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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 I am become Death, the destroyer of worlds"

19.10.10 20:18l

검토 완료

이 글은 생나무글(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1945년 7월 16일 오전 5시 29분. 맨해튼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던 코드 네임 트리니티의 핵폭탄 실험이 멕시코의 소코로섬 근방에서 이뤄졌다. 트리니티라는 코드 네임의 창시자이자 맨해튼 프로젝트 감독이었던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2차 세계대전의 종결 후 만들어진 다큐멘터리(The Decision to Drop the Bomb produced by Fred Freed, NBC White Paper, 1965)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폭탄은 떨어졌고, 세상은 이제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었고, 몇몇이 울고, 몇몇은 웃었지만, 대부분의 침묵 속에서 자신은 인도의 고대 서사시 바하바라타를 생각했다고 한다. 서사의 주인공인 비슈누는 왕자를 설득하기 위해 부하를 데리고 왕자의 거처로 무장 진입한다. 기세가 당당해진 비슈누가 왕자에게 소리치는 말은 다음과 같다. "Now I am become Death, the destroyer of worlds."

얼마 전 시작한 SF 그리고 과학책 소모임에서 우리는 공통하게도 한 문장에 주목했다. 모임의 두 번째 책이었던 테드 창의 '숨'에 수록된 단편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에 실린 문구였다. 바로 "글쓰기는 테크놀로지다"라는 말이었다. 빠르게 변화하는 과학 기술에 현혹된 나머지 사람들은 글과 말을 총괄하는 활자 역시 한낱 테크놀로지에 불과하다는 점을 잊는다. 우리가 추구하는 수많은 진실, 공동체의 규칙, 역사의 기록과 발전 모두 이 글쓰기라는 테크놀로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글쓰기 역시 테크놀로지라는 점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테크놀로지가 가지는 본질적인 한계 그리고 그것의 맹점을 이용하는 이들에게 우리는 얼마나 속아왔다는 것인가. 진실과 이해는 한층 더 복잡해진다.

1928년 여름휴가를 다녀온 미생물학자 알렉산더 플레밍은 본인의 페트리 접시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는 점을 관찰한다. 배지를 오염시킨 균의 근처에 본인이 기르고 있던 포도상구균의 모습이 녹아 없어져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알고 보니 여름휴가를 다녀올 흥분 때문이었는지 플레밍은 균을 기르던 페트리 접시를 배양기에 넣지 않고 실험 테이블에 놓고 갔고, 아래층 실험실에서 기르던 균(푸른 곰팡이)의 포자가 떠돌다가 문이 열린 플레밍의 실험실 배지에 안착된 것이었다. 이것이 나중에 페니실린의 발견으로 이어졌으니 단순히 운의 연속이라고 이해하기 쉬운 일이다. 하지만 40년 가까이 이 사건은 제대로 재현되거나 이해되지도 못했다. 왜냐면 두 균이 성장하는 온도 자체가 20 도와 35도로 상극이기 때문이다. 이를 조사하던 플레밍의 조수가 나중에서야 밝힌 사건의 진실은 놀라웠다. 플레밍이 휴가를 간 9일간 놀라울 정도의 이상 저온 현상이 벌어졌고, 창문을 열고 간 플레밍 덕분에 푸른 곰팡이에게 맞는 환경이 갖춰져서 페니실린을 내뿜을 수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이 운이 없다면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 인간의 운명은 운명을 이해하려는 노력과 시도는 무슨 의미일까.

"글쓰기는 테크놀로지다"라고 말한 테드 창의 선언처럼 신념과 이데올로기 역시 수사(rhetoric)에 불과하다는 입장도 있다. 세계적인 석학으로 평가받는 앨버트 허시먼은 저서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에서 보수는 신념, 가치, 이데올로기가 아닌 대부분 수사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가 내놓는 보수의 대표적인 수사는 총 세 가지로 구성된다. 바로 역효과 명제, 무용 명제 그리고 위험 명제다. 다른 시도를 하면 도리어 역효과를 불러일으키거나, 쓸모없다고 판명되거나 혹은 더 나아가 우리를 위험하게 만들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성과 논리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철저히 수사에 불과한 그들의 입장은 불안에 떠는 사회일수록 휩쓸려 가기 쉬운 기술로, 그야말로 테크니션이라고 평가해야 옳다. 역사적인 전통을 자랑하는 이 기술은 지금도 힘을 잃지 않고, 여전히 사람들을 말의 홍수 속으로 떠밀어 넣고 있다.

2019년 9월 9일 한 인물이 우리나라의 법무장관으로 임명됐다. 임명도 되기 전부터 시작된 가족을 둘러싼 의혹은 여전히 현재 진행 중으로 개혁의 객체인 검찰의 주도로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고 있다. 사실이 사실로 이해되기 전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마치 플레밍에게 일어난 사건이 40년이 지난 뒤에야 이해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진실의 여부와 관계없다는 듯이 찬성과 반대, 혹은 전통적인 꼬리표 지우기라는 방식으로 점철된 진영 싸움으로 사람들을 이끌고 있다. 찬성하는 사람에겐 평생 그 딱지가 꼬리표처럼 지워질 것이고 훗날 생계에 있어 불리한 입장에 놓일지도 모르는 위험이 따른다. 반대편의 사람들은 서사시의 비슈누가 그랬던 것처럼 말과 수사로 무장하여 진실을 현혹하면서까지 싸움을 이어오고 있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이것이 언제나 그래왔듯 개혁 의지의 싸움이 아닌, 청렴결백의 싸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다. 그의 가족을 두둔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의혹이 모두 진실로 밝혀진다고 해도 내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사건과 이해가 서로 독립적인 것처럼 진행되듯이, 인간으로써의 완벽한 훌륭함과 개혁 의지 역시 마찬가지로 독립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완벽한 사람들을 찾다가는 언젠가 우리가 가진 시간마저 모두 잃는 것이 아닐까. 그제서야 우리는 뒤늦게 회고할지 모른다. 이미 핵폭탄은 떨어진 뒤겠지만.

덧붙이는 글 | 한겨레에 현재 투고를 한 상태이고, 블로그에도 개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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