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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중앙선 운길산역에 내리자 멀리 수종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한창 유행하는 코로나19 때문에 여행객들의 발길이 뚝 끊긴 기차역에서 모자와 마스크로 중무장하고 사진을 찍는 내 모습이 신기했던지 중년 여인 셋이 지나가다 말고 말을 건넨다.

"아저씨는 어느 구름이 맘에 드세요?" 질문이 너무 고상해서였을까? 시절이 시절인 만큼 혹시 요즘 화제가 되는 모 종교단체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못 들은 척 계속 카메라를 만지작거리고 있자 여인들은 깔깔거리며 1층 개찰구 쪽으로 사라져버린다.
 
운길산역에서 바라본 수종사 해발 610m의 운길산 중턱에 폭 안겨있다.
▲ 운길산역에서 바라본 수종사 해발 610m의 운길산 중턱에 폭 안겨있다.
ⓒ 이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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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파란 하늘 여기저기에 하얀 뭉게구름이 둥실둥실 떠 있다. 정말로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마음에서 던진 질문이었으련만, 문득 그 마음 하나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다음에는 기필코, "네, 저는 저기 가운데 물고기 모양의 구름이 마음에 드는데요. 아주머니는요?"라고 티 없이 맑은 목소리로 대답하리라.

운길산역을 빠져나와 진중 2리 마을 길로 접어들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고양이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온다. 겨우내 굶주림에 시달렸는지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정도로 야위었다. 등산객들이 늘어야 배고픔을 면할 수 있을 텐데, 난데없는 코로19의 여파가 외딴 산골의 길고양이에게까지 미친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카메라 가방 하나만 달랑 메고 온 터라 아무리 뒤져봐도 고양이에게 줄만 한 게 없다.

산에 올 때마다 다음에는 꼭 고양이 사료를 챙겨와야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제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을 질책하며 혹시 구멍가게라도 있나 하고 여기저기 둘러보지만, 가게는커녕 농산물을 파는 노점들도 모두 문을 닫았다. "냥이야, 미안하다. 부디 살아서 다시 만나자꾸나. 그래도 세상은 아직 살만한 곳이란다." 고양이의 애절한 눈빛을 외면하며 돌아서는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겁다.

마을을 벗어나자 곧 가파른 산길이다. 멀리서는 또렷하게 보이던 절이 가까운 곳에서는 오히려 잘 보이지 않는다.

橫看成嶺側成峯 옆으로 보면 고갯마루요 비스듬히 보면 봉우리
遠近高低各不同 멀고 가까움과 높고 낮음에 따라 각기 다르네
不識廬山眞面目 여산(廬山)의 진면목(眞面目)을 알기 어려우니
只緣身在此山中 이는 다만 내가 이 산속에 있기 때문이라네


소동파의 시 '서림사 벽에 쓰다(題西林壁)'라는 시 한 수를 떠올리며 길을 오르다 보니 가벼운 등산복 차림인데도 온몸이 땀으로 가득하다. 힘차게 배기가스를 뿜어대며 올라가는 자동차를 볼 때면 잠시 눈살이 찌푸려지다가도, 이내 곧, '뭔가 피치 못할 사정이 있겠지'라는 너그러운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면 나도 이제 웬만큼 나이가 들었나 보다.
 
산신각에서 본 수종사 경내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이 무료찻집 '삼정헌'이다.
▲ 산신각에서 본 수종사 경내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이 무료찻집 "삼정헌"이다.
ⓒ 이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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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종사에서 본 두물머리 남과 북의 물줄기가 이곳에서 하나가 된다.
▲ 수종사에서 본 두물머리 남과 북의 물줄기가 이곳에서 하나가 된다.
ⓒ 이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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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어느 외신이 보도한 '한국의 아름다운 사찰 100'에 수종사가 들어있는 것을 보고 잠시 의아했던 적이 있었다. 사실, 수종사는 그 신비한 창건설화와 함께 오래된 은행나무, 석탑, 부도 등 몇 가지 볼거리가 있기는 하지만, 건물들은 모두 6·25동란 이후의 것들로 그 규모나 조형미 등에 있어 특별하다고 할 것이 없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수종사를 찾는 이유는 아마도 그곳에서 보는 두물머리(양수리)의 아름다운 풍광 때문일 것이다.

옛사람의 말에 "아름다움은 스스로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탓에, 사람을 통해 그 아름다움이 드러난다(夫美不自美, 因人而彰)"라고 했는데, 이는 두물머리의 아름다움을 드러내 주는 수종사의 공덕에 적합한 말이 아닌가 한다.

'난정(蘭亭)'이 왕희지(王羲之)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맑은 여울과 긴 대나무가 한갓 빈 산의 잡초 속에 묻히고 말았을 것처럼, 두물머리 역시 수종사가 없었더라면 히말라야의 만년설을 보는 듯한 구름바다도, 만학천봉(萬壑千峰) 위로 떠오르는 아침 해도, 그리고 무엇보다 억년의 세월을 두고 변함없이 흐르는 남북의 두 물줄기도 그 신비로움을 잃고 말았을 것이다.
 
