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가정의 달인 5월, 혈연관계를 넘어 새로운 가족을 꾸린 이들에게 '함께 산다는 것'의 의미를 들어봅니다.[편집자말]
나는 4인 가구에 산다.

'정상가족'(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핵가족)에 꼭 맞는 흡족한 인원일 수 있겠다. 그런데 우리 집에는 부부도 없고, 자녀도 없으며, 호적상으로 얽힌 관계가 전혀 없다. 각기 다른 환경에서 자란 '비남성' 네 명이 한 지붕 아래에 산다. 한국 사회에서 '가족'의 정의는 여전히 혈연관계 또는 결혼으로 맺어진 부부 정도에 머물러 있지만, 나는 나의 동거인들을 자신있게 가족이라고 소개하곤 한다. 

가족들을 주변에 소개할 때마다 '집사람'이라고 부르는데, 여전히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남편'이 '아내'를 부르는 용어를 전복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나의 집사람들은 밖에서 자신을 마음껏 펼치다 집에 돌아와서는 서로가 나다움을 유지할 수 있도록 정성스럽게 대한다.

나다움을 잃지 않고 쉼을 보장받는 공간, 그것이 집과 가족의 역할이 아닐까? 제도는 우리의 가족 형태를 인정하지 않을지 몰라도, 우리는 집사람으로서 그리고 가족 구성원으로서 각자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며 살고 있다. 

혈연가족이 아닌 선택가족
     
 집 앞 마당. 봄이 되면 동네에서 모종을 사다가 텃밭을 꾸린다. 주말 아침에는 상추나 토마토 같은 것들을 따다가 함께 아침상을 차린다. 마당 한 켠에는 빨래가 잘 마르고 있다.
 집 앞 마당. 봄이 되면 동네에서 모종을 사다가 텃밭을 꾸린다. 주말 아침에는 상추나 토마토 같은 것들을 따다가 함께 아침상을 차린다. 마당 한 켠에는 빨래가 잘 마르고 있다.
ⓒ 김소라

관련사진보기

 
지금의 가족을 꾸리게 된 것은 정서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안전한 집에서 살고 싶다는 바람에서 시작됐다. 혈연가족이 나의 세계를 더 이상 침범하지 않도록, 부모와 거리를 두며 삶을 직접 지어갈 필요성을 느낄 때였다.

스물 두 살, 대학생인 내가 독립을 가정해 보았을 때 내 앞의 선택지는 너무나 열악했다. '지옥고'(지하, 옥탑방, 고시원)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교통비와 이동시간을 알뜰하게 사용하기 위해 (서울) 사대문 근처에 살고자 하면 매달 월세로 40만 원 이상 지출은 기본이었다. 덥고 춥고 외로운데 누울 자리에서 숨만 쉬어도 수입의 1/3가량을 쓸 생각을 하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러던 중 '빈집'이라는 실험적 공유공동체를 만났고, 공동주거에서 대안을 찾았다. 현재는 서울 용산구에서 널찍한 거실과 부엌에 마당까지 딸려 있는 집을 집사람들과 공유하며 살고 있다. 신촌 옥탑방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말이다.

이 집은 아마도 '정상가족'을 위해 설계된 모양이다. 방의 크기가 불평등하다. 세 개짜리 방은 각각 부모가 쓰는 '안방', 큰 아이가 쓰는 방, 작은 아이가 쓰거나 서재로 쓰는 방 정도로 계획한 것으로 보인다. 집의 구획이 좀더 평등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우리는 방의 크기에 따라 월세를 차등적으로 분담하면서 나름대로 합리적이고 평등한 관계를 구축했다. 

처음에는 공간 공유 정도로 시작한 셰어하우스였다. 조건이 맞아 입주한 사람들이 여럿 거쳐갔다. 지금은 애정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사람들이 남아 가족의 관계를 맺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 관계의 토대에는 어느 정도의 불안정성이 있다. 서로를 가족으로 여기고 있지만, 우리들끼리 가족이라고 호명하는 것은 때로 애칭 정도에 그친다. 사회적으로 인정하는 가족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 가족을 뒷받침해 줄 만한 제도적인 지원은 없다. 

우리는 빌려쓰는 월셋집에 살고 있다. 즉, 계약갱신일이라는 것이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서로의 향후 계획을 확인해야만 한다. '이 집이 유지될 수만 있다면 당신들과 함께 살고 싶다'는 마음을 틈틈이 공유하고 있지만, 언제든 헤어질 수 있다는 전제가 유쾌하지는 않다.

만약 생활동반자법이 있다면
 
혼인관계가 아닌 가족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 두 권 김하나, 황선우 작가의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2019), 황두영 작가의 <외롭지 않을 권리>(2020)
▲ 혼인관계가 아닌 가족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 두 권 김하나, 황선우 작가의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2019), 황두영 작가의 <외롭지 않을 권리>(2020)
ⓒ 김소라

관련사진보기

 
우리가 좀 더 촘촘하게 의지하고 책임질 수 있는 관계였다면 어땠을까? 때로 상상한다. 생활동반자법이 있다면 좀더 단단한 신뢰와 안정감을 기반으로 더 긴 호흡의 비전을 그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이전에 지내던 공동체에서 함께 살던 구성원의 장례를 치른 적이 있다. 친구의 죽음을 마주하며 견딜 수 없었던 것은 개인적인 상실뿐만이 아니라, 고인이 된 그의 의사가 충분히 반영되지 못한 채로 유품이 정리되는 것을 보는 일이었다.

