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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발령의거, 광주학생독립운동을 비롯한 나주의 의향정신을 상징하는 금성관의 망화루
 단발령의거, 광주학생독립운동을 비롯한 나주의 의향정신을 상징하는 금성관의 망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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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주목의 관아문으로서 원통한 일이 있는 사람이 하소연할 수 있도록 북을 설치한 나주의 금성관 정수루
 나주목의 관아문으로서 원통한 일이 있는 사람이 하소연할 수 있도록 북을 설치한 나주의 금성관 정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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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을 대표했지만 쇠퇴한 모습의 구도심

나주는 과거 전주와 더불어 호남의 대표적인 도시로 손꼽혔습니다. 하지만 전주가 전북의 중심도시로 성장했던 것과는 다르게 나주는 광주의 성장과 함께 급격히 몰락하면서 소도시로 전락했습니다.

특히 나주의 중심이었던 구도심은 한국전력공사를 비롯한 공기업들이 다수 입주한 빛가람혁신도시와 나주 곰탕을 먹기 위해 몰려오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나주곰탕거리와 대조되는 모습을 보일 만큼 사람의 발자취가 뜸한 곳이 되었죠.

나주 평야와 '목사고을'이라는 수식어로 증명했던 과거의 모습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요. 하지만 '천년 목사고을'이라 불릴 정도로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잘 간직하면서 화려한 부활을 꿈꾸고 있는 곳도 바로 나주의 구도심이 되겠습니다. 지금부터 나주 구도심에서 둘러볼 만한 곳을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과거 나주의 관아이면서 중앙의 사신들의 숙소 역할과 망궐례를 지내던 지방궁실을 맡았던 금성관
 과거 나주의 관아이면서 중앙의 사신들의 숙소 역할과 망궐례를 지내던 지방궁실을 맡았던 금성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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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나주목사가 기거했던 살림집이었지만 현재 숙박체험이 가능한 전통문화 체험공간으로 탈바꿈한 나주목사내아
 과거 나주목사가 기거했던 살림집이었지만 현재 숙박체험이 가능한 전통문화 체험공간으로 탈바꿈한 나주목사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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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의 역사와 함께 존재해왔던 구도심의 명소들

나주는 후삼국 시대 당시 왕건-견훤의 공방전과 고려 개국공신인 왕건-나주 오씨와의 인연, 고려 성종 2년(983)에 중앙집권을 위한 12목 설치, 현종 9년(1018)에 8목 개편과 같은 사건들을 통해 고려를 상징하는 곳이면서 호남의 중심지 역할을 오랫동안 맡아왔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요, 1896년 전남도청이 광주로 이전할 때까지 호남의 중심도시로서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지방궁궐과 객사로서 역할을 맡아왔던 금성관과 조선시대에 나주목사가 기거하던 관사와 같았던 나주목사내아, 나주목 관아문이면서 나주의 '청와대 국민청원' 역할을 맡았던 '나주의 신문고' 정수루, 그리고 읍성도시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 나주읍성 사대문이 그 증거입니다.
 
 금성관의 외삼문과 내삼문 중간에 있던 금성관의 중심문
 금성관의 외삼문과 내삼문 중간에 있던 금성관의 중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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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0여 년 동안 호남의 중심지였던 나주를 지켜왔지만 일제강점기 때 대부분 파괴되고 일부만 복원된 채 남아있는 나주읍성
 600여 년 동안 호남의 중심지였던 나주를 지켜왔지만 일제강점기 때 대부분 파괴되고 일부만 복원된 채 남아있는 나주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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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금성관은 나주목이라는 지역 특성상 관찰사의 업무를 담당하면서 사신 접대를 맡는 관아와 객사뿐만 아니라 왕께 충성을 다하는 망궐례까지 치르던 장소였고, 나주목사내아는 지금의 도지사/광역시장 관사처럼 나주목사가 기거하던 생활집이었기에 두 장소 모두 역사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때는 각각 나주군청사와 군수 관사로 사용되면서 원형이 변형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는데요, 다행히 지금은 모두 복원되었습니다. 금성관의 경우 일제 때 없어졌던 건물(동·서익헌, 망화루)들이 복원되었고, 나주목사내아도 복원되어 2009년 5월부터 숙박체험이 가능한 전통문화 체험공간으로 탈바꿈했죠.

하지만 600여 년 동안 호남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던 나주를 지켜주었던 나주읍성은 제대로 된 흔적이 많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한양도성과 비슷하게 뒤에는 산이, 앞에는 물이 있는 배산임수 지형에 성벽 아래를 1m 정도의 자연석을 이용한 '잔돌끼움쌓기' 방식을 사용한 성벽과 반원형의 옹성이 설치된 성문이 있었기에 온전히 존재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일제강점기때 대부분 파괴되고 맙니다.

그나마 4개의 성문(동점문·서성문·남고문·북망문)과 서성문의 성벽 일부가 복원된 형태로 남은 것을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까요. 실제 주민들이 거주하는 낙안읍성과 비교했을 때 아쉬운 느낌이 드는 부분입니다.
 
 호남지방의 대표적인 상류층 가옥이자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인 박준채와 박기옥이 광주로 통학하면서 기거했던 남파고택
 호남지방의 대표적인 상류층 가옥이자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인 박준채와 박기옥이 광주로 통학하면서 기거했던 남파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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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진원지이면서 1929년 10월 30일에 발생했던 '나주역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인 구 나주역사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진원지이면서 1929년 10월 30일에 발생했던 "나주역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인 구 나주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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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독립운동의 연결고리, 남파고택과 옛 나주역사

일제강점기의 호남은 농산물과 농토가 풍부한 지역 특성상 일본의 경제침탈과 착취의 대상이 되었는데요, 특히 나주는 '궁삼면 토지회수 투쟁'과 같은 농민들의 투쟁이 일어났을 만큼 심한 수탈이 이어졌습니다.

