코니에서 올려다 본 하늘을 위로 삼으며 한 달 이상을 보냈다. 점차 상황이 나아지면서, 최근에는 조금씩 봉쇄가 풀리는 중이다. 이제 마스크를 하고 거리 지키기만 하면, 언제든 산책할 수 있고, 많이 모이지만 않으면 지인들도 만날 수 있다. 

여름으로 들어서는 이맘때 바르셀로나는 날씨도 자연도 한창 아름다울 때다. 마침 봉쇄도 풀리고 있으니 가끔 밖으로 나가기도 한다. 기껏해야 공원 한켠에 앉아 꽃과 풀을 보는 것이지만, 이것으로 위로를 얻을 수 있는 지금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마음 한켠에는 여전히 예전같지 않은 하루하루에 대한 답답함이 있다.

나는 여전히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면서 집안일과 재택근무 사이에서 곡예를 하고 있고, 밖에 나갈 때면 매번 신경이 곤두선다. 물론 나 혼자 겪는 일은 아니다. 아직 누구에게도 익숙하지 않을 뿐, 다들 겪고 있는 일이다. 이미 '뉴노멀'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새로운 일상이다.

갑작스러운 변화 속에서 삶의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 보면, 내 삶에 골몰한 나머지 세상의 일들은 쉬이 잊기 마련이다. 그걸 깨닫고 물끄러미 주변을 돌아보고 이웃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뉴스와 SNS의 이야기에 눈이 가 닿게 될 때다. 
 
가정폭력 알리기 캐나다여성재단(Canadian Women's Foundation)에서 캠페인 중인, '가정폭력'을 알리는 손동작
▲ 가정폭력 알리기 캐나다여성재단(Canadian Women"s Foundation)에서 캠페인 중인, "가정폭력"을 알리는 손동작
ⓒ 캐나다여성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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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쇄가 시작된 이후, 코로나19로 위기에 처한 이웃들의 이야기가 종종 기사화 되곤 했다. 최근 한국에서 큰 이슈가 되고 있기도 하지만, 학대받는 아이들이 늘고 있다는 이야기가 이곳 스페인에서도 있었고, 제 3세계의 아이들이 전보다 인신매매에 더 많이 노출되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코로나19로 스트레스가 높아지고, 고립이 쉬워지고, 사각지대가 여기저기 늘어나면서, 전염병이 아닌 다른 위기에 노출되는 이웃들도 함께 늘고 있었던 것이다. 봉쇄 기간 동안 가정폭력에 노출되는 여성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기사들도 자주 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스페인에서 가정폭력 문제는 사회적으로 자주 다뤄지는 사안이다. 코로나19 이전에도 여성의 날 행사나 여성 운동 캠페인에서 가정폭력 문제는 늘 등장하곤 했다. 가정폭력을 다룬 영화나 다큐멘터리들도 있고, 산부인과를 방문하면 다양한 정보 책자들이 놓여 있는 사이에서 가정폭력과 관련한 안내문도 함께 비치되어 있었다.

일년쯤 전에 바르셀로나 미술관을 방문했을 때 마침 여성 문제에 관련한 전시가 있었다. 전시관 한쪽에서는 가정폭력을 당했던 여성들이 스스로 겪은 일을 이야기 하는 영상물이 반복해서 재생되고 있었다. 당시의 심정이나 상태, 왜 적극적으로 빠져나오기 힘들었는지, 가정폭력 없이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는 지 등을 말하고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형태로 가정폭력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하고, 상담 받을 수 있는 창구를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가정폭력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흔히 일어나고 있는 문제라는 사실과 그에 비해 적극적으로 도움을 청하기 쉽지 않은 구조라는 것, 또 사회가 그 문제를 대하는 심각성이 아직도 충분하지 못하다는 문제 인식이 모두가 반영되어 있다고 본다.

폭력에 노출된 여성들은 경제적 이유나 심리적 조건 등으로 적극적으로 도움을 청하기 어려운 경우들이 많다. 또 도움을 받고 싶어도 가해자가 제지하고 감시하기 때문에 불가능한 경우가 많단다. 이를 테면, 기록이 남는 이메일이나 문자로는 도움을 청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그들이 쉽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방법들을 고안하고 적극적으로 이를 알려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 중 하나가 피해자들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간단한 손동작만으로 자신의 상황을 외부에 알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전에 손바닥에 점을 찍어 보여주는 것으로 위험을 알리도록 장려하는 캠페인이 있었는데, 그와 비슷한 취지이다.

최근 SNS를 통해 언어와 상관없이 전세계로 공유되고 있는 있는 이 손동작은, 상대에게 오른 손바닥을 보인 뒤, 먼저 엄지손가락을 접고, 이어 나머지 손가락을 접어 주먹 모양이 되게 하는 것이다.

가정폭력에 노출된 여성들이 도움을 요청할 때 이 간단한 동작을 사용할 수 있다. 예시로 공유되고 있는 영상에서는, 지인과 영상 통화를 하고 있는 여성이 미소를 띠고 바나나 빵 레시피를 알려줄 수 있는지 물어보면서, 동시에 손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시그널을 보낸다.
 

이 여성의 뒤로는 왔다갔다 하는 남자의 모습이 얼핏 보인다. 여성이 보내는 시그널을 인지한 지인은, 차분하게 바나나 빵 레시피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캐나다여성재단에서 만들어 보급하고 있는 이 영상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시그널을 인지하고 가해자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하면서 돕도록 장려하는 영상물이다. 캐나다 여성 재단은 '고립은 가정 폭력의 위험을 증가시킬 수 있다'며 '이러한 경우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화상 통화에 이 신호를 사용'할 것을 권하고 있다.

이 외에도, 가정폭력 피해자들을 돕기 위한 캠페인들은 피해자가 아닌, 주변 사람들로서 이웃들이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 홍보하기도 한다. 주기적으로 상처가 생긴다거나, 잘 알 수 없는 이유로 외부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이웃들에게 관심을 가져달라고 당부한다.

이웃으로서 얼마만큼의 관심까지가 지나친 오지랖이 아닌 '관심'이고 '도움'일 수 있을지 생각해 보게 하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분명 한 번쯤 고민해보고 도움이 필요할 지도 모를 주변의 이웃들을 떠올려 보게 만드는 일이다.

가정폭력에 노출되는 대다수의 피해자가 여성이라는 점에서 '여성'에 방점을 두고 이야기 했지만, 물론 남성도 이 같은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도움이 필요한 남성 피해자들도 이 같은 시그널을 알고 사용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알려야 할 것이다.

어쩌면, 배우자에 의한 폭력에 특정할 것이 아니라, 즉각 위험을 알리고 구조되어야 할 모든 피해자들이 사용하면 좋을 손동작일 수도 있겠다. 모든 사람은 폭력으로부터 안전할 권리가 있으므로.

태그:#가정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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