생활동반자법이 있었다면, 어쩌면 혈연가족보다 그를 더 깊이 이해하고 있었을 선택가족들이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공식적인 장례를 치를 수 있었을 것이다(우리는 별도의 추모식을 열었다). 그리고 그 장례를 치르는 데에 있어 각자의 일터에서 공식적인 휴가를 받고 추모에 집중함으로써 서로의 존엄을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대다수의 국가에서 생활동반자법의 대상으로 거론되는 범위는 '혼인하지 않은' '두 명'의 '성인'이다. 반면 대만의 경우 시민사회 차원에서 가족 구성원 수에 제한이 없는 생활동반자법을 논의하고 있다.

대만반려자권익추진연맹(TAPCPR)이 준비하고 있는 이 법안은 가족을 일종의 협동조합처럼 여긴다. 여기에는 여러 과제가 남아 있다. 3인 이상의 비혈연가족을 법적으로 인정할 경우 과연 몇 명까지 인정할 수 있느냐는 단순한 질문부터, 한국의 주택임대계약이 평균 2년 단위임을 고려했을 때 '가족'의 해체와 결합을 단발적으로 그리고 유기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제도를 설계하는 것이 가능한지까지 의문이 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혈연 4인가구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서라도 이 혁명적인 가족제도를 경험해보고 싶다.

나는 혈연에 희생하고 싶지도 않고, 가족이라는 이름의 의무로 삶을 허비하고 싶지도 않다. 나를 비롯한 우리 세대가 전형적인 가족의 모델을 허물고 가정과 집의 역할을 재구성할 힘이 있다고 믿는다.

공간이 맺어주는 나의 동반자
 
 식탁의 꽃 너머로 보이는 냉장고 옆면. 우리 집 냉장고에는 집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의제 포스터, 그리고 함께 다녀온 여행지 티켓이나 전시회 기념품 같은 것들이 가득하다. 식탁에는 직접 사거나 선물받아온 꽃을 번갈아가면서 꽂아놓는다.
 식탁의 꽃 너머로 보이는 냉장고 옆면. 우리 집 냉장고에는 집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의제 포스터, 그리고 함께 다녀온 여행지 티켓이나 전시회 기념품 같은 것들이 가득하다. 식탁에는 직접 사거나 선물받아온 꽃을 번갈아가면서 꽂아놓는다.
ⓒ 김소라

관련사진보기


낭만과 환상의 셰어하우스를 장려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 공간을 충분히 누리며 혼자 사는 것이 적합한 사람도 있다. 우리 집과 같은 가족 형태가 아니더라도, 친구 혹은 연인 사이의 동거를 모두 포함하여 공동주거를 운영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김하나, 황선우 작가의 에세이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에서도 이야기하듯, "둘만 같이 살아도 단체 생활"이기 때문이다. 

공간을 공유하는 '하우스메이트' 사이에 '가족'이라는 감각이 생기기까지 짧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서로 다른 취향과 경제력을 조정하며 일상의 리듬을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대화를 나눴다. 집안일부터 공용물품 구매까지 자잘한 회의의 연속이다. 때로는 귀찮고 지칠 법도 하지만, 서로에게 경제적, 정서적 안전망이 되어주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무기력증에 힘겨워하는 집사람이 있으면 밥 한 숟갈 떠먹이고 슬리퍼를 신겨 동네 카페에 데려간다. 내가 삶에 지쳐서 훌쩍거릴 때, 집사람 한 명이 아끼는 에세이 한 권을 내민다. "오늘은 에너지가 없어요"라고 말하는 집사람에게 "나는 오늘 에너지가 있어요"라고 하며 설거지 한턱을 쏜다. 돌봄과 노동의 품앗이를 주고받는 것이다. 집사람들에게서 영양분을 얻고, 또 스스로 일어설 힘을 얻기도 한다. 

나의 삶에 있어 장기적인 숙제는 '늙어서 함께 살 친구들을 미리미리 찾아두는 것'이다. 집이라는 공간이 맺어주는 관계를 기대하고 신뢰한다. 그 관계는 노인이 되었을 때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인생의 동반자를 찾는 데에 있어서 성애적 관계, 특히 결혼에서 자유로워졌을 때 풍요로움을 느낀다. 가화만사성이라 하지 않던가. 서로를 결속하지 않고, 각자의 나다움을 지지하는 가족 만들기, 돌봄과 쉼의 공간으로써의 집 만들기에 앞으로도 열심을 다하고 싶다. 서로를 돌보기로 약속하는 것을 응원하고 엮어내는 것, 그것이 좋은 세상을 만드는 기반이라고 믿는다.
 
BIYN 보스턴피플팀의 #생활동반자법_2020년까지_제정하라 캠페인 스티커 생활동반자법의 국내 도입을 위해 활동하는 BIYN(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보스턴피플팀의 생활동반자법 캠페인 굿즈
▲ BIYN 보스턴피플팀의 #생활동반자법_2020년까지_제정하라 캠페인 스티커 생활동반자법의 국내 도입을 위해 활동하는 BIYN(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보스턴피플팀의 생활동반자법 캠페인 굿즈
ⓒ BIYN 보스턴피플팀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올해 3월에 출판된 황두영 작가의 책 <외롭지 않을 권리>의 도움을 많이 받은 기사입니다. 생활동반자법에 관해 더욱 자세히 알고 싶은 독자에게 추천하는 책입니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 혼자도 결혼도 아닌, 조립식 가족의 탄생

김하나.황선우 지음, 위즈덤하우스(2019)


외롭지 않을 권리 - 혼자도 결혼도 아닌 생활동반자

황두영 (지은이), 시사IN북(2020)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