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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그러나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결혼이주여성에 대한 한국사회의 인식만 놓고 보면 크게 변한 게 없다. 오히려 어떤 부분에선 퇴행하는 실정이다.
 메이가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사진은 내용과 상관없음)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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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했는데 진짜 갔다. 메이가 설 앞두고 영구 귀국 문제로 고민 중이라며 전화했을 때 설마했다. 근 십여 년 만에 통화라 안부전화려니 했다. 그런 그가 한국을 떠났다. 큰애가 이번에 중학교를 졸업했으니까 최소 16년을 살았던 땅을 훌훌 떠난 이유는 간단했다.

"맨날 맨날 일하고 바빠요. 애가 셋이에요. 한국은 돈 없어요, 너무 너무 힘들어요."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하면 메이의 귀국은 뜻밖이었다. 16년 전 항공권과 한 달 급여에 얼마를 더한 돈을 손에 쥐고 한국 떠나기 싫다며 공항에서 엉엉 소리 내어 울던 그였다. 메이는 결혼하고 한국에 오자마자 남편 친구가 운영하는 봉제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딱 한 달을 일하고 월급을 받은 다음날 남편은 메이를 공항으로 데리고 갔다. 

남편은 항공권과 급여에 얼마를 보태주고는 메이에게 '베트남으로 가라'고 했다. 출국장 안으로 억지로 등 떠미는 남편에게 가지 않겠다며 실랑이를 벌이다 엉엉 울기 시작했다. 메이가 울기 시작하자 남편은 집으로 오지 말라며 혼자 공항을 떠났다. 

남편이 떠나고도 메이는 차가운 시멘트 벽면에 등을 대고 바닥에 앉아 훌쩍거리다 소리 내어 울기를 반복했다. 마침 그 장면을 본 사람이 베트남어가 유창한 이주노동자쉼터 상담실장이었다. 

메이는 남편을 다시 만나야 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말했다. 결혼하고 한국에 왔으니 한국에 정착하겠다고 했다. 메이를 뜻대로 돌려보내지 못한 남편은 구두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한다는 그는 풀 죽은 목소리로 하소연했다.

"이혼하고 혼자 산 지 몇 해 됐는데, 친구 소개로 결혼했어요. 봉제공장하는 친군데, 그 친구가 국제결혼을 했어. 나름대로 잘 사는 것처럼 보였고 그 친구가 권했어요. 막상 결혼하고 보니까 나이 차가 많고 말도 통하지 않는데, 젊은 사람을 데려다 놓고 고생만 시킬 것 같아 애 생기기 전에 정리하려고 했어요. 그래서 공항에 데려다 준 거지. 정 베트남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면 굳이 고집하지 않겠어요. 같이 살아 봐야죠."

우여곡절 끝에 남편으로부터 성실하게 결혼 생활하겠다는 각서를 받고 한국에 정착한 메이는 그 해에 첫 애를 낳았다. 한 명만 낳는다던 아이는 그 후로 둘이 더 늘었다. 한 명도 버거울 텐데, 셋이나 낳다니 대단하다 싶었는데 힘에 부쳤던 모양이다.

쉽지 않았던 시간

"남편 일 없어요. 술 많이 먹어요. 일주일에 하루(만) 안 먹어요."

구두를 신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면서 구두 가게가 예전 같지 않고, 일감이 줄어들자 남편은 술로 세월을 보내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아이들은 커 가는데, 소득은 늘지 않자 메이는 귀국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형제들 가운데 맏이인 메이는 귀국하면 지금보다는 생활이 나아질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동안 친정엄마와 동생들이 한국을 오가며 제법 돈을 벌었고, 고향에 땅도 사고 집도 새로 지었다. 

문제는 아이들이었다. 고등학생이 되는 큰 애는 아빠와 한국에 산다고 해도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둘째와 돌이 지나지 않은 막내를 생각하면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기 때부터 친정 엄마와 여동생의 돌봄을 받은 둘째는 베트남어를 제법 한다. 그렇다고 해도 베트남에 가지 않겠다는 애들 아빠와 헤어지는 문제도 있고, 아이들 장래를 생각하면 어떤 게 좋은 선택인지 선뜻 결정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고민이 하도 진지해서 생활이 여간 힘든 게 아니구나 하고만 있었는데, 메이는 설을 앞두고 둘째와 막내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사진 속에서 막내를 안고 있는 친정어머니와 함께 있는 그는 여유롭고 행복해 보였다. 아이들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있었고, 그는 아오자이를 입고 있었다. 돌아가지 않겠다던 땅에서 더 행복해 보이는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쉽지 않은 세월을 잘 견뎌냈던 메이가 영구 귀국했는지는 둘째가 초등학교 입학하는 3월까지는 확실치 않다. 말은 그렇게 해도 한 달 정도 심신을 추스르고 재입국할 수도 있고, 영구 귀국을 몇 해 정도 뒤로 미룰 수도 있을 것이다.

16년을 한국에서 독하게 마음먹고 살았던 메이가 귀국을 생각하고 한 받을 내딛기까지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알 도리가 없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그는 한국보다 베트남에서 더 행복하다는 것이다. 어쩌면 귀향을 꿈꾸는 모든 이들이 그와 같지 않을까 싶다. 우리 모두 나그네와 행인 같은 삶을 살며 귀향을 꿈꾸며 살고 있는데, 선주민이라고, 이주민이라고 선을 긋는 자체가 부질없는 일 아닌가. 

덧붙이는 글 | 브런치에도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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