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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열사 49주기 추도식이 13일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서 진행됐다.
 전태일 열사 49주기 추도식이 13일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서 진행됐다.
ⓒ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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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대구의 남산동에는 가난한 도시 빈민들이 많이 살았다. 노동자를 위해 분신으로 산화한 전태일도, '저 하늘에도 슬픔이'라는 일기와 영화로 유명해진 이윤복도, 코흘리개로 평범하던 나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세 사람은 모두 찢어지게 가난한 도시 빈민의 아들로 고생하며 자랐다.
  
전태일이 1948년, 이윤복이 1951년, 나는 1956년 출생으로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았다. 세 사람은 대구 남산동에 있는 명덕초등학교의 근처에서 100여 미터씩 떨어진 허름한 작은 집에 제각기 살았다. 아마도 가까운 동네의 골목을 오가면서 서로가 얼굴을 부딪치며 지냈을 것이다.

1963년에 전태일은 명덕초등학교를 빌린 청옥고등공민학교를, 이윤복과 나는 명덕초등학교를 4학년과 1학년으로 함께 다녔다. 전태일은 밤에, 이윤복과 나는 낮에 다닌 차이는 있으나 도시 빈민의 아들로 같은 학교에서 어렵게 공부하였다. 물론 그때는 대부분의 아이가 가난하게 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전태일과 이윤복과 내가 다녔던 명덕초등학교, 3층 건물은 1960년대 그대로이고 외벽은 수리했음.
▲ 대구 남산동의 명덕초등학교 전태일과 이윤복과 내가 다녔던 명덕초등학교, 3층 건물은 1960년대 그대로이고 외벽은 수리했음.
ⓒ 배남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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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은 서울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다 중퇴하고 다시 대구로 내려와 청옥고등공민학교를 다녔다. 낮에는 일하러 나가고 밤에 공부하는 야학이었지만 이때가 자신의 일생에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배움에 목말랐던 전태일이 얼마나 공부하는 학생이 되고 싶었는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이윤복은 부모의 불화로 구두닦이 껌팔이 등 소년 가장을 힘들게 하면서 간신히 학교에 다녔다. 자신의 고생을 그대로 일기로 썼는데, 이 일기가 세상에 알려져 영화까지 만들어졌다. '저 하늘에도 슬픔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가난을 헤쳐나가는 어린이의 대명사로 유명해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가난한 6남매의 셋째 아들로 간신히 학교에 다녔다. 늘 기성회비를 내지 못해 독촉을 받으면서 가난한 서러움을 겪었다. 그렇지만 공부는 열심히 하여 성적은 좋아서 좋은 학교로 진학할 수가 있었다. 잘하면 지긋지긋한 도시 빈민을 탈출할 기회를 얻을 수도 있었다.
  
지금도 1960년대 가난했던 그 시절에 전태일과 이윤복에 대해서 잊히지 않는 장면이 떠오른다. 명덕초등학교 저학년이던 나는 학교 운동장에서 늦도록 놀면서 저녁에 전태일이 공부한 청옥고등공민학교의 학생들이 모여 있던 모습을 보기도 했다. 아마도 웃으며 얘기하는 그들 속에 전태일도 있었을 것이다.

또 이윤복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 <저 하늘에도 슬픔이>를 찍는 광경을 신기하게 보기도 했다. 학교에 소방차가 와서 물을 뿌리는데 그 아래를 이윤복이 물에 젖어 지나가고 있었다. 비를 맞으며 고생하는 장면을 그렇게 촬영했는데 어린 눈에도 불쌍하게 보여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도시 빈민으로서 같은 시기에 가까운 동네에서 같은 학교에 다닌 세 사람의 운명은 시대와 함께 격랑을 겪었다. 아마도 세 사람 모두 자신의 운명이 그렇게 전개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격변하는 현대사의 흐름은 세 사람을 그대로 그냥 두지는 않았다.

전태일은 다시 서울로 올라가 청계천의 평화시장에서 봉제 노동자로 일했다. 그러다가 너무나 비인간적인 노동 현실에 눈을 뜨고 결국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라 인간임을 선언하면서 분신으로 항거하며 산화했다. 그래서 2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한국의 노동운동을 상징하는 선구자로 남게 되었다.

이윤복은 유명세는 잠깐이고 다시 가난의 일상으로 돌아가 고생을 했다. 간신히 고교를 졸업하고 돈벌이에 나섰고 결혼하여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여러 직장을 옮겨가며 과로했던 그는 간 경화로 인해 급작스럽게 1990년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나는 다른 형제들의 희생으로 공부를 잘해서 서울의 명문대학을 갈 수 있었다. 가난을 탈출할 기회를 간신히 얻었으나 운동권 학생으로 감옥에 가고 또 노동운동까지 하면서 원래의 도시 빈민으로 돌아갔다. 환갑을 넘기며 지금까지 살고 있지만 서울의 변두리에 초라하게 살아가고 있다.
 
1960년대의 엣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어 가난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 대구 남산동의 낡은 집들 1960년대의 엣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어 가난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 배남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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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말에 낙엽귀근(落葉歸根)이라고 하였다. 나뭇잎은 자기를 생장해준 뿌리 근처로 떨어져 돌아간다는 뜻이다. 바로 이 말이 전태일과 이윤복 그리고 나에게 딱 맞는 말이다. 각자가 다른 방식으로 힘껏 살아갔지만 결국은 도시 빈민을 벗어나지 못하는 운명을 살았다.

이제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게 되니 전태일과 이윤복 그리고 내가 다름 아닌 하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22세에 항거하며 분신했거나 38세에 과로로 급사했거나 또 환갑이 넘게 초라하게 살고 있거나 결코 다른 모습이 아니다. 가난의 역사를 힘겹게 헤쳐나온 도시 빈민의 또 다른 자화상이다.

어쩌다 비슷한 시기에 대구의 가까운 동네에서 같은 학교에 다녔는지 모르지만 두 사람에 대해 한없는 정을 느끼게 된다. 두 사람에게 노동자를 위해서든 가족을 위해서든 꿋꿋하게 열심히 잘 살았다고 위로해주고 싶다. 그리고 나 역시 두 사람에게 떳떳하게 잘 살았다고 위로를 받고 싶다.

전태일이 분신한 11월을 보내면서 세 사람의 인생을 살피며 그 운명을 생각하니 비감한 기분이 든다. 길든 짧든 살아서 도시 빈민을 벗어날 수 없었던 슬픈 숙명을 떠올리며 먼저 간 두 사람의 명복을 빌어 본다. 머잖아 남은 한 사람도 따라가게 되면 더는 빈민이 없는 하늘나라에서 세 사람이 함께 평안히 영생할 것이다.

태그:#대구 남산동, #명덕초등학교, #전태일, #이윤복, #도시 빈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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