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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개전 78주년...'대동아 전쟁' 신화의 청산은 가능한가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 전쟁, 기존의 제국주의 열강을 축출하며 성전으로 둔갑
19.12.14 14:45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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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17일, 일본의 아소 다로(麻生 太郎) 부총리가 도쿄 총리관저에서 열린 자위대 관계자들과의 간담회에서 아시아ㆍ태평양 전쟁을 '대동아 전쟁'이라고 부르면서 논란이 되었다. 침략전쟁의 과오를 사죄한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한다는 입장을 일본정부가 표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각 주요인사의 입에서 '대동아 전쟁'이라는 표현이 나온 것은 부적절했다는 지적이 줄을 이었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전쟁을 개시한지 78년째를 맞는 일본에서는 이 전쟁을 바라보는 시선이 여전히 복잡하다.


'성전(聖戰)'의 신화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나


1941년 12월 10일, 최신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를 필두로 구성된 영국해군 Z기동함대가 일본해군의 공습으로 말레이 바다에 수장되었다. 일본은 <영국동양함대 궤멸>이라는 군가까지 제작해 베포하며 말레이 해전의 승전보를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태평양 전쟁이 '서구 열강을 축출하고 아시아를 해방시키기 위한 성전'이라는 프로파간다는 이미 개전 초부터 공고한 것이었다. 말레이 해전 당일, 일본 대본영에서는 이 전쟁을 "대동아 전쟁"으로 부르기로 결정했다. 이틀 뒤인 12일에는 전쟁 목적이 '대동아 신질서 건설'에 있다는 주장을 공식화했다.


일본이 서구 열강과의 전쟁을 시작한 배경에는, 미국, 영국, 중국, 네덜란드가 일본을 포위하여 고사시키려한다는 ABCD포위망(A: America/미국, B: Britain/영국, China/중국, Dutch/네덜란드) 위협론이 있었다. 즉, 동남아시아에 이권을 보유하고 있는 열강들이 중국을 지원하고 있기 때문에, 이 지역들을 점령함으로써 서구열강의 대중국원조 루트를 차단하고 나아가 동남아의 천연자원들을 확보, 궁극적으로는 중일전쟁에서 승리하자는 발상이었다. 중일전쟁이 본격화되고 미국의 금수조치가 내려지면서 더 이상의 전쟁수행이 어려울 정도로 심각한 물자부족에 빠진 일본에게 선택지는 중일전쟁의 포기 혹은 ABCD포위망 돌파였다. 이미 중국전선의 감당조차 버거운 상황에서 서구열강에 대한 개전은 결코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었다. 그러나 육군은 군사정변까지 거론하며 완강하게 중국전선 철군을 거부했다. 내각은 폭주하는 군부를 제어할 힘이 없었다 결국 일본이 선택한 돌파구는 또다른 전쟁이었다.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면서 이미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반도를 접수해두었던 일본군은, 진주만 공습이 벌어지기 55분 전에 말레이 반도 침공작전을 개시한다. 서구열강들은 당장의 유럽전선에 집중하고 있었고, 또 일본의 전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남아 지역 연합군의 무장과 병력은 2선급에 불과한 상황이었다. 야마시타 도모유키 장군이 지휘하는 일본군은 보병을 중심으로 밀림에서 조직적이고 빠른 기동전을 펼쳐 삽시간에 말레이시아를 접수하고 싱가포르에서 영국군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영국령 홍콩도 함락을 피할 도리가 없었고, 미국의 맥아더조차도 본국의 명령에 의해 필리핀을 버리고 도망쳐야 했다. 이미 본국이 독일에게 강점된 네덜란드군 역시 인도네시아를 일본으로부터 지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말레이 해전에 이어 실론 해전에서도 패배한 영국 해군은 제국주의 시대 이후 줄곧 활보해오던 아시아의 바다에서 축출되었다. 진주만 공습으로 심대한 타격을 받은 미 태평양 함대 역시 미드웨이 해전에서 만회하기 전까지 일본 해군에 열세 상태였다. 일본군은 명실공히 완력으로 서구 열강을 압도한 것이다.


황인종이 백인종을 발아래 두다


자신들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했던 일본에 의해 연패한 것은 연합국 국민들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윈스턴 처칠은 영국동양함대 궤멸을 2차 대전 중 들었던 가장 충격적인 소식으로 꼽았다. 당시 일본해군의 0식 함상전투기는 '제로센 쇼크'라는 말로 영미권에서 그 위력이 회자되었다. 비시 프랑스인으로서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고 알려진 작가 피에르 불은, '열등한 황인종'에게 패배하고 포로생활을 한 충격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영화 혹성탈출의 원작이 되는 소설을 썼다. 즉, 일본인에게 압도된 서양인의 충격을 유인원에게 지배받는 인간의 이야기로 표현해낸 것이다.

서구 열강을 상대로 거둔 승리는 일제에게 훌륭한 선전감이었다. 일제는 연합국 포로들을 일본 열도는 물론 식민지 조선으로도 이송하여 자신들이 서양을 상대로 거둔 승리를 자랑하며 서양세력에 맞선 대동아전쟁, 대동아공영권 등의 프로파간다를 더욱 강화하였다. 실제로 당시의 선전효과는 대단해서, 인도의 찬드라 보세 등 서구 식민지의 일부 독립운동가들은 일제를 우방으로 삼아 일본군의 지원 하에 무장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현대의 일부 일본인들 역시, 당시의 아시아 태평양 전쟁을 19세기부터 본격화된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침탈을 아시아에서 축출해낸 정의로운 전쟁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 아소 다로 부총리의 '대동아 전쟁' 발언 역시, 아시아ㆍ태평양 전쟁을 '성전(聖戰)'으로 보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해방자가 아닌 침략자였던 일본군


그러나 실상은, 오족협화와 왕도낙토를 표방하였지만 결국 소수의 일본인 특권층과 제국주의 침략정책의 동력만 남겼던 만주국의 선례와 다르지 않았다. 덕장으로 평가되는 이마무라 히토시 대장 치하의 자바 섬 등 일부 지역들을 제외하면, 일본군은 자신들이 서구세력으로부터 해방시켰다고 주장한 아시아 점령지에서 가혹한 전쟁범죄와 철권통치를 이어갔다. 난징 대학살, 마닐라 대학살 등 민간인에 대한 대량학살들까지 거듭 자행되었다. 이 범죄들에 대해서는 전쟁 후 각 지역에서 전범재판을 통한 심판이 이루어졌지만 현대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논란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1995년 당시 일본의 총리대신이던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談話)는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의 과오를 인정하고 사죄하는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반성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전쟁기 일본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대동아 전쟁'의 신화는 여전히 청산되기 요원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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