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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치. 남을 대하기에 떳떳한 도리나 얼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을 뜻한다. 이 단어는 주로 '없다'와 만나 분노로 이어지곤 한다. '염치 있는' 사람들을 만나본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염치'란 단어가 원래 갖고 있는 사회적 의미를 조명하고자 한다.[편집자말]
각자도생(各自圖生)이라고 했다. 제각기 살길을 찾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하는 것으로도 읽혔다.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가 올해 초 한 일간지를 통해 2019년 화두로 제시했던 사자성어다. 없는 사람들에게 더 가혹하게 다가올 이 네 글자는 2020년이 다가오는 지금까지도 분명 유효하다.

이를 뒷받침하는 숫자는 37.5(중앙자살예방센터 2018년 통계)만으로도 충분하다. 깨어 있는 시간만을 따진다면, 한 시간에 두 명 꼴로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나라다. 걱정, 불안, 두려움이 너무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숫자다. 나이든 사람들은 나이든 사람대로, 젊은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그러하다. 제각기 살길을 찾아내기가 너무 팍팍하다. 그런데 대체, 무슨 염치인가.

어느 독자의 댓글에 공감할 수밖에 없는 세상
 
 김태형 심리연구소 '함께' 소장
 김태형 심리연구소 "함께" 소장
ⓒ 김태형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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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 돌아가는 세상에서 염치가 무슨 ㅋ."

앞서 나갔던 박주영 판사 인터뷰 포털 기사에 달렸던 댓글이다. 다른 포털 기사에 있었던 "지금 이 시대는 몰염치 시대 아닌가. 부끄러움을 인정하지 않는 너나 우리 모두"란 댓글 역시 이런 정서를 대변한다. 공허하다는 것이다. 부질없는 이야기란 뜻도 한편 담겨 있다.

그런데 아니란다. 심리학적으로 "염치 있는 사람일수록 정신적으로 굉장히 건강하다"고 한다. 오히려 "이런 나라에서 개인이 건강하게 버티기에는 염치 있게 사는 게 낫다"고도 했다. <불안증폭사회> <트라우마 한국사회> <대통령 선택의 심리학> 등을 펴낸 김태형 심리연구소 '함께' 소장의 말이다.

김 소장은 최근 나온 <올 어바웃 해피니스>(김아리 엮음, 김영사)란 책에서 "신자유주의의 특징은 승자 독식의 원리, 1등에게 몰아주고 나머지는 너무 적게 준다는 것"이라며 "돈이 없어서 불행하다고 착각하게 만든 게 신자유주의 체제"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행복은 관계, 공동체에 의해 좌우된다"며 "경제성장이든 사회발전이든 항상 관계를 더 건강하게 만드는 쪽으로 가는 게 이상사회"라고 강조했다.

이 주장에 주목했다. '관계를 더 건강하게 만드는 쪽으로 가게 할 수 있는 게', 염치다. 사전적 정의 자체가 그러하다. "체면을 차릴 줄 안다"는 말 자체가 타인과의 관계를 전제로 한다. 그런가 하면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란 뜻은 부끄러움을 알아채려면 자각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풀어낼 수 있다. 그래서 그를 지난 6일 만났다.

"그런데 다 부모 탓이냐는 겁니다"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2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지난 9월 2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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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소장은 인터뷰에서 염치란 개념에서 중요한 것은 행동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부끄러움을 자각하는 높낮이는 있을 수 있지만, 아예 (자각이) 없는 사람은 드물다"고 전제했다. 그러면서 김 소장은 "부끄러움을 자각하고 절제를 한다든가 하면 정상적"이라면서 "그런데 오히려 방어를 하려고 하거나 이상한 행동을 하면서 문제가 되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염치가 있느냐 없느냐의 갈림길"은 결국 자각에 이어지는 행위로 나뉜다는 설명이다.

그러면서 김 소장은 행위의 편차를 만드는 데 있어 "후천적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권위주의적인 환경에서 성장하면 스스로만의 양심을 만들기 어렵다, 잘못했으면 비난이 쏟아지니까 피하기 급급해지기 마련"이라며 "건강하게 존중받으면서 자신의 행동에 책임지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줬을 때 염치 있는 행위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가정이 1차적으로 중요하다"고 했다. 곧바로 이어진 말은 이것이었다.

"그런데 다 부모 탓이냐는 겁니다."

'전투적 사회심리학자'라는 독특한 색깔을 갖고 있는 그다운 말이었다. 김 소장은 "부모들이 왜 그렇게 키우냐를 생각해야 한다, 사회에 문제가 있으면 그게 집으로 투영된다"면서 이렇게 말을 이어갔다.

"한국 부모들은 일단 돈에 압도돼서 삽니다. 돈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하다, 또는 돈 없으면 존중 못 받는다, 사람 대접받을 수 없다, 이런 걸 자기 자식이 겪게 하기 싫은 거잖아요. 그러니까 공부하기 싫어하는 애들에게 설득보다는 '공부 안 하면 거지 된다'는 식의 강압적 방식을 택하기 쉬워요. 그럼 아이들은 처벌이나 비난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죠. 염치를 가진 아이로 자라기 쉽지 않다는 겁니다."

염치 발언했던 조국과 나경원... 그들은 왜?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29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에서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하고 있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지난 10월 29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에서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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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더욱 사회 지도층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했다. '있는 분들', 또는 '높은 자리에 계신 분들'의 염치 운운이 더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를 따지던 중이었다. 지난 9월 2일 열렸던 '11시간 기자간담회'에서 조국 전 법무부장관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은 "염치와 간절함을 항상 마음에 두겠다"는 것이었다. 김 소장은 적지 않은 사람들이 조 전 장관에게 표시한 실망감을 이렇게 해석했다.