여기에 식민교육의 모순과 정치적 핍박이 심해지면서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화약고'같은 분위기가 형성되었는데요, 기독교에서 세운 학교(숭일, 수피아 등)나 3.1운동 이후 높아진 교육열을 통해 세워진 학교(광주고보, 광주여고보)들이 존재했던 광주와 달리 나주는 일반 학교나 종교계 학교가 없는 실정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주 학생들은 통학 열차를 타고 광주에 있는 학교까지 등교해야 했습니다. 이런 열악한 조선 학생들의 교육여건과 일제에 저항하고자 만들었던 학생들의 비밀결사대인 성진회와 독서회, 소녀회 등이 조직되었던 것이 식민교육에 저항하면서 민족운동의 싹을 틔우는 계기가 된 것이죠.
 
 일본의 수탈과 식민교육으로 인해 끓어올랐던 한국 학생들의 분노가 '나주역 댕기머리 사건'으로 인해 폭발했고, 이는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일본의 수탈과 식민교육으로 인해 끓어올랐던 한국 학생들의 분노가 "나주역 댕기머리 사건"으로 인해 폭발했고, 이는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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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학생들의 분노를 촉발시킨 것이 바로 1929년의 '나주역 사건'인데요, 1929년 10월 30일, 학교를 마치고 귀가하는 도중 나주역에서 광주중학 학생 후쿠다가 광주여고보(現 전남여고) 학생 박기옥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면서 모욕을 주자 광주고보에 다니는 박준채가 후쿠다에게 항의를 한 것이 그 시작입니다.

이 과정에서 잘못을 저지른 후쿠다가 박준채에게 '조선인 주제에'라고 모욕하며 적반하장 태도로 나가자 두 사람을 비롯한 한국-일본 학생들간에 싸움이 붙었고, 일본 경찰이 일본 학생들의 편을 들며 싸움을 해산시킴으로서 단순한 충돌로 마무리 지어지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다음 날인 10월 31일에 통근 열차 안에서 발생한 한-일 학생들간의 싸움과 그 다음 날인 11월 1일의 광주역 충돌 사건으로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치닫게 되었죠.

그러다 명치절(일본 메이지 일왕의 메이지 유신을 기념하던 날)이었던 11월 3일, 광주고보(現 광주일고) 학생들은 기념식이 끝난 후 통학 열차에서 있었던 충돌에 대해 편파적인 기사를 작성했던 광주일보사를 습격하고, 신사참배를 하고 돌아오던 광주중학생들과 충돌한데 이어 광주 시내를 누비면서 시민들과 함께 시위를 전개하기에 이릅니다.

그러자 일제는 70여 명의 학생들을 체포하고 휴교령을 내리지만, 오히려 광주의 장날이었던 11월 12일에 두 번째 시위를 전개합니다. 이때는 첫 수업 시작종을 신호로 광주고보뿐만 아니라 소수의 광주사범학교(現 광주교대) 학생들과 광주농업학교(現 광주자연과학고) 학생들까지 시위에 참여했죠.
 
 일본의 수탈과 식민교육으로 인해 끓어올랐던 한국 학생들의 분노가 '나주역 댕기머리 사건'으로 인해 폭발했고, 이는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일본의 수탈과 식민교육으로 인해 끓어올랐던 한국 학생들의 분노가 "나주역 댕기머리 사건"으로 인해 폭발했고, 이는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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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학생들을 체포하고 광주에서 발생한 두 번의 시위를 외부에 알려지지 못하게 막았지만, 소식은 나주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 전해집니다. 그로 인해 박준채와 함께 남파고택에 기거했던 나주농업보습학교 학생 유찬옥이 신간회 나주지회 서기장인 박공근과 함께 나주에서의 시위를 계획하게 되었고, 11월 27일에 나주보통학교 학생들과 함께 나주학생시위를 전개합니다. 이로 인해 학생들의 시위는 민족운동으로 확대되어 전국 각지와 해외까지 확산되었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박경중 가옥과 옛 나주역 건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박재규가 지어서 '남파고택'이라 불리웠던 박경중 가옥은 1884년에 지어진 초가집 형태의 초당채를 비롯해 안채, 아래채, 문간채, 바깥사랑채와 같은 기와집들이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서 나주의 상류 주택이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기에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은 곳입니다.

또한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과 인접해 있는 구 나주역사는 일제강점기 때 지었기 때문에 기본 구조와 골조 목재같은 부분은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고, 역무원 마네킹과 함께 과거에 사용되었던 승차권, 통표를 비롯한 철도용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두 장소 모두 공통점이 존재하는데요, 바로 광주학생독립운동과 연관성이 있는 장소라는 점이 되겠습니다. 먼저 남파고택의 경우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이었던 박준채와 그의 사촌 누이 박기옥, 고종 사촌이었던 유찬옥이 살았던 곳이고, 구 나주역사는 일제 치하에 살았던 한국 학생들의 분노를 일으킨 '나주역 사건'으로 시작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진원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남파고택과 옛 나주역사 모두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연결고리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우리 역사에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곳임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죠.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필자의 블로그(https://gl-revieuer86.postype.com/post/3456717)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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