운길산 수종사 조선 중기 문신 임숙영(1576~1623)의 <유수종사기(遊水鍾寺記)>에, "일찍이 고려 태조가 군사를 이끌고 이곳 운길산 아래를 지나다가 멀리 산꼭대기에 서기(瑞氣)가 서린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수색하게 하니 우물 속에서 한 동종(銅鐘)이 나왔다. 이에 그 자리에 절을 세우고 이름을 수종사라고 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 운길산 수종사 조선 중기 문신 임숙영(1576~1623)의 <유수종사기(遊水鍾寺記)>에, "일찍이 고려 태조가 군사를 이끌고 이곳 운길산 아래를 지나다가 멀리 산꼭대기에 서기(瑞氣)가 서린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수색하게 하니 우물 속에서 한 동종(銅鐘)이 나왔다. 이에 그 자리에 절을 세우고 이름을 수종사라고 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 이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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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는 사이 몸은 어느덧 수종사 경내에 들어서 있다. 운길산역에서 수종사가 또렷이 보였던 것처럼 산신각 앞에 서자 두물머리의 아름다운 풍광과 그 너머로 펼쳐지는 수많은 봉우리와 골짜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예로부터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이곳 수종사에서는 물과 산을 동시에 볼 수 있으니 그간의 각박해진 마음과 어리석은 행동들을 돌아볼 수 있는 최고의 장소가 아닌가 한다.
 
삼정헌의 다기 일회용 차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레시피에 따라 차를 우려내어 마시는 일은 신선한 경험이다.
▲ 삼정헌의 다기 일회용 차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레시피에 따라 차를 우려내어 마시는 일은 신선한 경험이다.
ⓒ 이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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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종사에서 운영하는 무료찻집, 삼정헌(三鼎軒)에 들어서자 생각보다 손님이 많다. 주문받는 사람도 없고 계산대도 없어 어쩔 줄 모르고 서성거리자 주방에서 설거지 중이던 보살님이 친절하게 보온병 하나를 꺼내주면서 빈자리에 가서 앉으라고 한다.

두물머리의 멋진 풍광이 한눈에 들어오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자, 오후의 햇살이 발밑에 스멀거린다. 아, 얼마 만에 맛보는 평화인가? 탁자 위에는 여러 개의 다기(茶器)와 함께 <차 맛있게 마시는 방법>이라는 레시피가 구비되어 있다.

보온병의 뜨거운 물을 숙우(물 식힘 사발)에 따른다.
숙우의 물을 다관에 부어 다관을 덥힌다.
다관의 물을 찻잔에 붓고, 찻잔의 물은 차를 우리는 동안 퇴수기에 붓는다.
다시 보온병의 물을 숙우에 부어 식힌다(60℃~70℃).
다관에 차를 넣고 숙우의 식힌 물을 부은 다음 30초에서 1분 정도 차를 우린다.
우러난 차를 숙우에 따라서 잔에 나눈다.
바른 자세로 앉아 찻잔을 오른손으로 들고 왼손으로 받치고 빛깔, 향기, 맛을 느끼며 두세 번에 나누어 마시는데 입안에 머금어 굴리듯이 하며 음미한다.


아, 그러나 숙우니 다관이니 하는 생소한 용어 때문인지 나에게는 레시피가 학창시절 어려운 수학시험 문제를 받았을 때처럼 난감하게만 느껴진다. 보다 못한 보살님이 와서 차를 마실 수 있도록 도와주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찻잔을 왼손으로 들고 빛깔, 향기, 맛을 느끼기는 고사하고 마치 막걸리를 마시듯 차를 단숨에 들이키고 말았다. 산에 올라오느라 목이 말랐던 모양이다.
 
 보물 2013호 <남양주 수종사 사리탑>(좌), 3층석탑(중), 보물 1808호 <남양주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우),
 보물 2013호 <남양주 수종사 사리탑>(좌), 3층석탑(중), 보물 1808호 <남양주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우),
ⓒ 이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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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니 지난봄에도 이곳 수종사에 왔었다. 그때는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시와 소암 임숙영(1576~1623)의 기문(記文)을 읽으며 수종사의 옛 모습을 더듬어보려고 애썼지만, 이번에는 다산도 버리고 소암도 버린 채 오롯이 나 자신만을 위한 여행이다.

다시 차 한 잔을 따르자 찻잔 속에 문득 낯선 사내의 얼굴 하나가 떠오른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결코 가까이하지 못했던 참으로 먼 사람의 얼굴이다. 그가 나에게 묻는다.

"너는 누구냐? 왜 지금에서야 이곳에 왔는가?"

멀리 두물머리의 아득한 물줄기가 저녁 햇살에 반짝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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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콩나물신문협동조합 이사. 지은 책으로는 고전번역서 <그리운 청산도>, 북한산 인문기행집 <3인의 선비 청담동을 유람하다>, 관악산 인문기행집 <느티나무와 미륵불>, 시집 <이별이 길면 그리움도 깊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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