"아무리 사회가 맛이 갔어도 공직자나 정치인들은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어요. 그러다 보니까 그게 아니었을 때 실망감이 더 큰 거죠. 또는,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솔직하기라도 해라. 트럼프 인기 비결이 그런 거 잖아요. 그러니까 염치가 있든가, 그게 없으면 솔직하기라도 하든가, 이런 건데, 둘 다 아니었죠. 검찰 과잉 수사 등에 대해서는 분명히 목소리를 높여야 하지만, 또 한편으로 국민들이 봤을 때는 (조국 전 장관에게) 문제가 있었던 거죠."

염치란 단어에 대한 사회적 공허감을 더 커지게 할 만한 사안이냐고 물었다. 곧바로 "그렇다"는 답이 돌아왔다. 김 소장은 "한 마디로 나 혼자 병신 짓 했네 이렇게 된다"면서 "내가 왜 그동안 착하게 살려고 했을까, 이런 생각을 유포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짚었다. 다만 그는 "이번 일이 개혁의 불쏘시개 역할을 하는 것이 된다면 오히려 염치에 대한 사회적 감도는 더 높아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최근 염치란 단어를 사용한 또 한 명의 정치인도 도마에 올렸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지난 10월 29일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두고 "염치없는 대통령"이라고 비난했었다. 김 소장은 "세상에 대해 적대적 의도를 많이 가진 사람은 타인에 대해서도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통해 세상을 보기 때문"이라면서 "이런 기준으로 본다면 상대가 염치없는 행동을 한다고 오해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김 소장의 설명은 일반론으로 이어졌다.

"지도자가 자신의 문제를 반성하고 돌아보고 얘기할 줄 알면 따르는 사람도 배웁니다. 반대로 지도자가 자신의 문제는 싹 덮고 남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면 따르는 사람도 비슷해져요. 내로남불을 일반화시키는 거죠. 역시 염치의 사회적 감도를 떨어뜨릴 수 있어요. 오히려 염치없게 살자고 부추기는 경우가 되는 거죠. 부모가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백 날 해봐야 나쁘게 살면 소용없잖아요. 마찬가지로 어떤 정치인의 행동, 전반적인 삶, 태도, 자세 이런 것들이 대중에게 학습 효과를 줘요. (부정적인 경우는)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치명적이죠."

"이런 나라... 염치 있게 살면 행복할 가능성 높아"
 
 김태형 심리연구소 '함께' 소장. 그는 인터뷰에서 "정신 건강을 파괴하는 주범은 죄의식이나 죄책감, 그리고 그로 인한 스트레스"라면서 "이런 나라에서나마 개개인이 버티기엔 염치 있게 사는 게 낫다"고 주장했다.
 김태형 심리연구소 "함께" 소장. 그는 인터뷰에서 "정신 건강을 파괴하는 주범은 죄의식이나 죄책감, 그리고 그로 인한 스트레스"라면서 "이런 나라에서나마 개개인이 버티기엔 염치 있게 사는 게 낫다"고 주장했다.
ⓒ 김태형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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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순환이다. 어떤 독자의 댓글을 다시 소환하면 "미쳐 돌아가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그럼 개인은, 부모는, 뭘 어떻게 해야 하나.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김 소장은 "이런 나라에서나마 개개인이 버티기엔 염치 있게 사는 게 낫다"고 했다. 그는 "정신 건강을 파괴하는 주범은 죄의식이나 죄책감, 그리고 그로 인한 스트레스"라면서 "염치 없는 짓을 하면 자꾸 스트레스가 쌓이고 그게 누적돼서 임계치를 넘어서면 정신 붕괴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반대로 "염치 있게 살면 그게 안 쌓이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굉장히 건강하다"고 강조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염치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무서워하지 않아요. 내면에서 올라온 감정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맞게 행동하고 그럽니다. 자기를 부정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심리학적으로 마음이 건강한 사람들은 자신이 비판이나 지적을 받아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자신의 잘못을 수용합니다. 사과도 자연스럽게 잘 하죠. 그러니까 개인적으로도 행복할 가능성이 높은 겁니다. '사람들한테 잘 보여야 한다, 어떤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그런 강박이 별로 없는 사람, 후자가 더 행복하지 않겠어요?"

아무리 그래도 손놓고 있으면 또한 염치 있는 국가라고 할 수 없다. '염치에 대한 사회적 감도를 높이기 위한 대안'으로 김 소장은 기본 소득제 도입을 주장했다.

"염치를 지키고 살수록 손해 본다? 그럼 손해 안보게 해주는 게 관건입니다. 돈의 노예로 살고 있으니까, 그로부터 해방시켜주는 게 중요하죠. '돈이 없으면 생존 불가다, 무시당한다', 이걸 풀어줘야 해요. 북유럽 국가를 연구해 보면 관계의 질이 우리보다 우수합니다. 불안과 공포가 심하지 않아요. '돈 없으면 큰 일 난다', 그런 게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 사회는 '개인의 생존은 개인이 책임진다', 그런 곳이잖아요. 기본 소득제 해야 합니다. 관계의 질은 기본적으로 상대를 존중하느냐, 상대를 어떤 태도로 대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기본 소득제는 상대를 협력의 대상이나 공존의 대상으로 여길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제도입니다. 매월 내 통장에 국가에서 준 100만원이 들어온다 쳐요. 그 돈, 세금이잖아요. 그럼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죠. 나한테 100만원 주는 사람이구나, 내 이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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